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04화 (1,004/1,277)

##  1004화

완연하게 찾아온 봄기운은 연습실 안까지도 스며들었다.

난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는데도 이젠 난방을 켜 놓으면 더워서 도저히 연습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재킷까지 벗어 두고 조금 더 가볍게 건반을 짚었다. 물론 연습에 임하는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협주곡과 소나타류를 거쳐 이제 내가 집중하는 곡들은 에튀드까지 좁혀져 있었다.

이제 딱 한 달 정도 더 연습할 시간이 있다. 그 후엔 이 곡들을 가지고 그대로 무대 위에 올라야 한다.

‘솔직히 협주곡보단 쉬운 것 같지만.’

다른 악기들과의 호흡이 중요한 협주곡과 달리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곡들은 그나마 연습하고 결과를 내기가 조금 쉽다.

평소 자주 연주하는 프렐류드나 에튀드 등 짧은 곡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건반을 번갈아 때려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1초에 수십 개씩 쏟아지는 소리를 모두 귀로 듣고 미세한 차이를 느끼면서 스스로를 점검했다.

손의 속도 자체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

손가락 마디도 더욱 견고해졌고. 3년간 단련한 내 몸은 최근 들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었다.

슬슬 몸의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난 그 한계를 갱신해 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음반을 녹음했을 때의 수준을 또 넘어선 기분이 든다.

지금 이 고양감을 그대로 피아노에 과감하게 쏟아부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균형을 유지하면서 신경을 집중해 소리를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독주회가 아니라 콩쿠르니까…….’

만약 독주회라면 조금 더 과감해도 된다. 상황에 맞추어 청중들을 사로잡고 매혹할 방법은 수없이 많으니까.

콩쿠르에서 화려하게 눈에 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 감점을 받는다면 전부 무의미했다.

눈에 띄고 나서도 흠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심사 위원들의 높은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연주를 추구하려면 감정적인 부분을 조금 추스를 필요가 있다. 보다 정갈하고 세련되게.

내 감각은 훨씬 더 날카로워졌으며, 빨라진 속도의 여유분을 끌어와 음색의 컨트롤에 쏟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해졌다.

“…….”

다시 한 차례 연습을 마친 나는 손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근래 했던 연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대로거나 퇴보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한 달.

그 후엔 내 곡들이 어디에 가 있을까. 그 끝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

이렇게 피아노에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을 온전히 내 실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음에 기뻐하며 거의 모든 시간을 피아노에 쏟아붓고 있지만, 그래도 나도 인간인 이상 정말로 24시간을 전부 다 쓸 순 없었다.

잠도 자야 하고 식사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내 컨디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치열하게 임하는 연습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서 챙겨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정신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만나서 같이 연습하는 친구들과 이따금 시내로 나가는 것도 내겐 무척 중요한 시간이었다.

온종일 피아노에만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감각도 이상해지고, 연습 효율이 떨어진다.

가끔은 숨 돌릴 시간도 있어야 제대로 하루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후에 연습하다 보면 가끔 찾아오는 에르네스트도 내게 무척이나 중요했다. 내가 이 시간을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는 걸 이 애도 알까.

하지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모레네요 벌써.”

“그러게.”

홀짝이던 음료수를 내려놓고 말하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도 무덤덤하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제 4월 첫째 주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간.

슬슬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폴란드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보다 한발 빠르게 에르네스트가 먼저 떠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섭섭함을 많이 느꼈었다.

요즘 은근히 잘해 주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던 게 다 이것 때문이었던 건가 싶다가,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해선 일절 이야기하지 않으니 어이없기도 하고.

하지만 서로의 입장도 이해할 만큼 했고, 시간도 많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별다른 감정이 들진 않았다.

이틀 남은 지금 이 시점에 드는 생각은 그저 그가 먼 곳에서도 잘했으면 하는 바람과 많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뿐이다.

“꼼꼼하게 다 준비 하셨나요?”

“할 만큼 했어.”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요.”

“뭐 포트폴리오 같은 거?”

에르네스트는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사실 내가 이렇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는 한참 전부터 레슨도 전혀 받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세프 선생님과 싸우고 혼자 하기로 했단 말을 듣고 나서 난 선생님을 찾아가 넌지시 걱정된다고 전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은 내버려 두라며 단호하게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 후로는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시간만 흘러갔다.

때문에 이건 에르네스트 개인의 커리어를 위한 일정이기도 했지만, 구세프 선생님과의 대결이기도 했다.

독단으로 이렇게 행동했다가 결과가 신통찮으면 그건 곧 에르네스트가 틀렸다는 증명이 될 테니까.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는 이 대결에서 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겠지.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것 말고도 많잖아요? 두 달이나 계실 건데…… 그사이 옷이라든지, 드실 것도 챙기셔야 할 테고요.”

“밥은 주겠지 거기서.”

