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화
당황한 발렌티나는 바로 자리를 찾아 앉지도 못하고 멍하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선생님들을 보고 나서야 에르네스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왜 이 애가 여기에 있지?’
제발 설명 좀 해 보란 눈빛으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태연하게 답했다.
“나도 시험 치거든.”
지금 이 시험장은 10학년 2학기의 교과 과정을 미리 앞당겨 시험을 치르는 자리였다.
콩쿠르 등으로 전공에 집중해야 하거나 학교를 떠나야 하는 일이 없는 한 이런 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허가해 주지도 않고.
분명 에르네스트도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대답을 듣고 나서도 혼란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발렌티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시험? 너도 수업 면제 받으려고?”
“어.”
“왜?”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올 것 같거든.”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르네스트는 예전부터 바쁜 사람이었다. 해외 연주회나 콩쿠르 등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일은 빈번했다.
그는 이번에도 비슷한 이유라 설명하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은, 지금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란 점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작곡 콩쿠르 참가였지만 발렌티나는 찾아보지 않고 조만간 열릴 작곡 콩쿠르를 모두 알진 못했다.
아마 그중 조건이 괜찮은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축하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입 밖으로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지?’
에르네스트가 작곡 콩쿠르에 나간다는 것도 의외고, 그걸 불안하게 보는 자신의 마음은 더더욱 의외였다.
발렌티나는 약간의 어지럼을 느끼면서도 간신히 생각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해가 안 가. 지금……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야기 없었잖아?”
“시험 치기로 결정한 지 며칠 안 되었어.”
“그럼 그 후에는?”
“딱히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이렇게 밉살스럽게 이야기한다면 발렌티나도 예쁘게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목소리에 예리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공부는 어디서 한 건데? 너 스터디 룸에도 잘 안 왔었잖아?”
“학교에선 작곡만 주로 하고…… 공부는 집에서 했지. 그런 게 중요한 건가?”
“당연히 중요하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만 발렌티나는 앞에 있는 선생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는 걸 보고는 얼른 죄송하다고 말했다.
선생님들은 딱히 이쪽 이야기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발렌티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자세히 이야기 좀 해 봐.”
“지금은 장소가 별로 안 좋으니까…… 나중에.”
확실히 길게 이야기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다.
어차피 시험도 쳐야 하니 대충 마무리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려는 찰나, 에르네스트가 덧붙였다.
“일단 다른 애들한텐 이야기하지 마. 내가 나중에 이야기할 테니까.”
순간적으로 발렌티나는 발끈했다. 다른 애들이라곤 하지만 그게 누군진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왜 지금 에르네스트를 순수하게 축하해 주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타티아나가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심지어 늦게 들으면?
“싫은데? 할 거야!”
“……발렌티나.”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내가 안 해야 해?”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이자 에르네스트는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 이야기하자.”
이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면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발렌티나도 자기 책상 위로 축 늘어졌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시험 범위를 요약해 놓은 노트라도 봐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외워 두었던 것들도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져 버린 것 같다.
이게 다 에르네스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탓한다 한들 나아지는 건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시험까지 망치면 최악이라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서둘러 노트들을 꺼냈다.
그렇게 5분 남짓,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시험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 멤버인 바르바라가 도착했다.
바르바라 역시 시험장에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곤 깜짝 놀랐다.
“어라? 에르네스트.”
“안녕, 바르바라.”
“넌 왜…… 너도 시험 쳐?”
“그렇게 됐네.”
하지만 곧장 따지듯 물었던 발렌티나와 달리 바르바라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작곡 콩쿠르라도 나가?”
“어, 뭐 그렇지.”
에르네스트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반응이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팔을 다치고 작곡 콩쿠르에 나가는 친구와 그 친구를 응원해 주는 것.
그러나 발렌티나는 또 다른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전혀 그렇게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 왔나요? 그럼 바로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딱 세 명만 치르는 간이 시험이다 보니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선생님들은 바로 첫 과목의 시험지를 나눠 주었고, 발렌티나는 모든 생각들을 일단 미뤄 두고는 시험에 집중했다.
***
다행히 시험은 미리 예고한 수준 정도로만 나와 주었다.
3시간 정도 걸쳐서 여덟 과목이나 시험을 치자니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문제는 틀리지 않게 잘 풀었단 확신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채점을 하는 사이 발렌티나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복도로 나와 기다렸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에르네스트는 말을 걸 타이밍을 재는지 살짝 눈치를 보더니 가볍게 물어보았다.
“시험은 어땠어? 발렌티나.”
“…….”
잘 봤다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지만 발렌티나는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시험 중간에 있던 쉬는 시간에도 계속 그녀는 같은 태도였다.
에르네스트가 난색을 표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화날 짓을 했나?”
“아니, 솔직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왜 그래?”
발렌티나는 힐긋 옆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저 애가 듣고 있는데 신중하지 못하게 민감한 이야기들을 할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당장 물을 수 있는 것들의 대답만 일단 얻어내기로 했다.
“언제부터 학교에 안 나오는 건데?”
“글쎄…… 너랑 비슷해. 4월 초중반.”
“너도 설마 쇼팽 콩쿠르로 가니?”
“하하하, 이 팔로?”
“……미안해.”
시기가 너무 절묘해서 물어본 건데. 에르네스트는 농담조로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발렌티나가 말실수를 깨닫고 머뭇거리자 그럴 것도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교육 같은 걸 받고 싶어서. 프랑스에서도 오라고 하고…… 잠깐 갔다 오려고 해. 두어 달 정도.”
