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5화
샬롯 린스키는 레슨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 연습실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피아노 선생님들은 매우 엄격하고 열정적이다.
연습에 묘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기준으로 모자람이 있다면 우직하게 극복해 낼 수 있도록 가르친다.
당연히 거기엔 절대적으로 많은 연습량이 수반되어야 한다.
오늘도 2시간 내내 레슨실에서 시달리다가 산더미 같은 피드백을 받은 샬롯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피아노 앞에 앉아서도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소문으로 듣기론 레슨을 받다가 쓰러지는 학생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결코 과장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샬롯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해석에 따른 기호들이 잔뜩 쓰인 악보를 펼쳐 놓고 건반을 짚었다.
그리고 10초도 안 되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싸맸다.
“나 진짜 어떡해!!”
다른 애들은 어떻게 이런 과제 곡들을 다 소화해 내는 거지? 난 저번 학기에도 죽을 뻔했는데, 이러다간 진짜 진급도 못 하는 거 아니야?
선생님도 정말 너무하셨다. 과제 곡을 하나 받아 가까스로 좀 들을 만하게 칠 만하면 곧바로 다음 곡을 그 위에 얹어 주시고……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나마 샬롯은 초견이 빠른 편이기에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따라가는 중이었다.
스트레스가 넘쳐서 어딘가에 표출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으로만 치던 건반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고 싶었다. 마치 베토벤처럼.
“……베토벤 오빠가 그랬을 리가 없지.”
생각해 보니 그건 다혈질이었다는 베토벤에 대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망상일 뿐이지,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피아노를 베토벤이 그렇게 다뤘을 리가 없었다.
지금 샬롯 앞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굉장히 고가였다. 샬롯은 학교 기물을 마음대로 하고 싶을 정도로 이 학교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지옥 같은 공부량과 과제 곡이 샬롯을 괴롭히지만, 그만큼 치유가 되는 존재도 있기 마련이었다.
“…….”
샬롯은 살그머니 연습실을 빠져나와 옆옆 연습실을 기웃거렸다.
그곳은 한 달 전부터 타티아나의 전용 연습실이었다.
요 근래 타티아나 주위에 맴도는 이야기들은 샬롯에게 있어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3개월 치에 달하는 교과 진도를 일주일 만에 모조리 해치우곤 시험을 쳐서 만점을 받아 냈다든가, 매일 학교에 와서 연습을 하는데 연습하는 곡이 매번 바뀐다든가, 음반 수익이 천만 단위라든가.
이제 10학년인 타티아나가 해내는 일들은 하나하나가 다 엄두도 안 날 정도로 굉장했다.
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타티아나를 동경했던 샬롯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더 깨닫게 되었다.
이젠 샬롯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정말로 피아노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학교는 그 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장소였고.
‘오늘도 잠깐만…….’
물론 타티아나는 후배에게 그렇게 보이길 전혀 원하지 않지만, 샬롯이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되레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레슨에서 엉망진창으로 지적당하고 나서도 그냥 잠깐 타티아나와 대화하고 연습을 듣는 것만으로도 샬롯에겐 의욕과 용기가 솟아났다.
타티아나가 항상 샬롯을 응원하고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려 애쓰는 덕분이었다.
물론 적당히 자제할 줄은 알았다.
샬롯은 바쁜 타티아나의 시간을 길게 빼앗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정말 못 견디게 힘들 때만 가끔씩 타티아나를 찾아가 힘을 얻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
살짝 연습실 문에 귀를 기울여 보니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깐 쉬거나 연구를 하는 중인 것 같으니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오늘의 인사말을 떠올린 샬롯은 경쾌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배님, 연습 안 하시죠? 혹시 괜찮으시면…….”
“…….”
“죄송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한 샬롯은 급히 사과하고는 다시 쾅 하고 문을 닫고 돌아섰다.
어쩌자고 노크를 잊었지? 샬롯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보면 안 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은데.’
샬롯과 눈을 마주한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손을 잡고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한순간이었는데도 샬롯의 눈엔 그 모습이 너무나 경건하게 비춰졌다. 피아노의 신이 세례를 내린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그건 타티아나를 신처럼 느끼는 샬롯의 망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연습실 안의 광경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
예전에 타티아나와 이야기할 때 아예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교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아느냐고.
하지만 그때도 샬롯은 타티아나가 피아노 외엔 그리 관심이 없고, 소문에도 신경 쓰지 않는 꼿꼿한 사람이란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기에 그렇게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굉장히 엄격한 집안의 딸이기도 했으니 자유롭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게다가 타티아나는 심지어 자기처럼 살면 안 된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때 당시엔 그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운명에 얽힌 타티아나의 속내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연습실에서 만나면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저번에도 샬롯은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의 연습실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오늘도 그런 것이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럼 그때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냥 못 본 것으로 치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타티아나도 샬롯의 입이 무거운 건 잘 알 테니 별로 문제 삼진 않으리라.