“전파도 안 닿는 시골이라면서요? 그곳엔 없을 향신료 같은 건 가지고 가셔야 할지도 몰라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우리 사이에 오가는 주제엔 콩쿠르도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난 그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묵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건 워낙 에르네스트가 강경하기 때문이었지, 걱정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떠나기 이틀 전인 지금에서야 난 살짝 물어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기도 했고.

에르네스트도 내 말을 듣더니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웃었다.

“그럼 겨자랑 마요네즈 정도는 가지고 갈까.”

이미 빵만 먹고 살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어쩐지 더 걱정된다.

하지만 내 표정을 본 에르네스트는 걱정 말라며 웃기만 했다.

설마 밥 굶고 잠 못 자겠냐는 특유의 도전적인 태도였다. 솔직히 그 말도 맞긴 해서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검사를 제대로 받고 가셨으면 해요…….”

“그건 상관없…… 아, 팔 때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이나 되는 일정 동안 시골에 있을 거라면 병원도 그리 좋지 못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치료야 할 수 있을 테고…… 정 안 되면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도 될 일이지만, 되도록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곳에서 철저하게 검사하여 혹시 모를 아주 작은 문제도 체크해 놓는 것이 현명했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내 걱정만큼이나 이미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었다.

“며칠 전에 갔다 왔었어.”

“아, 정말요?”

“지금처럼만 재활해 주면 두 달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던데.”

그 말을 들으니 안도감이 든다. 그래도 나중에 병원에 확인은 해 볼 거지만.

그동안 잘 묻지 않았던 것도 모처럼이니 물어보았다.

“재활은 어떠신가요?”

“일상생활 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어. 너도 보면 알잖아.”

그러면서 그는 마치 보란 듯이 왼 어깨부터 팔을 빙빙 돌리기까지 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괜찮아 보인다.

작년 말에 깁스를 풀고 본격적으로 재활을 시작했으니 이제 3개월 정도 지났다.

그사이 크게 다시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도 않았고, 에르네스트는 충실하게 재활 계획에 따라 주었으므로 예후가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이제 글씨도 쓸 수 있어. 나 원래 왼손으로 글씨 못 썼는데. 할 줄 아는 게 하나 늘었다니까?”

자랑이라도 하듯 그는 왼손을 허공에 저으며 말했다.

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 대신 왜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지 구태여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 건반도 만질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겠지.

그가 장난스레 까딱거리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손 이리 줘 보시겠어요.”

“?”

에르네스트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왼손으로 그의 손을 악수하듯 붙잡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젠 견딜 수 있었다.

맞잡은 손으로부터 그가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때문에 난 그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도록 말했다.

“쥐어 보세요.”

“뭔가 했더니……. 악력 테스트하려고?”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짐짓 겁이라도 주듯 목소리를 깔았다.

“아플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그러면 좋겠는데요.”

사실 손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무의식에 파고들어 있는 원초적인 공포가 여전히 내게 잔재해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가 그 정도로 힘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손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악력이 느껴진다.

재활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충분하게 전해져 온다. 그건 그가 지니고 있는 연주자로서의 갈망과 닿아 있었다.

조금만 더 세게 쥐면 정말로 아플 것 같았다. 그래도 난 아무 말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할 수 있다면 지금 내 역량을 그에게 조금이나마 나누어 주고 싶었기에.

그런데 그 압력이 통증이 되려고 하기 직전에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힘을 풀었다.

고개를 들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자, 이 정도면 알겠지? 악력도 꽤 돌아왔다는 거.”

“어차피 이렇게 쥐는 악력과 건반을 만질 때의 힘은 전혀 다른 거니까요. 상관없어요.”

“그럼 왜 하라고 한 건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재활을 충실하게 해서 많이 좋아졌다는 그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응원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물론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내 응원은 지금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에게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분명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을 살짝 돌려 그의 손을 받쳐 올리며 말했다.

“뭐라 해야 할까요……. 가서 잘하셨으면 해서요.”

“……너야말로 잘해야 하잖아.”

“이런 건 나눈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아요. 그렇지, 샬롯이 그랬어요. 피아노력을 전해 줄 수 있다고.”

“그게 뭐야? 수력, 풍력, 피아노력이야?”

“아하하하.”

갑자기 나온 말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네가 말해 놓고 네가 웃으면 곤란한데.”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후후, 전에 샬롯이 말했을 때 저도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요.”

“똑같은 생각이라니?”

“수력이나 풍력 같은 거냐고 하셨잖아요?”

엄밀히 따지자면 난 전력이나 화력을 생각하긴 했지만, 어쨌건 중요한 건 우리의 생각이 비슷한 곳에 닿았단 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구구절절 더 설명하지 않고 그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한 번 더 손을 힘 있게 쥐어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마 내 악력은 재활 중인 그보다도 약하겠지. 하지만 난 이것만으로도 전해 줄 수 있는 것이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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