“두어 달이나……?”
“응.”
“하필 이 시기에?”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옆에 있던 바르바라도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하필이라니?”
“그야…….”
지금 이 자리에서 타티아나의 이름을 꺼내 봤자 정말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가장 큰 동요를 겪을 건 그녀밖에 없었다.
얼마 전 타티아나가 생일 파티에서 어떤 선물에 가장 기뻐했는지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에르네스트가 작곡 콩쿠르 같은 곳에 곡을 내서 상을 타 오는 것보다 자신에게 곡을 헌정해 주는 것을 더 기뻐할 터였다.
에르네스트도 어렴풋이나마 그걸 안다면 지금 이 시기에 어디론가 떠나는 것보단 옆에 있어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야만 했다.
이것도 매우 불순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느낌이 들었지만 적어도 발렌티나가 느끼는 진실은 그러했다.
“그야…….”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당분간 떠나 있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발렌티나가 느끼는 불편함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아나스타샤가 어떤 감정으로 친구란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고 똑바로 마주하려는 각오도 보이고 있었고. 발렌티나가 감동한 건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성숙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렇다면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결말을 맺으려는 이 순간은 제대로 봐 주어야 했다.
타티아나와 함께 콩쿠르에 나간다는 걸 정말 아무 다른 이유 없이 콩쿠르에서 1위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나스타샤를 완전히 잘못 보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정도 의미는 알고 이번 콩쿠르를 바라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에르네스트는 별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
발렌티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에 머금었다. 무척이나 힘겨웠다.
그녀는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의 대변인도 아니었고, 에르네스트에게 작곡 콩쿠르는 다음에 나가면 안 되냐고 할 자격도 없었다.
지금 하는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혼자만의 어떠한 만족 등을 위한 이기심이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자면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럴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
발렌티나는 친구로서 그걸 지지해 줘야만 한다. 그런데 자꾸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만 맴도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있잖아.”
어색한 분위기를 살짝 상쇄하려는 듯 바르바라가 슬쩍 끼어들더니 말을 붙였다.
평소 장난기 많은 성격과 대비되는 진지한 어조의 속내였다.
“에르네스트, 난 널 존경해. 그런 부상을 입고도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바르바라.”
“친구면 존경하면 안 돼?”
“되긴 하지. 음…… 아마도.”
친구 사이에 존경이란 단어는 굉장히 낯간지럽고 불필요한 단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간단하게 바르바라의 말에 수긍했다. 마치 자신도 존경하는 친구가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바르바라는 말이 통해 기쁘다는 듯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창가 너머 어디론가로 뻗으며 말했다.
“어쨌든 기왕에 하는 거라면 잘했으면 좋겠어.”
“고마워. 나도 네가 쇼팽 콩쿠르에서 잘하길 바랄게.”
“응.”
따뜻한 이야기들이 오간 덕분에 분위기도 조금 나아졌다. 이쯤하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는지 바르바라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잠깐 물 좀 마시고 올게.”
정말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잠시 두 사람만 이야기할 시간을 내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바르바라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발렌티나는 그 끝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바르바라는 좋은 애지.”
“그래.”
“난 더 좋은 애니까 한마디 할게.”
발렌티나는 스스로 나쁜 애라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마음은 모두가 크게 실망하거나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친구들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음을 안다. 거기에 희망을 걸고 발렌티나는 말했다.
“일단 이건 타티아나랑 아나스타샤에게도 이야기할 거야.”
“……내가 나중에 이야기한다고 했잖아.”
“그 나중이 언젠데? 어차피 그 애들도 아침에만 마주하니까 네 이야기를 듣는 건 늦어질 테고, 넌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겠지. 그럼 그때 가서 뭐라고 말하려고? 난 뭐라고 하고?”
에르네스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보면 4월에 작곡 콩쿠르를 위해 떠난다는 것도 끝까지 이야기 안 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가 되어서 당혹스러워하는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긴 싫었다. 어차피 말할 거라면 지금 하는 게 낫다.
어차피 다시 설득하긴 어렵다는 걸 깨달았는지 에르네스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발렌티나는 뜨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으려 애썼다.
에르네스트는 그 표정만큼이나 차갑게 이야기했다.
“네가 이야기할 건 없어.”
“없긴 왜 없어? 오늘 같이 시험을 쳤는데. 나한테 거짓말을 더 하라는 거야?”
“…….”
“넌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까 그냥 바보 같지?”
아무리 에르네스트가 무섭게 말한다 하더라도 발렌티나는 기죽지 않고 받아쳤다.
그를 좋아하고, 다른 아이들을 좋아하는 만큼 지금 할 말은 해야 할 때였다.
“난 손해만 보는 역할은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이건 손해도 보고 후회도 할 게 분명하니까 더더욱.”
말없이 듣던 에르네스트의 눈에 얼핏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작년에 함께 모여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갈라 쇼를 보고 나서 둘이서 잠깐 나누었던 이야기를 에르네스트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그 때 그는 분명 후회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발렌티나는 그 약속을 믿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입을 연 건 에르네스트 쪽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어? 발렌티나.”
그 말은 지금까지 발렌티나가 역정을 낸 모든 이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바로 인정할 순 없었다.
적어도 이성적으론 에르네스트가 무엇이든 활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타티아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말하겠지. 그 애는 쓸데없이 강한 면모가 있으니까.
때문에 지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발렌티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