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1화
지금 열심히 콩쿠르 무대에 설 준비를 하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옆에 에르네스트도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 승부의 과정에서 분명히 에르네스트의 존재는 크게 작용할 테니까.
하지만 그걸 전부 이야기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발렌티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어휘력과 논리력의 수준에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까 시험 문제 답안은 어떻게 적어 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에르네스트는 화를 내거나 어이없어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발렌티나는 그가 작곡 콩쿠르에 나가는 것을 축하해 주진 못할망정 나가지 말라고 한 것인데도, 그걸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막상 이런 반응이 돌아오니 발렌티나가 더욱 당황스러웠다.
“저기…….”
“그래, 네가 무슨 생각인진 알겠어.”
“……오해하는 것 같아. 난 네가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이번에 잡은 기회도 분명 놓칠 수 없는 거겠지?”
“오해하는 건 아니야. 난 네 말도 옳다고 보거든.”
깜짝 놀란 발렌티나는 피하던 시선을 바로 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장난치고 있지 않았다.
“사실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게 옳은지 나 스스로도 별로 확신이 없어.”
“……뭐?”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매사 자신만만하고 계획이 철저한 사람이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다른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꺾이지 않는다.
그 강인함은 곧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카리스마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정말 처음 보는 일이었다.
발렌티나는 문득 타티아나가 왜 가끔 불안하게 움찔거리는 일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입고 나서 정신적으로도 약해졌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왕 작곡을 시작했으니 정점을 노려보겠단 대답이 돌아왔다면 이렇게까지 무섭진 않았을 것 같다.
발렌티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별로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너희들이 모두 무언가 하고 있는데, 나도 하는 게 있어야지.”
언뜻 듣기엔 굉장히 수동적인 이유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목소리엔 분명히 자신의 의지로 행해 나가는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정말로 원하지 않았다면 두 달이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 콩쿠르에 참가할 순 없었을 것이다.
발렌티나는 의지 없는 작곡가가 그런 곳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정황을 이리저리 따져 본다면 결국 에르네스트도 생각이 있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고 볼 수 있었다.
약간은 의문도 풀리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발렌티나는 걱정스러웠다.
“그런 동기를 가질 필요는 없어, 에르네스트.”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순한 이유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야 그렇겠지.’
발렌티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기대었다.
갑자기 시험을 친 데다가 타티아나에겐 일단 알리지 말란 말을 듣고는 발끈해서 따지듯 묻고 말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는 건 정말 크게 실수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약간 곤란해하던 에르네스트도 복도 저편을 보며 말했다.
“바르바라 오네.”
그녀가 오면 이젠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발렌티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아나스타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것도 발렌티나는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말도 날카롭고 차가운 태도가 있어서 늘 투덕거리기 일쑤였지만, 그녀는 항상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곤 했다.
이번 콩쿠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턱대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대체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인지 발렌티나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알 게 뭐냐며 시선을 돌려 외면해 버리는 건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그럴 생각이라면 발렌티나는 좋아했었던 친구라 하더라도 당장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자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발렌티나를 내려다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생각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어.”
“그래?”
“이번에 자리를 비우는 건 그 애 때문이기도 해.”
이야기를 들어도 정말 이해가 잘 안 간다. 정말로 아나스타샤를 의식하고 있다면 누구보다 콩쿠르에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복잡할 에르네스트의 생각을 다 이야기해 달라 할 수도 없었다. 당장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발렌티나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친구들이 후회하지 않길 기원할 뿐이었다.
“아무튼…… 알았어. 그리고 어떻게 할 건진 내일 바로 네가 이야기해 줘. 그건 미루면 안 돼, 에르네스트.”
“……알겠어.”
마지막으로 부탁하자 에르네스트는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바르바라는 조금 누그러진 상황을 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험장 안에서 들어오란 말이 들리자 누구보다 앞장서며 말했다.
“자, 그럼 점수 받으러 가 볼까? 얘들아.”
발렌티나는 방금 했던 이야기들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일단 지금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등교하자마자 뭔가 반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난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의 시험 결과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다.
어제 오후에 이미 난 발렌티나에게 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이미 잔뜩 축하해 준 바 있었다.
이제부턴 피아노 연습에 더더욱 매진할 일만 남았다면서 발렌티나는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쉬기도 했지만 아무튼 시간을 제대로 벌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발렌티나, 바르바라…….”
그렇게 쇼팽 콩쿠르 참가자 두 명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전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였다.
난 그 사이에 에르네스트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
에르네스트는 요즘 어디서 무얼 하는지 신출귀몰했다.
분명 오전엔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 같은데, 오후엔 잠깐 사라졌다가 스터디 룸에 나타나는가 싶으면 곧 내 연습실에 찾아와서 주스 등을 던져 주곤 다시 나가 버린다.
