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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09화 (1,009/1,277)

##  1009화

옐브루스 선배는 아예 내 앞에 멈춰 섰다. 선배가 앉지 않으니 당연히 다음 리허설도 진행되지 않았다.

난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이 사람 왜 이래?’

자기 차례가 끝난 후 대기실로 돌아가지 않고 청중석으로 내려오는 것까진 이해했다.

모처럼 선생님들까지 모셔 놓고 리허설을 하는데, 바로 대기실로 들어가 버리면 생생한 피드백을 놓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살짝 융통성 있게 각 연주자들이 연주를 마친 뒤에 텀을 주어서 심사 위원 역할인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기획한 것이다.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함이 많이 드러나는 연주를 했을 때나 할 말이 있는 것이지, 이 정도로 훌륭한 수준을 보여 버리면 딱히 말해 줄 것이 없다.

심지어 본 무대가 이제 며칠도 안 남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선생님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칭찬 일색으로 일관한 건 경험과 현명함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

그런데 선배는 결국 내 앞에서 의견을 묻고 있었다. 짧은 칭찬 같은 것이 아니라 보다 날카롭고 예민한 의견을.

예컨대 위클리 연주회였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정말 좋은 연주였지만 살짝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하는 부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상황은 어떻게 보더라도 내가 입을 열면 안 되는 상황이다.

선생님들도 아무 말씀 하지 않고 넘어가셨고, 곧 콩쿠르를 앞둔 선배가 내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아 음악의 완성도가 깨지면 책임질 수도 없다.

‘솔직히 이 정도 하시면 충분히 유리하시잖아요.’

예선 통과는 어렵잖을 것 같으니 괜한 피드백을 수용하는 것보단 안정성을 추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난 지금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의 응원을 하러 와 있다.

진짜 단시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줄 기분이 든다면 두 아이에게 해 주고 싶다.

아무튼 여러모로 정말 난처했다.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고.

때문에 난 일단 빨리 옐브루스 선배를 보낼 심산으로 이야기했다.

“어…… 정말로 좋은 연주였어요?”

너무 생각 없이 말한 티가 확 났다. 말해 놓고 나서야 말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선배는 딱히 화를 내진 않고 내 실수를 짚어 줄 뿐이었다.

“대충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떠보려고 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

지적을 당하니 창피하긴 했지만 동시에 반발심도 든다.

솔직히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게 어느 쪽인지 따져 보자면 압도적으로 옐브루스 선배 쪽이라 생각한다.

지금 1초마다 주변이 얼마나 어색해지고, 내가 얼마나 곤란해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 그런 걸 가지고 따진다고 해서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선배가 원하는 걸 줘 버리는 것이었다.

“감상을 원하신다면…… 마지막 발라드 1번이 참 인상 깊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도 그 곡을 연주해 본 적이 있지만, 솔직히 옐브루스 선배님만큼 완성도 있게 연주하진 못할 것 같거든요.”

“그럴 리가. 아무튼, 그리고?”

선배는 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도 슬슬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음, 에튀드도 정말 깔끔했고요.”

“좀 더?”

“녹턴도 훌륭했어요. 처음 두 음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요.”

“혹시 단점은 없을까?”

살짝 신경질적이 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며 영혼 없는 대답을 하다가, 그제야 난 선배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고는 멈칫했다.

그 눈빛에선 고집이나 심술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만이 어슴푸레 보일 뿐이었다.

“아.”

이 사람, 열여덟 살이었지.

멋진 연미복을 차려 입고 뛰어난 실력을 선보인 선배지만, 단지 나이만 성인일 뿐 ‘어른’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나이다.

심지어 국제 콩쿠르 첫 출전이니 불안한 것이 당연하다.

리허설을 성공적으로 잘해 놓고도 이렇게 단점을 집중적으로 물어보는 걸 보면 자신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그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청중석에서 보는 내 입장에선 충분히 훌륭한 퍼포먼스로 콩쿠르 예선 정도는 쉽게 통과할 것이라고 멋대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 역시 숙련된 베테랑들로서 선배의 실력만 보고는 안심하셨고.

그러나 지금 실력만 적당히 유지해서 예선을 가뿐히 넘기자는 작전 같은 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무대 위에서 폭발할지도 모른다.

“…….”

같은 연주자로서 그 마음은 정말 잘 공감할 수 있었다.

난 무대 공포증이 없는 편이지만, 그건 항상 연습에 최선을 다하여 내 손에 깃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내고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평소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무대에선 망쳐 버릴 수 있다.

‘어떻게 할까…….’

말없이 물끄러미 선배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선배는 풀이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선생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할 말이 없다고 하리라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선배가 날 원망하는 일은 없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를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내가 견디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되어도 제 탓 하지 마세요.’

실전을 앞두고 거의 완성된 음악을 쥐고 있는 연주자에겐 그 어떤 의견도 내놓기 조심스럽다.

무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악영향을 미쳐 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뭐가 어찌 되더라도 난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난 곁의 사람들도 똑바로 못 챙기고 있으니까.

그래도 막연한 불만족스러움을 그냥 무시해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묻는 옐브루스 선배를 보면…… 괜찮을 거라 믿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단점…… 한 가지만 꼽자면, 자신을 조금 더 믿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건 단점이 아닌…….”

