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08화 (1,008/1,277)

##  1008화

11학년 옐브루스 선배는 무대 위에서도 여유 있어 보였다.

이 중앙음악학교의 챔버 홀에 몇 번이나 서 봤을까? 못해도 스무 번은 되지 않을까. 당연히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만큼 여유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선배는 피아노 앞에 서선 청중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박수에 화답하듯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을 뿐이지만 어쩐지 굉장히 어른처럼 보였다. 실제 법적으로 어른이기도 하고.

“…….”

물론 저런 선배도 국제 콩쿠르에선 어른 축에 끼기 힘들다. 최고 나이 제한인 서른 살을 꽉 채워 나오는 연주자들도 많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틈바구니에서 최저 나이 제한을 간신히 턱걸이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사실이 새삼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확실히 콩쿠르에 참가할 사람을 이렇게 먼저 보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와닿는 감각이 다르다.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다.

“…….”

인사를 마친 옐브루스 선배가 피아노 앞에 앉자 자연스레 조명이 더 어두워지면서 무대 쪽만 밝혔다.

숨 쉬는 소리마저 잦아들며 홀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진짜 쇼팽 콩쿠르 예선전이 시작된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가 짙게 우리 발밑을 물들일 무렵, 청명한 소리가 우아하게 흘러나왔다.

‘첫 곡은 녹턴이었지…….’

쇼팽의 녹턴 op.48의 1번 곡.

이미 난 옐브루스 선배의 실력을 위클리 연주회 등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이 연주는 내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던 선배의 실력을 뛰어넘고 있었다.

선배 역시 멈추지 않고 발전해 나가는 음악가인 것이다.

한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이룬 결과를 이렇게 한순간에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예술을 통하지 않는다면 이런 걸 느끼긴 어렵겠지.

뛰어난 연주를 마주하니 벅찬 기분이 전신을 휘감아 오른다. 이렇게 좋은 음악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싶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

난 콩쿠르 참가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저 잘한다고 감탄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우수한 경쟁자에게선 당연히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일 땐 절대로 감성적으로 임해선 안 된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음악이 아니라 이 순간에 취한 내 감정에 속아 버릴 수도 있으며, 또 단순히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간 그동안 내가 이루어 놓은 해석과 결과물에 무분별한 덧칠이 되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 다른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안심할 순 없다.

아주 짧은 순간 음색에 살짝 덧칠이 되는 것만으로도 음악 전체의 색이 달라져 버리는 일이 잦으니까.

때문에 연주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들을 땐 이성을 가장 맑게 한 상태로 똑바로 경청할 필요가 있었다.

실력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음악을 분석한 다음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그렇지 않은 건 과감하게 배제하며 완벽성을 기해야만 한다.

이렇게 듣고 배우는 방식은 나를 제대로 알고, 상대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쉬운 방식이 아니다.

평소에도 그렇겠지만 특히 콩쿠르처럼 경쟁이 동반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아예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지 않는 연주자들도 많으나,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일단 모두 그런 위험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음악에 단단한 자신감이 있고, 또 상대를 확인하고 언제든지 꺾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가들. 나 역시 그런 음악가 중 한 명이다.

“…….”

조금 더 분석적으로 감상에 임했다.

선배가 음악을 펼치는 모습은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왼손으로 낮게 옥타브를 짚고, 그다음 쭉 끌어 올려 오른손과 함께 음을 펼친다.

음색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선배가 이어지는 음들을 이렇게 누르기까지 연구와 수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그야말로 피부로 느껴진다.

편안한 리듬감과 구조성도 어느 한 곳 흠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정도로만 전부 연주한다면…… 꽤 상위권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인즉슨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대기실에 있을 두 사람은 어떻게 듣고 있을까.

“…….”

물론 걱정은 별로 안 든다.

두 사람 역시 충분히 많은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자신의 음악을 조성했고, 그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아마 지금 들리는 이 음악을 듣고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선배들도 그걸 알아서 다 같이 공동 리허설을 하자고 한 것 아닐까.’

우리가 선배들을 아는 것처럼 선배들 역시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테지.

