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03화 (1,003/1,277)

##  1003화

여전히 에르네스트의 태도엔 의뭉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가 대체 음악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을 느꼈기에 나랑은 교류하지 않겠단 결정을 내렸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일방적이라서 섭섭하다.

하지만 내게 그 이상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그 나름대로 찾아낸 해답이고, 또 그의 자존심에 얽힌 문제라면 내게 상담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입장과 결정을 존중하고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때문에 난 짜증을 냈다가, 당황했다가, 또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받아 주게 되었다.

‘적어도 아예 피하려 하는 것보단 낫지…….’

한참 전부터 느낀 것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은근히 나를 피할 때가 많았다.

다 같이 있을 땐 함께하지만 잠깐 신경을 쓰지 않으면 휙 자리를 떠 버리기도 했다.

마치 자긴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라는 듯…….

언제부터인진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부상을 입은 직후라 생각한다.

그게 일종의 배려로 보였기 때문에 난 되레 더더욱 그 앞에서 우울하게 있을 수가 없이 밝은 모습만 보이게 되었다.

리처드나 다른 친구들이 그에게 그러는 것처럼 연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어떨 때나 자유롭게 감정을 연기할 수 있는 연주자였으니까.

그 연기가 비로소 효과를 본 걸까. 소치에 갔다 왔을 때쯤부터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날 만나러 오기도 하면서 짧은 데이트 정도는 버겁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음악에 관한 교류까지 해 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관계는 가까워졌어도 음악가로서 어쩐지 멀어진 기분이 들어서 영 마음에 걸렸었는데, 오늘 그나마 솔직한 심경을 듣고 나니 이해해 줄 마음이 든다.

도저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피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고.

단지, 언제까지나 그렇게 편히 둘 생각은 없다.

‘언젠가 꼭 내게 사과하면서 곡을 보여 주게 해 주겠어.’

에르네스트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또 날 믿지 못한 건 결국 우리 둘 다 미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날개를 편 지 2년도 안 된 작곡가로서, 그리고 난 처음으로 큰 콩쿠르를 준비하는 연주자로서.

그럼 증명하면 될 일이다.

만약 벨기에의 큰 무대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믿음을 준다면……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작곡 능력에 조금 더 확신을 얻는다면 보다 번뜩이는 무기를 각자 쥐고 우리는 그 무기들의 날카로움을 견주어 볼 수 있게 되겠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하던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만 할 일이니까.

단지 지금은 약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에게 맞춰 주기로 했으니까…….’

감정적인 부분들을 꾹 눌러 놓으면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난 전적으로 에르네스트를 존중하며 따르기로 결정했다.

일단 음악 이야기는 싫다고 했으니까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연습실 안에선 도저히 피아노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복도에서도 여기저기서 음악들이 울리고 있었다.

“저 안에 있으면 자꾸 피아노가 보이니까 밖으로 나가자고 했던 건데…… 그래도 음악 소리는 계속 들리네요.”

“뭐, 그렇지.”

음악학교에서 음악을 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당연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난 여기서 손을 흔들고 그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예 밖으로 나갈까요?”

“네 연습은?”

“저녁의 제가 더 열심히 하겠죠.”

책임감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농담이었지만 난 나름 진지했다.

남은 오후를 그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잠을 조금 줄이면 된다. 그 정도는 크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에 난 얼마든지 시간을 유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벌써 미래가 보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녁의 네가 날 원망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럴 일은 없어요. 만약 원망한다고 해도 제 스스로를 원망하겠죠.”

“그건 그것대로 문제잖아.”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죠.”

그건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었기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미 난 운명을 원망했다가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잠깐 놀아 버린 자신을 책임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프리하게 시간을 내주려 하는데도 에르네스트는 그렇게까진 필요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시간 많이 안 뺏을게. 잠깐 차만 한 잔 마시자. 나도 어차피 오후에 할 일도 있고 하니까…….”

“좋아요.”

우선 뭐든 간에 지금 이 시간을 이어 나가는 것이라면 좋았다.

오후에도 계속 연습실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예정이 틀어져도 즐거웠다.

음악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정해 놓고 나니 아예 그냥 다 내려놓고 생각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일단 나가 볼까요?”

에르네스트는 진짜로 별다른 계획 같은 건 없다는 듯 대충 이야기했다. 나도 어딜 가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도 나도 잠깐의 일탈이라 하더라도 긴 시간 동안 돌아다닐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 건물을 나와 정문으로 향할 때였다. 그 옆에 있는 주차장 쪽에서 빅토르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아가씨. 나가십니까?”

보통은 내가 움직이면 말없이 따라붙는 것이 그의 방침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말을 걸어 오니 괜히 뜨끔하게 된다.

빅토르의 선글라스 뒤 눈빛이 나와 에르네스트를 좌우로 훑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상할 건 없다. 잘못한 것도 없고. 연습을 빼먹고 놀러 나가려는 참이긴 하지만 휴식도 중요하다는 핑계 정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난 아무 문제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잠시. 에르네스트와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요.”

