## 999화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의 콩쿠르 준비 일정도 정해졌다.
두 사람도 똑같이 선택권을 얻었다.
바로 한 달 동안 오전엔 수업을 듣고 오후엔 레슨과 연습을 하는 일반적인 일과를 보내다가 콩쿠르에 나가는 것과 일주일 동안 공부를 한 다음 간이 시험을 쳐서 성적을 내면 수업을 면제받는 것이었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그러했듯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도 시험을 치는 쪽을 택했고, 때문에 스터디 룸에선 공부가 한창이었다.
“발렌티나, 나 이거 제대로 외웠나 좀 봐 줄래?”
“응, 그럴까?”
정말 시험을 바로 앞두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니 자연스레 분위기도 좋았다.
숙제를 하는 아나톨리도 굉장히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난 연습이 있지만 모처럼 바르바라가 이 스터디 룸에서 공부를 한다기에 잠깐 보러 온 참이었다.
지금 보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도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 간 공부해서 간이 시험을 치는 건 나도 얼마 전 했었던 일이고, 점수도 굉장히 잘 받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공부를 도와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기, 그거 제가 도와 드릴 수도 있…….”
“넌 연습하러 가야지, 타티아나.”
하지만 내가 입을 열자마자 발렌티나가 바로 내 말을 격추시켰다. 당황해서 바라보니 바르바라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우리 공부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넌 모처럼 수업도 안 해도 되는 상황인데 이렇게 시간 뺏길 것 없어. 그 시간에 피아노 연습 하는 게 나아.”
“그래도, 바르바라…….”
“그래도가 아니라 네가 우리한테 시간 뺏겨서 연습에서 손해 보면 미안해서 안 돼. 그렇잖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입장을 반대로 놓고 생각하더라도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자, 자. 어서 가. 어서.”
“잠깐만요…… 아, 당기지 마세요.”
그래도 내가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자 못 참겠다는 듯 발렌티나가 벌떡 일어나서는 날 끌고 문 앞까지 데려가더니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도 닫혀 버리자 진짜로 난데없이 쫓겨난 기분이었다. 난 멍하니 스터디 룸 팻말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무해요.”
이 스터디 룸으로 아이들을 불러 모은 건 내가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쫓겨나니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다.
괜히 시무룩한 기분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들어가서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에게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의 말이 옳았으니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것도 부담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움을 안고 난 발길을 돌렸다.
힘없이 복도를 걷고 있는데 마침 스터디 룸에 가 보려는지 복도에 나와 있던 아나스타샤가 날 발견했다.
“뭐야? 무슨 일이니? 타티아나.”
힘이 없는 걸 봤는지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스터디 룸에서 쫓겨난 일을 이야기했고,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래서 이렇게 우울했던 거야?”
“조금요.”
“그 애들은 그렇게 말할 만도 하지. 안 그렇겠니?”
아나스타샤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해는 한다. 단지 기분상의 문제를 겪고 있을 뿐이지.
내가 말없이 서 있자 그녀는 내 마음 또한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나 보네?”
“어쩔 수 없나 봐요.”
“뭐 어떠니? 신경이 쓰일 수도 있는 거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지 못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진다.
내 성격이 이런 건 결국 고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밝게 웃으며 내 그런 면도 긍정해 주더니 이내 비밀 이야기를 하듯 더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정 그러면…… 다른 방법을 써 볼까? 어떠니?”
“다른 방법이요?”
“응.”
설마 장난이라도 치려는 게 아닌지 불안해져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이어 말했다.
“정해진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이 있고, 정말 바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1시간 정도는 쓸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무엇인진 몰라도 난 일단 그녀의 뜻을 따라 주고 싶어졌다.
***
시험공부는 끔찍했다. 여덟 개나 되는 과목을 한 번에 공부하려니 머릿속이 스파게티 면처럼 꼬불꼬불 꼬이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옆의 바르바라와 함께해서 그나마 할 수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발렌티나는 3시간 동안 시험공부를 하면서 바르바라와 끈끈한 동지애를 느꼈다.
그러면 그 후 이어진 피아노 연습이 속 편했냐 하면 당연히 그것도 아니었다.
“잘되던 게 안 되니까 더 화나네…….”
발렌티나는 일단 쇼팽 콩쿠르 곡들을 주축으로 연습 중이었다.
예선 통과가 최우선 목표이니 협주곡 같은 건 모조리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니 확실히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보단 부담이 덜한 상태여야만 하는데…… 막상 하니까 잘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예선만 하더라도 준비해야 할 곡이 적지 않았다.
녹턴과 마주르카, 에튀드, 발라드 등으로 총 6곡을 준비해야만 한다.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곡들이 많아서 한 곡 한 곡의 부담은 적었지만, 곡을 모두 합치면 정말 만만찮은 부담이 된다.
그 전부를 엮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유려하게 펼쳐 내면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각각의 곡에 심혈을 기울여서 자신만의 것으로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분명히 전날만 해도 마음에 들게 잘되던 에튀드의 한 프레이즈가 오늘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연습하며 고쳐 보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이상해지는 기분만 들었다.
오기가 생긴 발렌티나는 오늘 이 곡과 아예 끝장을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이렇게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
그러나 지금 시간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발렌티나가 준비해야 할 것은 굉장히 많았다.