그런 생각을 굳게 가지고 샬롯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복도를 돌아 나오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뒤돌아본 샬롯은 그 자리에 꼼짝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어딜 가시나요? 샬롯.”
설마 타티아나가 따라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당황한 기색도 아니다. 타티아나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한 얼굴로 샬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되레 당황한 샬롯은 허리가 뒤돈 상태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타티아나가 한 발을 내딛자마자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했다.
“으아아, 방해해서 죄송해요!”
“방해라뇨?”
“그, 저…… 어…….”
이 말을 꺼내도 되나. 금기시되는 말 아닐까.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현명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바보 같은 입은 멋대로 자기 희망 사항을 말하고 있었다.
“연습실 데이트?”
“하…….”
단정한 얼굴의 타티아나는 한숨을 내쉬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연습실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돼요.”
“……?”
“물론 휴식도 중요하니 연습실을 사용하는 시간 전부를 연습에 투자할 순 없겠지만, 되도록 연습에만 집중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지당한 말인데도 뭔가 이상하다.
먼저 샬롯은 자신의 러시아어 실력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지만, 타티아나의 잔잔한 목소리는 알아듣기에도 편하고 해석하기도 쉬웠다.
결국 말이 이상한 이유는 타티아나가 지금 대화의 초점을 억지로 자신에게서 떼어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 논리적인 모습과는 조금 다른 이면이다.
지금도 빈틈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지금 완전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샬롯이 아무리 타티아나를 경애한다 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 에르네스트 선배와 휴식 중이셨나요?”
“예?”
“같이 음악 연구하다가…… 뭐 그런 거죠?”
일단 같이 수습이라도 해 줘야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아서 그렇게 적당한 말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애초에 콩쿠르로 바쁠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할 만한 이야기는 그 정도가 제일 유력할 것 같았고.
그런데 타티아나는 묘하게 시무룩한 눈빛을 하곤 중얼거렸다.
“아뇨. 그건 아니고…….”
샬롯은 오늘 좀 많이 당황스럽다 생각하며 다시 정신을 바로 잡고 상황에 집중했다.
만약 타티아나가 단 1분 만이라도 에르네스트와 음악 이야기를 했다면 방금 샬롯이 보여 준 탈출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고지식하고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인 타티아나는 그조차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음악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한 모양이다.
이해가 안 간다. 우리 학교에서 실력으론 손에 꼽는 두 사람이 만나선 음악 이야기를 안 한다고? 그럼 연습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
진짜로 데이트를 해도 음악 이야기만 할 것 같은 두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하니 샬롯은 지금까지 자신이 뭔가 전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타티아나도 지금 뭔가 이야기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다.
‘애초에 절 따라 나와선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불편한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고 싶었는데…… 타티아나가 따라 나오는 바람에 뭔가 설명이 필요하게 되어 버렸다.
타티아나는 뒤늦게 후회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매듭을 짓겠다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저번에 샬롯이 했던 것 있잖아요. 피아노력을 나눠 달라고 하셨던 것.”
“……그랬죠?”
“그거였어요.”
진짜 세례였다고?
망상이었던 걸 타티아나가 진짜라고 말해 주었지만 당연히 샬롯은 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봐도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샬롯의 불신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타티아나가 처음으로 정색했다.
“정말이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 주시겠어요?”
“믿어요. 믿고 있어요.”
“하…… 따라오세요.”
타티아나는 불신자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겠다는 듯 말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샬롯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애 결국 잡아 왔어?”
잡아 오다니?
샬롯은 벌벌 떨었다.
평소 타티아나와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여기 있는 두 10학년 선배는 학교에서의 위상이 최고로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당할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편입한 지 1년도 안 된 샬롯에게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샬롯을 보지도 않고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제가 아까 무어라 했었죠?”
“뭘?”
“샬롯이 들어오기 직전에 말이에요.”
다른 말 말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라는 압력이 느껴진다.
그런데 꺼진 스마트폰을 까딱거리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잠깐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다는 투로 대충 이야기했다.
“왼손으로도 글씨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거?”
타티아나의 압력이 더더욱 거세졌다. 답답해하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뇨, 그거 말고요! 그다음에요.”
“그다음에 뭐라 했더라.”
“제가 손 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순간 에르네스트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빠르게 지나간 감정이라서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샬롯은 그 역시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에르네스트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니 일단 말조심하기 위해 타티아나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부러 모르쇠로 답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그 모르쇠가 바로 정답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빙빙 돌 필요 없다고 타티아나는 딱 잘라 말했고, 에르네스트도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고는 자연스럽게 맞춰 주었다.
“맞아. 그리고 어…… 피아노력이란 게 있다고 했었지. 아, 그거 저 애가 말했다고 했었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타티아나는 그제야 뒤편의 샬롯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보세요. 거짓말하지 않았죠?”
“맞네요…….”
이미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피아노의 신도 신경 쓰는 사람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겠구나.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에르네스트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왼팔을 까딱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전해 주고자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샬롯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