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2화
3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날씨는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따스해지지만, 내 일과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하루에 10시간도 넘는다. 덕분에 연습 계획은 만족스럽게 진행 중이었다.
온종일 연습해서 만든 음악은 미하일 선생님에게 매일같이 보여 드리고 레슨을 받는다.
선생님은 내게 크게 터치하진 않으시지만 가끔 방심할 때면 굉장히 날카로운 지적을 한 번씩 해 오신다.
덕분에 난 지도 선생님과 단란한 레슨을 하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심사 위원 앞에서 실전을 계속 치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규모로 계속 축적되는 경험은 내 안에서 점점 확신을 이루었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재의 갑각처럼 매끈하고 단단했다.
언젠가 탈피를 시도해야 할 테지만 지금의 난 이러한 음악을 내 것으로 꽉 쥐었다는 것에 굉장한 고양감을 느꼈다.
“…….”
친구들이 준비하는 음악들 역시 눈부셨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장기인 테크니컬한 곡에다 섬세한 음악성까지 더해서 정말 흠잡을 곳이 없는 연주자로 연이어 거듭났고, 발렌티나 역시 쇼팽에 대해 더더욱 깊게 파고들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정갈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서로의 성장을 볼 때마다 우린 자극을 받아서 더 진지하게 피아노에 몰두했고, 앞다투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교류하고 있는 건 음악뿐만이 아니다.
콩쿠르엔 여러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우린 서로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델리나에게 부탁한 드레스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다른 건 거의 아무것도 없네.’
내 일과는 오로지 콩쿠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나누는 이야기 또한 모두 음악에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딱 한순간, 그 음악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못 할 때가 있었다.
“…….”
아직도 에르네스트는 하루에 한 번 정도 연습실 문을 두드린다.
음료수나 과자 등이 있다며 가지고 와선 앉아서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가 간다.
그 주제는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뜬금없었다.
솔직히 말해 난 쿠키 원산지가 어딘지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것보단 음악가들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나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해석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게 하고 싶다.
심지어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시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받아 주지 않았다.
‘저번처럼 해 봐도…….’
다짜고짜 붙잡아 놓고 반응을 안 하곤 도저히 못 배길 곡을 연주한다면 어떻게든 그의 반응을 끌어낼 자신은 있었다.
문제는 그래 봤자 그건 장난일 뿐이지 내 진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음악이 될 뿐이고, 에르네스트 역시 고집이 세서 내가 대놓고 도발하면 정말로 이를 악물고 모르는 체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 성격을 다시금 확신한 것이 바로 얼마 전, 시험을 치고 두 달 동안 작곡 콩쿠르에 갈 생각이라 했을 때였다.
정말 아침에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까맣게 몰랐다.
물론 그는 자신의 결정을 시시콜콜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런 결정을 할 줄은 몰랐다.
솔직한 말로 약간 삐쳤다.
‘너무하잖아.’
모든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멋대로 한 거 아니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래 놓고선 다음 날에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태연하게 찾아와 인터넷에서 찾은 재미있는 영상을 보라며 보여 주는데…… 난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요 며칠은 에르네스트를 차갑게 대했다.
쓸데없는 이야기엔 별로 관심 없다는 티도 내 보고, 대놓고 시큰둥하게 연습할 시간이라고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와 이 중요한 시기에 여러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아.”
하지만 살짝 언짢은 마음으로 자존심을 지켜 가면서 말도 행동도 빙빙 돌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한계가 찾아왔다.
연습 계획에 맞춰 다음 곡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기 전 내가 먼저 하던 대로 연습을 시작했을 때였다.
꼭 누군가 청중이 있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서 옆 연습실을 두드려 볼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에르네스트가 딱 맞춰서 내 연습실로 찾아왔다.
난 그에게 넌지시 음악 이야기를 꺼냈다가 말 돌리기를 당하고는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에르네스트.”
“응.”
“바쁘지 않으신가요?”
정말 오래 참았다. 난 항상 길게 생각하고 되도록 인내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말을 해야 할 땐 제대로 말하려고 노력하는 타입니다. 지금 노력해야 될 때가 왔음을 느낀다.
에르네스트는 내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되물었다.
“……응?”
“자꾸 이렇게 안 오셔도 괜찮아요. 저도 수분 보충 정도는 알아서 하고 있고……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에르네스트도.”
이 정도면 확실하게 말한 것이겠지. 난 거기에 덧붙였다.
“준비하고 계시는 게 있으니.”
말하는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 마음도 편치 않다. 그가 오는 게 싫은 것도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난 하루의 시간을 그에게 투자할 생각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콩쿠르를 앞둔 내 기분이나 생각을 그 역시 분명히 잘 알 텐데,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일 뿐이다.
내가 대놓고 거부하자 에르네스트는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 준비는 준비대로 하는 거고…… 잠깐 숨도 돌릴 겸 중요한 연습 중인 네 상태는 어떤가 보고 싶기도 해서.”
중요한 연습 중이란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내 신경은 조금 더 곤두섰다. 역시 그는 제대로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제 상태는 어떻게 보이시나요?”
“계속 좋던데?”
“틀렸어요.”
이젠 음악의 문제가 아니다.
똑바로 쳐다보면서 딱 잘라 이야기하자 에르네스트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틀렸다는 게 무슨 말인데?”
“에르네스트, 냄비의 물을 팔팔 끓이려고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시나요?”