그러니 발렌티나나 바르바라가 이런 상황에서 도망가거나 위축되지 않고 더더욱 강해질 것이란 것 또한 아리라 생각한다.

정말 그런 목표라면 우린 이 리허설을 제안한 선배들에게 감사해야만 했다.

옐브루스 선배는 마치 내 생각에 대답하듯 강렬한 피날레를 완벽한 실력으로 마무리 짓고는 녹턴을 끝맺었다.

“…….”

음악이 끝나고도 박수는 없었다.

연주회에선 무대에 올라 여러 곡을 연주해도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받곤 하지만, 콩쿠르에선 남은 곡들을 모두 다 연주할 때까지 가만히 들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공동 리허설의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청중으로 초대된 사람들 또한 주의했다.

선배는 고개를 살짝 들고 손목을 접더니 다음 곡을 시작했다.

‘마주르카 op.59의 1번…….’

방금 전 연주했던 녹턴도 콩쿠르에서 자주 나오는 레퍼토리인데, 이번 곡 역시 그랬다.

옐브루스 선배는 특별히 모험을 하지 않고 정통파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대를 해결하고 있었다.

연주 역시 아카데믹한 연구가 물씬 느껴지는 방식이었다.

“…….”

그런데 그것만으론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옐브루스 선배는 중간에 살짝 자신의 색을 어필하기도 했다.

마주르카적 리듬 전체에 섞어 낸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온 것이라서 약간 이질감이 든다.

물론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것이라서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난 그것을 캐치해 옐브루스 선배가 무엇을 고심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모범적인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이 가끔 자신의 완성도를 믿지 못할 때 생기곤 하는 현상인데, 난 선배가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말할 수도, 그럴 기회도 없겠지만…….’

내 옆에 선생님들이 네 분이나 와 계신다. 내가 입을 여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 될 테지. 그리고 내 입장은 발렌티나의 초청을 받아서 온 친구였다.

그녀의 연주를 응원하기나 하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듣기는 분석적으로 듣되 입은 조용히 다물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난 이미 이곳에 올 때부터 마음을 그렇게 정해 놓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

4분 남짓한 마주르카 op.59의 1번 연주가 끝나고 나선 곧바로 2번이 이어졌다.

약간 더 리듬감이 강하고 화려한 색채가 빛나는 곡이다. 넘버링도 붙어 있고, 바로 이어 연주하기에도 정말 좋다.

옐브루스 선배는 이 곡 역시 직전의 곡처럼 정확하게 연주하면서 그 사이에 약간의 특별함을 섞었다.

‘녹턴과 마주르카 두 곡…….’

예선전에서 연주해야 하는 여섯 곡 중 세 곡이 연주되었다. 남은 건 세 곡. 일반적으론 그 세 곡 중 두 곡에 고난도 에튀드를 넣는다.

옐브루스 선배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우아한 분위기를 한 번에 날려 버리듯 과감하게 건반을 짚었다.

‘이것도 괜찮네.’

쇼팽 에튀드 op.10의 4번.

벼락처럼 떨어진 소리가 온 무대를 감전시킨다.

프레스토의 빠른 속도로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가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냈다.

해석이나 호흡 구분이 어렵지 않고, 빠르고 정교하게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을 드러내기에 좋은 곡이라서 선배는 다른 특이한 기교를 부리는 일 없이 연주를 펼쳐 나갔다.

정말 깔끔하고 화려한 실력이었다. 이 곡은 시험이나 입시, 콩쿠르에서 정말 많이 선호하는 곡이라 완성도 있게 치는 연주자들도 많은 편인데, 옐브루스 선배의 연주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계속되는 정석적인 선곡에 이어지는 에튀드는 op.25의 6번이었다.

3도 트릴 테크닉이 완성되어야만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곡으로 쇼팽 에튀드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난도의 곡이고, 예전 내 주력 연습곡이기도 했다.

“…….”

이 연주 역시 특별히 해석에서 갈리는 부분은 없었다. 얼마나 테크닉적으로 완벽한지를 증명하는 곡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짧은 에튀드 두 곡의 역할은 음악에 깊게 몰입하게 하는 것보단 기대감을 끌어 올리는 데에 있었다.