“왜 학교에서 하시지 않고?”

“그게…….”

그 예리한 질문엔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학교에서 그나마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연습실엔 피아노가 있어서 거슬린다고 했다간 빅토르가 바로 날 병원에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깜짝 놀랄 그를 생각하면 한 번 놀려 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타티아나가 연습을 많이 해서 지치기도 했고, 차 한잔하면서 쉬려고 합니다. 안 됩니까?”

“안 되긴요, 되죠.”

그 말에 난 살짝 놀랐다. 빅토르가 이렇게 쿨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혹시 그가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바로 내놓을 여러 가지 변명거리들을 떠올리고 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이미 몇 번이나 따로 만났었는데 이제 와 그가 예민할 거라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내가 혼자서 뜨끔했다가 변명을 궁리하던 모습이 전부 읽혔는지 빅토르는 피식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지금 밖에 두 분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카메라와 조명을 가지고 말이죠.”

그는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긴 모스크바 한복판이다. 그리고 난 예전과 달리 상당한 이슈를 몰고 있었다.

빅토르가 아무리 유능하다 하더라도 나와 에르네스트를 노리는 카메라를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걸 이해하고 나자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바르바라와 외출할 땐 빅토르가 날 이렇게 막아서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와 움직이자마자 바로 경고부터 날아든다.

뭐가 문제인진 알지만 솔직한 생각으론 조금 귀찮았다. 마음대로 하도록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니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나나 에르네스트에게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오빠에게도 여파가 갈지도 모른다.

왜 그게 그런 식으로 되느냐고 떼를 쓸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건 아버지가 느낄 귀찮음이 아니라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에르네스트에게 불합리함으로 바뀔지도 모른단 점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다가 문득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살짝 장난을 쳐서 저 평정심을 무너뜨려 볼까 싶기도 했지만, 빅토르 앞에서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일단 상황을 알겠다는 뜻으로 빅토르를 올려다보니 그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 차량으로 이동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럴게요. 그러면.”

“장소는 프라이빗 룸이 제공되는 곳으로 할까요.”

“예.”

그렇게 그냥 가까운 곳에 가려고 했던 계획은 차량을 타고 조금 더 멀리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시간적으로 손해를 더 보거나 하진 않는다. 단지 모스크바에선 둘이서 잠깐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 깨달았을 뿐.

누군가는 이런 걸 즐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리 즐거운 기분이 아니라서 살짝 시무룩해져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네 유명세가 요즘 정말 대단하더라, 타티아나.”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 마시라고 농담으로 넘겼을 텐데. 카메라를 피해 차량으로 움직이는 와중에 이런 말을 들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니야. 정확한 현실 판단이지.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겪고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다 겪어 봤었거든.”

멀거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던 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그밖에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어려서부터 주목받아 온 신동으로서의 커리어뿐만이 아니라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그 강인함도 흔치 않은 것이다.

내가 웃자 에르네스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음반을 낸 지 얼마나 지났지? 벌써 3개월 하고도 한참이나 지났잖아. 그런데 이대로면 아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까진 무난하게 스포트라이트가 널 비추고 있을 거야.”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5월 초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리고, 거기에 내가 참가한다는 것은 벌써 여러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몇 번이나 광고하듯 나온 바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내게 어마어마한 관심과 기대가 쏠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건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이만큼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평생에 걸쳐 쌓아 올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난 상당히 빠르게 얻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를 끌어올리면 감수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있다.

지금 이렇게 카메라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나, 심하게는 컨디션 자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까지.

과도한 기대는 당연히 거기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고 멘탈을 흔들어 놓는다.

난 애초에 불안에 흔들리다가도 피아노엔 잘 집중하고 긴장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나마 이렇게 무던하게 버틸 수 있지만, 약간만 멘털이 안 좋았더라면 아마 제멋대로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컨디션이 망가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내가 무엇을 감수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겪어 본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가 그럭저럭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거기서 우승이라도 하면 정말 난리 나겠는걸. 공항에서 크렘린까지 카 퍼레이드를 할지도 몰라.”

아예 농담조로 이런 말까지 건넬 정도인 걸 보면 나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에르네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참 어렵다.

자신이 나가지 못하게 된 콩쿠르에 참가하는 날 이렇게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그 시기에 전파도 닿지 않는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마음을 난 아직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결정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어떻게 생각할 줄 알고?

진짜로 내가 원망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에 내린 결정이겠지.

그만한 믿음을 받고 있다는 건 기쁘지만…… 반대로 내가 그를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었다. 그가 내린 결정과 이 응원이 훗날 우리 모두에게 좋게 돌아올 것이란걸.

“제가 우승하길 바라시는 거죠?”

“……당연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린데?”

“그럼 됐어요.”

황당해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숨죽여 웃었다.

“열심히 해 볼게요.”

아마 그건 그가 가장 기다리고 있었을 한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제일 중요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이윽고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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