왜 자꾸 잘해 주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을 정도로 정말 바빠 보였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그 준비가 비로소 결실을 맺을 단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다가가자 안드레이가 마침 잘 왔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왔구나. 늦었네?”
“좋은 아침이에요, 안드레이. 그러게요. 차가 조금 막혀서…… 그나저나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는 잘되었죠?”
“그렇지. 그런데 혹시 미리 들었어? 에르네스트도 작곡으로 다음 달부터 바빠진다는 거. 그래서 같이 시험 쳐 버렸다는데?”
“예?”
그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깜짝 놀란 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시험까지 쳤다고? 그럼 학교를 오래 쉬겠단 뜻이나 다름없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당황한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안드레이가 설명했다.
“해외의 작곡 콩쿠르에 참가하나 봐.”
난 빠르게 기억하고 있는 모든 작곡 콩쿠르들을 떠올렸다.
내 전공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 에르네스트를 위해 올해의 작곡 콩쿠르 일정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덕분에 최근 몇 달 사이에 있는 것이라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중 유력한 것 하나를 집어 물었다.
“작곡 콩쿠르…… 혹시 이탈리아로 가시나요?”
“그렇게 멀리 가진 않아. 그냥 괜찮은 기회를 얻어서 그래. 경선도 하고, 교육도 받고.”
에르네스트의 말을 들어 보니 무언가 복합적으로 하는 것 같다.
대체 뭘 준비했기에 해외로 가려는 것인지 관심이 생긴다. 그리고 조금은 걱정된다.
아마 오랫동안 학교에 오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그사이 보지 못한단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난 당연한 듯이 그가 곁에 있어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잠깐 이야기할까?”
이미 다른 친구들과는 충분히 이야기했는지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창가 쪽으로 앉았다. 난 그 앞자리에 앉아선 비스듬하게 의자를 틀고 마주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늦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그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해외로 나가신다면…… 일정은요? 언제부터 가시나요?”
“다음 달 중순.”
“그 시기면…….”
정확하게 쇼팽 콩쿠르와 겹친다. 나도 모르게 발렌티나와 같이 무언가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발렌티나랑은 관계없어.”
내 음악엔 요즘 아예 제대로 의견도 안 내 주면서, 설마 그녀를 코칭이라도 해 주는 건가 했는데……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설마 하는 의심을 날려 주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저 애는 2주 남짓 하고 끝나잖아. 난 두 달이 걸릴 예정이야.”
4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쇼팽 콩쿠르의 예선 라운드는 150여 명의 참가자들을 모두 무대에 올려야 하기에 2주 사이 딱 한 번만 무대에 오르면 된다.
발렌티나는 금방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
에르네스트의 일정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두 달……. 그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도 끝났겠네요.”
“그렇겠지.”
“…….”
나보다 먼저 가서 늦게 끝난다면 일단 에르네스트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기대는 전부 무의미했다.
난 남은 미련을 털어 버렸다. 약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뇌리에 이런 생각이 들긴 했다.
굳이 지금 해야만 하는 걸까?
내가 알기론 올해 하반기에 열리는 국제 작곡 콩쿠르가 정말 많다.
그럼 아예 그쪽을 노려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다른 일정의 콩쿠르를 택했다면 내 일정과 겹치지 않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무척이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어서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날 보면서 에르네스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미안해.”
“왜 사과를 하시나요? 에르네스트도 축하를 받으실 일이잖아요? 좋은 결과 내셨으면 해요.”
나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에게 미안했다.
분명 작곡가로서 에르네스트가 활동하는 건 기쁘지만…… 지금은 마음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잘 이야기했더니 에르네스트는 그건 고맙다는 듯 웃으면서도 끝까지 사과했다.
“음…… 그건 그런데,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
이런 면도 참 아리송하다. 내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항상 좀 독단적인 면이 있지?”
그가 고집이 꽤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게 독단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인진 모르겠다.
특히 요즘 들어 에르네스트는 정말 어른스러운 모습도 많이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독단적이라뇨.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난 여전히 멋대로야. 그건 어쩔 수 없나 봐.”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덜컥 불안해진다. 분명 좋은 일이고 괜찮을 거라 확신하지만, 왜 이렇게 걱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먼저 해외에 가시더라도 전화는 해 주세요. 궁금하니까.”
“음, 그것도 미안해.”
“……예?”
“아마 전화 안 될 거야. 거기가 상당히 시골이거든.”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럼 다음 달부턴 아예 볼 수도 없고 연락도 안 된다고? 내가 콩쿠르를 끝낼 때까지?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아무리 시골이어도…… 어지간해선 되지 않나요?”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
내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고 에르네스트가 작곡 콩쿠르에 나간다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연락도 할 수 없다는 건 날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대체 어디냐고 묻고 따라가 보고 싶다. 정 안 된다면 사람을 붙여서라도.
하지만 그건 정상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각자 앞에 주어진 일들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중요하겠지.
“…….”
그런데도 난 지금 분명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감정이 굉장히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