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07화 (1,007/1,277)

##  1007화

에르네스트가 떠난 후, 교실엔 한 자리가 비었을 뿐이었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실력과 명성이 상당한 그가 부상을 당하고 반년 만에 피아노가 아닌 작곡으로 또다시 최전선에 나간 일은 우리 반뿐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선생님들도 공공연하게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교실마다 하고 다니시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리라 생각하시는 것이겠지.

그 덕분에 돌고 도는 소문은 학생들을 자연스레 피아노과로 불러들였다.

에르네스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그나마 잘 알고 있는 건 같은 반 학생들일 것이란 흐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 선배는 언제 출발한 거예요?”

“그저께네요.”

“어디로요? 준비는 얼마나 하고요? 건너 듣기론 한 달 만에 다 끝냈다고 하던데.”

친한 플루트과 8학년의 밀레나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날 붙잡고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아이들도 있는 걸 보니 아마 대표로 내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도 에르네스트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아 그의 도전과 일정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단호한 그를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고, 여러 복잡한 생각 때문에 서로의 일에 대해선 묻지 않고 그냥 보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질문을 받고도 막상 답해 줄 수가 없으니 내가 무척 잘못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내 스스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자 밀레나 역시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살짝 감돌 때쯤, 밀레나가 얼른 나서서 다시 맥을 이어 나갔다.

“선배는 어떠세요?”

“예?”

“어…… 그냥 어떤 기분이신가 해서요.”

이것도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일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가 원하는 바를 잘 해낼 수 있기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가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잘 해내겠죠. 그리고…… 그만큼 저도 잘해야겠고요.”

“선배는…… 아! 퀸 엘리자베스?”

“맞아요.”

“진짜, 진짜로 기대 중이에요!

한껏 들뜬 밀레나가 갑자기 더 바짝 다가왔고, 그녀 뒤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과 목소리가 더 뜨겁게 집중되었다.

“한 달 동안 결승까지 진행하죠?”

“엄청 힘들 것 같아요.”

“예전에 다른 선배한테서 들었는데, 갈 때 꼭 베개 같은 것 챙겨 가래요. 잠자리가 바뀌면 고생한다고요.”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들과 달리 이번에 쏟아지는 질문이나 관심들은 적어도 내가 바로 답변해 줄 수 있는 것들이어서 편했다.

성심성의껏 할 수 있는 대답을 해 주다가 옆을 보니 나뿐만 아니라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도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특히 발렌티나 주변엔 학생들이 많았는데, 약간 무섭다는 평을 듣는 아나스타샤와 달리 발렌티나는 학년과 학과를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런 주제가 있으면 늘 주목받곤 한다.

게다가 지금은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더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5년 만에 돌아오는 큰 무대, 쇼팽 콩쿠르의 예선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긴장되지 않으세요?”

“당연히 긴장되지! 볼품없이 예선에서 탈락하면 얼마나 놀림당하겠어?”

“안 그래요!”

발렌티나는 생각만 해도 숨이 안 쉬어진다는 듯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기까지 했고, 그녀 주위의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부축해 주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발렌티나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모두가 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절대 놀릴 만한 무대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도.

잔뜩 기대된다는 듯한 질문이 계속된다.

“그나저나 콩쿠르 전에 리허설을 한다고 들었어요! 언제 해요?”

“다른 참가자들이랑 다 같이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저번에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네 명이라고 했었지…….’

우리 반의 발렌티나와 바르바라, 그리고 11학년의 선배 두 명. 이렇게 총 네 명이 중앙음악학교의 쇼팽 콩쿠르 예선 참가자들이다.

서로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경쟁자이다 보니 각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선배들이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에게 공동 리허설을 제안했다고 한다.

콩쿠르 무대에 서기 전에 학교 챔버 홀에서 네 명끼리 일단 한번 해 보자는 의미였다.

‘흔한 일은 아니야.’

원래 이런 공동 리허설은 잘 하지 않는다.

콩쿠르 직전의 연주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이기도 하고, 성격에 따라선 미리 하는 이런 연습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연주자들이 혼자서 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번엔 모두가 응했다. 아마 선배들이 꽤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상당히 비밀리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소문이 퍼진 걸 보니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발렌티나는 당황하는 일 없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아. 미안해, 얘들아. 그거 선생님들이랑 하는 거라서 일반 학생들은…….”

“선생님들……?”

“진짜 분위기 장난 아니겠네요.”

“리허설이 아니라 실기 시험 같겠는데?”

나도 처음엔 공동 리허설이라길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면 콩쿠르 무대에 나가기도 전에 네 명을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실력의 고저를 멋대로 평가하거나 쓸데없는 소문이 돌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진 않는다고 했다.

홀에서 의상을 갖추고 심사 위원 대신 선생님들을 모셔 오는 등 현장감 있는 리허설을 하되, 그러면서도 부담감 등으로 악영향은 가지 않도록 계획을 한 모양이었다.

발렌티나는 옅게 웃으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진짜 미안해. 대신 가서 잘할게.”

“난 발렌티나 응원해요!”

“11학년 선배들도 괴물같이 강하다던데, 예선은 다 같이 통과했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바르바라 선배도.”