한 곡도 아니고 한 프레이즈에 하루를 통째로 할애할 순 없었다.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이 상태를 기억해 놓고 내일 레슨을 받아서 조금씩 고쳐 나가야 했다. 그게 최선임을 알면서도 발렌티나는 짜증을 느꼈다.
“……그래도 잘해야지.”
그녀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바르바라도 있었고, 다른 콩쿠르이긴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한 달 내내 세 번이나 연달아 무대에 올라야 한다.
아까 타티아나가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매정하게 밀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다른 곳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최고의 연주를 위해 지금도 분명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연습할 때 그녀가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지 발렌티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질 수 없지.’
친구들이자 라이벌들이 있기에 발렌티나는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입술을 씰룩이던 그녀는 다시 건반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방과후 종이 울릴 때까지 연습을 하고 보니 어느새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학교를 나왔다.
“어라?”
집에 가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연습을 재개할 생각뿐이었는데, 교문 앞에 낯익은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발렌티나를 보고는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싶어 다가갔더니 아나스타샤가 발랄하게 말했다.
“연습 다 한 거야? 어땠니?”
“뭐, 그냥 그랬어.”
“잘 안 되었나 보네.”
기껏 눌러 참았던 짜증이 불쑥 치솟아 오른다. 아나스타샤가 악의 없이 자주 이런다는 건 알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상대해 주기 싫다.
“왜 이래? 진짜. 내 연습 도와줄 거 아니면 저리 가.”
“다른 게 아니라 나도 오늘은 영 연습이 잘 안 되어서.”
“……응?”
“네 연습을 도와줄 순 없지만 다른 걸 도와줄 순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발렌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뭔데?”
“우린 몸이 재산 아니겠니? 그러니까 스파라도 갈까 했는데…… 바르바라가 특이한 이야기를 해서.”
발렌티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옆의 바르바라에게 향했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르바라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우리 이거 받아 볼래? 영하 140도에서 냉찜질 사우나를 하는 건데.”
“뭐라고……? 영하 140도?”
“괜찮아. 크라이오테라피cryotheraphy라고 하는 건데 습기가 없어서 안 춥대.”
“안 추울 리가 있어? 얼어 죽는 것 아니야?”
“안 죽어. 안 죽어.”
문득 발렌티나는 옛날 생각이 났다.
주현절에 아버지를 따라서 얼음물에 입수하는 의식을 치렀었는데 곧바로 감기에 걸려서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발렌티나는 추운 행사라면 절대 사양이었다.
추운 걸 싫어하는 건 발렌티나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오도카니 서 있는 타티아나도 이대로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전 그건 좀…….”
“타티아나도 무서워하잖아. 그만해.”
“재미있어 보이는데…… 그럼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은 어때?”
“?”
뭔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자꾸 들려서 의아해하자 이번에도 바르바라가 이것 보라며 무언가 찾아 보여 주었다.
그 영상에선 한 남자가 여자의 목을 꺾고 있었다.
“꺄악! 뭐야 이게!”
“이게 그렇게 시원하…….”
“싫어! 절대로 안 해!”
바르바라는 자꾸 같이 하자며 부추겼지만 발렌티나는 극구 거절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도 무서워하자 아나스타샤도 이건 너무 심하다며 그냥 평범하게 스파에 가자고 권했다.
“다 같이 피로를 푸는 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니?”
“…….”
뭐가 어떻게 된 건진 잘 모르겠지만, 가만 보니 이 모임은 아나스타샤가 주도한 것 같았다.
각자 공부나 연습을 어떻게 해 줄 순 없었다. 왜냐하면 두 콩쿠르는 요구하는 곡들이 완전히 달랐고, 준비 역시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자 학교에서 만족할 만큼 시간을 보낸 뒤에 연주자들로서 피로를 해소하는 건 함께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터디 룸에도 타티아나를 내보낸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발렌티나는 이런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나스타샤의 뒤를 따랐다.
“우리 저번에 갔었던 곳, 거기 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좁은 연습실에서 혼자 피아노와 혈투를 벌이며 고독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우울한 감정 등은 친구들과 어울려 걷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 사라졌다.
***
일주일 동안 발렌티나가 소화해 낸 일과는 그야말로 지옥처럼 빡빡했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방과후엔 친구들과 30분 남짓이나마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발렌티나가 꿋꿋하게 버티면서 해낼 수 있었던 것엔 그 힘이 굉장히 컸다.
그리고 오늘 이후론 조금 더 할 일이 단순해진다. 피아노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과목을 3점 이상으로 통과해야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 해. 무조건.’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렌티나는 사전 공지된 시험장으로 향했다.
공부는 충분히 열심히 해 놨다. 시험도 그리 복잡하지 않게, 교과서만 제대로 봤으면 답을 쓸 수 있도록 낸다고 했으니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진짜로 실수하면 안 된다. 콩쿠르 무대에 서는 것만큼이나 긴장이 된다.
시험장 앞에 서니 안에서 무언가 말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가 미리 와 있는 건가 싶어서 발렌티나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건 전혀 예상외의 사람이었다.
“왔어?”
“……너는 왜 여기에 있어?”
시험장 한가운데에 앉아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건 바르바라가 아니라 에르네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