그 기대감을 마지막으로 충족시켜 준 건 선배가 가지고 온 마지막 곡이었다.

‘정말 좋네.’

쇼팽의 발라드 1번 op.23

조성이 불분명한 음이 툭 제시되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음들이 서서히 쌓이며 이윽고 한 음악을 이룬다.

사단조로 모양을 갖춘 서정적인 선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가슴에 파고들었다.

“…….”

역시 상당한 완성도였다. 연주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완성하길 원하고, 아주 힘든 노력 끝에 손에 쥐어도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모두에게 제각각으로 나타나는 곡이다.

옐브루스 선배의 발라드는 이 챔버 홀이 아니라 훨씬 큰 무대도 꽉 채울 만한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충분히 합격하겠어.’

난 심사 위원도 아니지만, 세상 그 누가 듣더라도 이 사람을 떨어뜨리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예선전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가을에 시작되는 본선에서 더 잘해야겠지만…… 우선 이 정도면 다른 곡들도 분명히 잘할 거란 예감이 든다.

10분 정도 되는 발라드 1번은 어느새 그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시간을 다루는 마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브라보!”

연주가 끝나자 곧장 환호성과 박수가 쇄도했고, 옐브루스 선배는 일어나서 인사했다.

만족과 피로함이 동시에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개별 곡의 길이가 짧다 하더라도 여섯 곡이나 연달아 연주하는 건 체력과 정신력을 극도로 소모시키는 일이다.

박수를 치던 아나스타샤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가까이하며 말했다.

“프로그램 구성이 정말 모범적이네.”

“그렇죠?”

“너도 그렇게 느꼈니?”

“예. 정말 귀감이 된다고 생각해요.”

선배가 준비한 프로그램 구성은 강력했다. 녹턴으로 부드럽게 시작을 열고, 자기소개를 한 후엔 이어 마주르카 두 곡으로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간다.

그 대화가 깊어질 무렵 분위기를 휙 바꾸어 에튀드로 테크닉을 확실하게 증명하고는 발라드로 마무리 짓는 식이었다.

26분 동안 진행된 여섯 곡들의 향연은 30분짜리 소나타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지녔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그걸 실현까지 멋지게 해 보인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박수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잘했다, 옐브루스.”

“감사합니다.”

옐브루스 선배는 무대에서 내려와 청중석에 있는 선생님들을 만났다.

원래 순번을 마친 연주자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려온 걸 보니 약간 다르게 진행하는 모양이다. 내가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서 잠자코 구경하기만 했다.

“훌륭한 연주였어요. 이대로만 연주해도 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예선은 가뿐히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들은 한 분씩 돌아가며 옐브루스 선배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가만 듣던 선배가 요청했다.

“심사평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연주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없으니 약간 어색해하는 모습이었다. 지난 11년간 이 학교에서 지내 온 연주자다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도 선생님인 올렉산드르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흘 남았다, 옐브루스.”

“나흘 동안 더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요.”

“지금 가진 것들에 집중하거라.

잘했단 말 외에 별말이 없는 것은 배려였다. 멋진 음악을 준비한 선배가 혹여나 마지막에 혼란을 겪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섞인 배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옐브루스 선배는 약간 불만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배는 선생님들에게 짧게 대답하고 인사하곤 청중석 앞자리 중 남은 곳으로 향했다.

그대로 내 앞을 지나쳐 간다고 생각할 때였다.

“……?”

가까이 오면서 선배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어떻게 봐도 일부러 늦추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날 똑바로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

선배는 발을 멈추거나 하진 않았지만 난 그 눈빛으로부터 강렬한 압력을 느꼈다.

‘방금 잘하셨다는 말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건가?’

그 정도는 쉽게 해 줄 수 있긴 하다.

“잘 들었어요, 옐브루스 선배님.”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는 감사를 표하고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어 물었다.

“좀 더 긴 감상은?”

“……예?”

황당하다는 듯 되물어도 뻔뻔한 표정만 돌아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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