“?”
“뚜껑을 닫아 놓으면 되어요.”
에르네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듯 보였다.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냥 직설적인 반말로 이야기하는 게 빨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르네스트 앞에서 언행을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여전히 공고히 남아 있었다.
저번에 나도 모르게 한 번 터졌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리할 순 없다. 에르네스트는 편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 같지만…….
설마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가 자기 흥미를 위해 날 자극하고 있는 건 아니라 믿는다.
“작곡 콩쿠르에 나가신다는 것…… 좋아요. 진심이에요.”
“고마워.”
“작곡을 시작하신 지 불과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좋은 기회를 잡으신 것 같아서 정말 기뻐요. 전파도 닿지 않는 숨겨진 곳에서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 분들이 모일지…… 전 상상도 하기 어렵네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에르네스트도 그걸 들어 주니 들끓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다.
난 되도록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려 애쓰며 그에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 저랑 더 많이 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전 그런데.”
“음악에 대한 거?”
“당연하지 않나요?”
지금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내가 바로 답하자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오른손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나도 하고 싶지. 하지만 우린 각자 다른 걸 준비 중이잖아.”
“그곳에 가지고 가실 곡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제 나름대로의 해석과 의견을 드릴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것도 제겐 충분히 공부가 되고요.”
“…….”
“왜 모르는 척하시나요?”
예전에도 우린 몇 번이나 그렇게 음악을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실력이 향상됨을 느낀 적이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잘해 왔고, 지금은 그야말로 적기였다.
우린 같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음악가로서 추구하는 방향은 같았으니까. 지금 각자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도 충분히 더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약간 따지듯 묻자 에르네스트는 수긍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야. 잘 알아.”
“그럼 잘 아시면서 왜?”
“네 해석과 의견을 들으면 그게 내 음악에 영향을 끼칠 거거든. 아주 강력하게.”
약간 당황한 내가 그를 보다가 바로 떠올린 반문은 하나뿐이었다.
‘끼치면 안 되나요?’
솔직히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뭘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제 와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보자 에르네스트는 말을 듣지 않아도 내 생각을 알겠다는 듯 웃었다.
“콩쿠르니까 자기 음악을 써야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공허로부터 음악을 끌어낼 텐가?
우린 결국 한 흐름 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선배 음악가들의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금 있는 동료 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거대한 흐름의 물결 하나를 그릴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도 동시에 공통 의식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이유 아니었던가?
그런 지당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그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려 하고 있었다.
달리 날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한동안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같이 힘내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게 훨씬 합리적이에요.”
“역시 현실적이네, 타티아나.”
“당연한 거예요. 어떠한 영향도 받기 싫다면 레퍼런스 음반을 듣는 것도 그만두고, 지금 받는 레슨 같은 것도 다 그만둬야죠.”
냉정하게 이야기하자 에르네스트는 시원하게 웃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그만두긴 했어.”
“……예?”
“정확히 말하면 구세프 선생님이랑 싸운 거지만.”
“무……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되물어도 에르네스트는 자기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선생님과 한바탕 한 모양이다. 심지어 레슨까지 못 받을 정도로.
방금 전까지 그에게 쌓여 있던 감정들을 지금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당장 걱정부터 든다.
“이 중요한 시기에 지도 선생님과 싸우셨다고요?”
“중요한 시기로 만든 게 내 독단이었거든.”
“선생님께서 작곡 콩쿠르 참가 자체를 반대하셨나요? 설마요.”
“반대하시더라고.”
이렇게 되니 상황이 아리송했다.
원래는 에르네스트를 살살 달래 볼 생각이었다. 사제 간이 틀어진 원인이 제자인 그에게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번엔 구세프 선생님이 고집을 꺾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이유야 분명 있겠지만, 그래도 콩쿠르 참가를 반대하신 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황한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에르네스트가 씩 웃었다.
“그런데 내가 선생님이 반대한다고 해서 안 하는 사람이던가?”
“……그건 자랑이 아니에요, 에르네스트.”
“그래, 너도 화난 것 같고.”
그는 독단적이란 단어로 자신을 평가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자신의 고집으로 만든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을 감수하고 무엇을 얻어 내려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난 지금 레슨도 없어. 혼자서 해.”
“…….”
“그런데 너랑도 사이가 안 좋아지면 진짜로 갈 데가 없어.”
이 애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아는 걸까.
상식적으로 보자면 지금 그와 구세프 선생님 사이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적당하다.
사과하고 대화를 나눠 보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같이 가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무의미할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음악가로서의 판단과 고집으로 지금 이 선택을 내리고 있었다.
그걸 그냥 흐지부지하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든 끝이 보여야 해결될 문제다.
난 더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결과를 내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상태로 괜찮으신가요? 정말로?”
“그건 걱정 마. 결과는 확실하게 낼 테니까.”
에르네스트는 이미 그런 건 다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가 얼마 전 스스로 독단적이라 말하며 내게 사과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만약 그가 결과에만 치중하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자 연습실의 정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너무 좁네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스스로의 결정하에 여러 가지 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 결정엔 딱히 후회도 미련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강인한 모습 때문에 미처 몰랐던 것을 오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소용없겠지. 나 역시 그가 가져올 결과를 보고 이야기할 뿐이다.
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는지 언뜻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반대로 그에게 제안했다.
“잠깐 나갈까요?”
에르네스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