“마주르카에선 살짝 단점이었어요.”

그냥 대충 좋았다고 이야기할 때와는 다르다.

난 옐브루스 선배가 단시간 안에 수용해서 강해질 수 있는 부분들을 따져 보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만을 골라냈다.

만약 잘 이해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터다.

“선배님의 마주르카는 굉장히 객관적이고 여유 있었죠. 어깨를 뒤로 빼고 손끝과 발끝만 피아노에 살짝 걸친 채로 살며시 음악만 건져 올리는 느낌이 있었어요.”

“…….”

“전 그게 좋았는데…… 선배님은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자신을 더 깊게 던지시더군요.”

옐브루스 선배가 구사하는 음악은 정석에 가깝고, 그 구조적 완성도가 높다.

이미 200년 가까이 검증된 아름다움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정갈한 음악은 청중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하게 들렸다. 그러니 굳이 어울리지 않게 억지로 더 관심을 애걸하듯 굴 필요는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몰입하여 음악을 이끌어 내는 스타일의 연주자라면 모를까, 선배처럼 이지적으로 보였던 연주자가 갑자기 중간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환상 속에 있던 청중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열정적이라고 해서 뜨겁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선배는 알 필요가 있었다.

“…….”

내 말을 듣자마자 옐브루스 선배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벌써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내 말을 받아들일진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난 싱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덜 과감해도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선배님은 충분히 멋있으시니까요.”

“어…… 그, 그래?”

막 깨달은 무언가에 혼란스러운지 선배는 주춤거렸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상념에 잠기는 건 자리에 앉아서 해 줬으면 좋겠다.

대기실에선 다음 연주자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대체 왜 안 부르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터였다. 빨리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옆자리의 선생님들은 내가 멋대로 떠들어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지만, 이야기가 끝나고도 옐브루스 선배가 미적거리자 바로 재촉하셨다.

“슬슬 가서 앉아라, 옐브루스.”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들을 돌아본 선배는 급히 사과하고는 그다음으론 다시 날 향해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별말씀을.”

그제야 선배는 부리나케 움직여 내 앞에서 비켜났다. 좌석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한 걸까? 꽤 중요한 힌트를 준 것 같은데…….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선배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강력한 연주자가 되어 버릴 터였다.

문제는 그 경쟁자가 바로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라는 것이다.

“…….”

물론 콩쿠르엔 선배만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전 세계의 괴물 같은 연주자들이 모여든다.

그러니 선배를 조금 돕는다고 해서 내 친구들이 특별히 더 불리해지진 않겠지만…… 발렌티나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왜 그랬냐며 투덜거릴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약간 각오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타티아나.”

“예?”

“아무한테나 그러지 좀 마.”

그런데 발렌티나를 보기에 앞서 아나스타샤에게 혼나 버렸다.

옆을 보니 그녀는 언젠가 봤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난감해하는 표정.

예전부터 아나스타샤는 내가 아무 곳에나 끼어들까 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지른 일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었다.

지금 일도 선생님들이 와 계신 자리에서 내가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미 난 곤란해졌다. 지금 옐브루스 선배를 지도하시는 올렉산드르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제자에게 멋대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 버린 날 굉장히 건방지다고 보고 계시진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래도 아무나는 아닌걸요…….”

“응? 아, 얘는 정말…….”

학교 선배는 아주 남이라 하기엔 좀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않나?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았으나 결국 입을 가리고는 숨죽여 웃었다.

상황이 조금 정리되자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다.

“이어 진행하도록 하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회자 역할을 맡았던 선배가 다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이어서 다음 두 번째 순서, 비탈리. 준비되셨다면 무대 위로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호출에 응답해 대기실에서 나온 건 11학년의 비탈리 선배였다. 큰 키와 곧은 자세가 돋보인다.

연주를 마치고 난 옐브루스 선배가 시간을 꽤 오래 끌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할 만도 한데, 그런 건 지금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비탈리 선배는 무표정한 얼굴로 척척 걸어 나와선 깍듯한 묵례를 했다.

박수 소리가 선배를 맞이했다.

‘저 선배도 상당히 잘하던데.’

그 기대감은 꽤 커져 있었다. 왜냐하면 아까 옐브루스 선배가 무대에 올랐을 때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했기 때문이었다.

비탈리 선배도 상당한 실력자이니만큼 내가 감탄할 만한 연주를 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잠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박수가 멈추고 모두의 소리가 사라졌다.

그 고요 속에서 비탈리 선배만이 홀로 움직여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곤 의자를 살짝 내려 조정하고는 지체 없이 건반을 짚었다.

묵직한 음이 쿵 하고 무대에 내려앉는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역시 인기곡인가.’

비탈리 선배가 꺼낸 첫 곡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이었다.

프로그램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는 자유지만, 그래도 에튀드나 마주르카로 시작하지 않고 발라드로 시작하는 건 꽤 독특한 구성이었다.

그리고 단지 구성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해석 또한 독특했다.

기본적으로 비탈리 선배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는 스타일이었는데, 직전에 연주된 발라드를 듣고는 한껏 흥이 오른 모습이었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도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날 꽤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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