이야기들을 살짝 들어 보니…… 공동 리허설을 모두 보지 못하도록 한 게 옳은 결정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모두가 콩쿠르 성적에 관심이 넘치고 있는데, 그나마 더 말이 나오지 않고 자제가 가능한 건 아직 참가자들의 실력을 한곳에서 견주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허설을 보여 주는 건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다행히 발렌티나가 모두를 잘 설득해서 돌려보냈고, 덕분에 아무 문제 없이 공동 리허설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오후에 한다고 들었는데…… 잘했으면 좋겠다.

“타티아나.”

그런데 별생각 없이 앉아 있던 날 발렌티나가 다가와 불렀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거의 끌어안듯 가깝게 달라붙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오후에 말이야…… 연습 바빠? 아니, 바쁘겠지만…… 그, 두어 시간 정도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

나 역시 콩쿠르까지 한 달도 안 남은 입장이긴 하지만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인가요?”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오후에 공동 리허설을 하는데 거기에 선생님들만 몇 분 오시는 것보단 참가자 친구들 몇 명 정도는 오는 게 좋겠단 의견이 나와서 그렇게 하기로 했거든.”

“그럼 가서 봐도 되나요?”

“응. 그리고 선생님들이 너랑 아나스타샤는 꼭 데리고 와 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은 안 되는데 우리에게 따로 권유가 온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참가자들 주변의 소수만 몇 명 추려 청중들을 구성해 놓으면 어차피 자기 친구를 응원할 테니 쓸데없는 소문이나 내기가 생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라.’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들어 보니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닌 듯했다.

선생님들이 나와 아나스타샤를 굳이 특정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모르겠다.

“저희도 무대에 서야 하나요?”

“응? 아니, 그건 아니야. 처음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닌데…… 두 콩쿠르 참가자들이 섞이면 아무래도 공동 리허설의 의미가 많이 퇴색될 거라 하시더라고.”

“그건 그렇네요.”

두 개의 대형 콩쿠르가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든 인원을 모아서 한 무대에 올릴 순 없다.

두 콩쿠르의 성격이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의 곡들만 취급한다.

네 명의 참가자들은 차례로 무대에 올라 준비한 쇼팽의 곡들로 무대를 만들어 나가겠지.

그런데 거기에 갑자기 나나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어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같은 걸 연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무대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래선 콩쿠르를 대비하는 공동 리허설을 하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공통된 무대를 구성할 연주자들만 모으고, 되도록 현장 분위기도 비슷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를 이해한 나는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발렌티나는 약간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은 너희가 와서 견학 정도는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시던데.”

이런 흔치 않은 공동 리허설은 그저 보기만 해도 그 분위기 등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대답했다.

“갈게요.”

“응, 알았어.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아나스타샤는요?”

“지금 물어보려고.”

발렌티나는 고맙다는 듯 배시시 웃더니 물러서선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난 머릿속으로 오늘 오후의 계획들을 살짝 수정했다.

***

공동 리허설은 오후 2시에 5층의 챔버 홀에서 열렸다.

잠깐 난 시간 동안 난 아나스타샤와 한 연습실에서 서로 연습하는 걸 견학하다가 같이 5층으로 향했다.

“우린 발렌티나랑 바르바라만 응원하면 되는 거니?”

“그렇죠? 아무래도요.”

“선배들은 어떠려나…… 듣기론 꽤 잘한다던데.”

아나스타샤는 넌지시 떠보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꽤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공동 리허설에서 분명 네 명의 순위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아무도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모두 마음속으론 어느 정도 안다.

난 그 마음속 순위와 상관없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무조건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죠.”

“아하하하.”

차라리 이렇게 단순하게 정해 놓는 편이 낫다. 아나스타샤도 내 의견에 동의하는지 한참이나 웃더니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했다.

챔버 홀 앞에 도착하니 사람도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아마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소수로 정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홀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무대만이 밝게 빛나고, 그곳까지 향하는 길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128석이나 되는 좌석들이 그 어둠 아래 펼쳐진다.

대부분의 좌석은 비어 있지만, 맨 앞 열엔 사람들이 몇 명 앉아 있었다.

“…….”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아마 바르바라가 초청한 것으로 보이는 라리사, 11학년인 선배 몇 명, 그리고 선생님 네 분이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하필 선생님들 옆자리였다.

그냥 뒷줄에 앉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난 그 옆에 앉았다.

“딱 맞춰 와 줬구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예…… 안녕하세요, 올렉산드르 선생님.”

살짝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난 괜히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다. 그사이 옆에 있던 선배가 일어나선 내게 종이를 한 장 건네주었다.

“한번 봐 둬요.”

“감사합니다.”

얼른 보니 종이엔 무대에 설 네 명의 프로그램이 적혀 있었다.

전부 익숙한 곡들이었다. 난 한눈에 쓱 읽어 보고는 옆의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쇼팽 콩쿠르 예선전의 공동 리허설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 옐브루스. 들어오시죠.”

딱히 사회자가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안내는 11학년 선배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했다.

하지만 임시로 하는 리허설임에도 꽤 격식을 차린 분위기였다.

안내가 끝나자마자 박수 소리가 무대 쪽으로 향했고, 곧 대기실 문이 열리며 검은 연미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걸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