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6화
갑자기 들어온 후배 유학생은 눈치도 빠르고 행동도 빨랐다.
노크를 안 한 건 물론 실수였지만, 말을 하다 말고 바로 돌아 나가는 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에르네스트는 샬롯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조잘거리며 교내의 소문에 일조하는 데에 열정적이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
차피 앞으로 두 달 정도는 학교를 떠나 있을 계획이기도 하고, 그래서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타티아나가 일어서더니 휙 나가선 샬롯을 잡아 왔다.
‘뭐 하러 그랬는데…….’
오늘따라 타티아나는 평소와 달리 약간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도 이기지 않았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샬롯은 아직도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딱 봐도 지금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사이에 대한 모종의 확신을 느끼는 모습이다.
‘그걸 부정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하고 있는 건 죄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면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이나 다름없었지만 사실 세간에 무슨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지는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도 잘 알고 있다.
단지 둘 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이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결정하는 건 다른 그 누가 아니라 둘이어야만 할 테니까.
“…….”
물론 그렇게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아나스타샤나 루슬란은 에르네스트가 멋대로 헛소리를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눈치를 보면서도 호기심이 넘실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 샬롯에겐 미안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일단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아무튼 뭔가 효험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것 봐. 나 여기 팔 다쳤던 것 알지?”
“아, 네…… 알아요…….”
“그런데 좀 나아진 것 같아. 진짜로.”
그냥 한 말인데도 타티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돌아본다. 에르네스트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왼손을 움직였다.
확실히 팔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저릿하던 통증도 많이 줄어들었고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도 잘 된다.
꾸준히 한 재활의 결과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타티아나가 곁에 없었더라면 절대 이 정도 속도로 회복하지 못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샬롯의 피아노력 이론은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가 인정해 주자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샬롯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강하게 말했다.
“분명히 효과가 있어요. 제가 알아요.”
“…….”
그 말에선 믿음과 심지어 신앙마저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타티아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샬롯은 단순히 친해져서 타티아나의 주위를 맴돌거나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관계에 흥미를 가지고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입은 후로 부정적인 전망들이 얼마나 많이 뒤따라 다니는지도 잘 알고, 또 그런 그를 타티아나가 어떻게 케어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약간의 연민과 관심, 기도…… 그리고 선망 등을 느낀다.
‘너도 신자구나.’
농담 같은 것이 아니라 타티아나가 피아노와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무신론자가 신을 믿게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다루는 음악은 그야말로 모두를 한곳으로 이끈다. 그리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음악을 나누어 준다.
샬롯이 지금 그러는 것처럼 필요할 때마다 타티아나를 찾고, 양손을 맞잡고 그 힘을 빌리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티아나도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뻐하니까.
마치 어떠한 사명이라도 타고난 것처럼 타티아나는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손을 뻗는다.
바로 그 모습에서도 마치 피아노의 화신과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서도 이대론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음악을 잠시 떠나 있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에 발렌티나는 짜증을 냈고, 구세프는 분노했으며, 타티아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 결정이 지금 유일하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다.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눈빛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준비하는 것들은 사실 그리 의미가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아예 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 지독한 독단에 가까웠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걸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더 복잡한 마음이 들기 전에 에르네스트는 이만 일어나기로 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난 이제 슬슬 가 볼게.”
“아뇨! 제가 갈게요. 선배님들 말씀 나누세요.”
“우리 할 이야기는 다 했어.”
샬롯은 이번에도 자리를 피해 주려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막았다.
앞으로 한 달 정도 샬롯은 타티아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줄 터였다. 그러니 지금 또 쫓아내면 안 된다.
“그렇지? 타티아나.”
그래서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동의를 구하며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이런 얼굴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얼마 전, 에르네스트에게 따질 때도 타티아나는 자신을 끓는 물에 비유하면서 격조를 지켰다.
그녀는 인내심도 정말 강하고, 가끔 폭발했을 때도 잘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고집스러운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그녀도 평범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에르네스트가 웃기만 하자 짐짓 도전적으로 타티아나가 툭 내뱉었다.
“내일도 모레도 있으니까요.”
“뭐, 그렇기도 하고.”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타티아나의 기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후 떠나기로 결정한 건 에르네스트였지만, 이렇게 시간이 가까워지니 자기도 모르게 아쉽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후회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러 에르네스트는 보다 확실하게 샬롯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타티아나랑 놀아 줘. 연습 때문에 왔던 거 아니야?”
“맞아요.”
“타티아나도 그걸 기다리고 있어.”
이번에도 살짝 타티아나를 자극하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구냐는 눈빛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음…… 갈게.”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 더 있다간 무슨 말을 더 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스마트폰을 쥐고 바로 나가려는 에르네스를 뒤로하고 타티아나가 샬롯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연습을 좀 봐 드릴까요?”
“아뇨! 전 견학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거든요.”
“그런가요? 후후, 기쁘네요.”
정말로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음악을 교류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건 평소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저 애라도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미련 없이 발길을 옮기려 했다.
“그럼 한번 들어 주세요.”
“어, 지금요?”
그가 나간 뒤 문을 닫고 나서 연주를 시작해도 될 텐데, 타티아나는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건반을 짚었다.
당황하는 샬롯의 목소리가 미처 다 사라지기도 전에 피아노 소리가 연습실을 흔든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음악이 울리는 줄 알았다. 평소 상상해 왔던 그 음악의 이미지가 그대로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지금 타티아나가 연주 중인 것은 에르네스트가 그녀의 생일에 헌정했던 곡이었다.
이미 한 번 녹음으로 듣기도 했지만 스마트폰 스피커로 듣는 것과 이렇게 눈앞에서 듣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타티아나의 해석은 훨씬 더 깊고 또렷해져 있었다.
자리를 떠나려는 에르네스트에게 마치 이래도 그냥 갈 거냐고 항의하는 듯한 연주였다.
어차피 콩쿠르 무대에도 올리지 못할 곡을 왜 이렇게 열심히 연습했는지 모르겠다.
‘이러니까 나도 더 열심히 해야 하잖아.’
헌정 받은 곡은 작곡가가 낸 숙제이기도 하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결코 미룰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드는 이 기분을 몇 마디 말로나마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선 모든 것을 망치게 된다. 타티아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지금 시작한 일을 제대로 매듭지어야만 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오니 음악 소리는 곧 방음벽에 가로막혀서 작아졌다. 그럼에도 뚫고 나오는 진동은 그를 작곡가로서 뜨겁게 고양시켰다.
***
에르네스트는 일정대로 떠났다.
학교에 들르는 일 없이 바로 아침 비행기로 떠났기에 직전에 만나 인사할 수도 없었다. 짧은 메시지만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봐.]
약이 오를 정도로 짧은 메시지였다.
두 달이나 전화도 안 된다면서, 그럼 조금 길게 써 주면 어디 덧나나? 나도 메시지를 길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에르네스트는 정말 너무했다.
난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꺼 버리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실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하는 우리는 이렇게 한참이나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라지자마자 난 약간의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불식간에 미련이 떠오른다.
일정이 겹치지 않으면 좋지 않았을까.
에르네스트도 나와 조금 더 음악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주려고 했을 테고, 그럼 훨씬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후…….”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해 봐야 아무 의미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선생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자신이 독단으로 진행한 일정에 따라 해외로 떠났고, 그것을 준비하는 동안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의 결단을 꺾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정말…….’
샬롯을 옆에 두고 그에게 헌정 받은 곡을 연주했을 때도 그는 잠깐 듣는가 싶더니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갔다.
자신의 곡이니 관심이 없을 리가 없고, 심지어 즉흥 실황 연주인 데다가 옆에 청중까지 있었는데 그걸 작곡가가 끝까지 듣지 않고 나가다니.
인간이 그 정도 정신력을 갖추는 게 가능한 건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결국 난 그를 존중 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패배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다음엔 절대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당장 내 앞에 놓인 길을 완벽하게 다져 놓아야만 했다.
“다음은 내 차례인가……? 으…….”
물론 그보다 조금 빠르게 발렌티나의 순서가 오긴 한다.
바로 다음 주에 그녀는 폴란드로 떠나 쇼팽 콩쿠르의 예선을 치러야 했다. 생각만 해도 떨린다는 듯 그녀는 몸서리치며 말했다.
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준비 많이 하셨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이쯤 되니까 차라리 빨리 해 버렸으면 하는 기분 드는 거 있지? 알아?”
“알죠. 후후.”
그냥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잘 끝난 세상에 툭 떨어졌으면 하는 기분은 나도 안다.
단지 직접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뿐이지.
그렇게 난 불안해하는 발렌티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습실로 향했다. 우리가 지금 가야 할 곳은 그곳뿐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