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10화 (1,010/1,277)

##  1010화

살짝 빠른 템포에 자유분방한 역동감.

비탈리 선배의 쇼팽 발라드 1번은 일반적인 해석과는 거리가 있는 개성 있는 느낌이었다.

콩쿠르에서 이런 연주자들이 받는 평가는 보통 극과 극으로 갈리기 마련이다.

굉장히 높은 점수를 주거나, 아니면 연구 부족으로 치부하고 아주 낮은 점수를 주거나.

그런데 내 예상엔 좋은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 곡의 레퍼런스를 모르는 채로 들었다면 어떨까.’

물론 난 너무 오랜 시간 클래식 음악을 접해 온 사람이라서 완전히 머리를 비우고 듣는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레퍼런스를 꿰뚫고 음악을 분석해 가며 듣는 건 아니다. 보통의 청중들은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이 곡을 듣는다면 위화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심사 위원들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충분히 튼튼하고 매듭이 확실하니 아마 꽤 괜찮은 점수를 주지 않을까 싶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마주르카 op.30의 3번과 4번 곡이었다. 콩쿠르에선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인데, 이 역시 꽤 특이했다.

‘확실히 눈에 띄긴 하겠어.’

아까 연주했던 발라드 1번도 그렇고, 이런 프로그램 구성은 다른 사람들과 겹치기도 어려우니 꽤 돋보일 것 같았다.

당연히 그만큼 부담해야 할 것도 있다.

수십 개의 후보 곡 중에서 여섯 곡을 추리는 것이니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을 것 같지만, 그중에서도 선호되는 곡들이 정해져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난이도가 어려운 만큼 효과가 확실하든지, 아니면 약간 쉬운 만큼 보다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다든지…… 확실하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어렵긴 무척 어려운데 귀에 그 어려움이 잘 들리지 않는 곡들을 콩쿠르에서 연주자들이 외면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집어 들지 않는 곡을 무대에 들고 올라가서 멋지게 연주해 버리면 그야말로 확실하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오션을 공략하는 연주자들도 있곤 한데, 비탈리 선배는 정확하게 빈틈을 노린 데다가 실력파이기까지 했다.

“…….”

불필요한 과몰입이나 경망스러운 액션, 퍼포먼스 등은 보이지 않았다.

비탈리 선배는 어떠한 전략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있을 뿐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곡들을 잘 표현해 내고 있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이 무대를 준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심사 위원이라면 저 선배의 협주곡을 꼭 들어 보고 싶을 것 같아.’

지금 연주 중인 음악으로 감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다른 곡들에 대한 궁금증까지 일게 하는 건 정말 대단한 실력이었다.

보다 큰 무대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비탈리 선배의 예선 프로그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어진 곡은 녹턴 op.9의 3번이었다. 이 곡 역시 1번이나 2번과 달리 콩쿠르에선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이다.

난 가만히 곡을 경청하면서 잠시 다른 상념에 잠겼다.

‘내가 만약 쇼팽 콩쿠르에 나갔더라면…….’

물론 난 쇼팽의 곡들을 조금 멀리하고 있었으니 콩쿠르 무대에 올라 자신 있게 펼치는 건 어렵겠지만, 그걸 무릅쓰고 출전했다고 가정해 보았다.

아마 그랬다면 앞서 연주한 옐브루스 선배처럼 무난한 프로그램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안정적이고 강력한 음악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것이란 확신은 쇼팽에 부담을 느끼는 내 마음과 합쳐져서 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난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의 곡들만 연주할 수 있도록 제한된다.

쇼팽이 작곡해 놓은 피아노 곡들이 워낙 많긴 하지만, 어쨌든 선택의 폭이 무척 좁다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또 한 번 곡들이 추려진다. 100년 가까이 콩쿠르가 존속해 오면서 쌓인 데이터로부터 비롯된 연구와 해석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실력으로 노력해도 보다 유리한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건 압도적인 이점이다.

때문에 선호되는 곡과 해석은 점점 압축되었고, 그것을 더 깊게 연구하고 구현해 내는 것은 연주자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되었다.

앞서 연주한 옐브루스 선배처럼 정통파 연주자들이 콩쿠르에서 유리하다는 건 상식처럼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짝 독특하면서도 음악성이 뛰어난 연주자들도 많다.

자신 있게 자신의 음악을 구사하면서 보다 도전적으로 임하는 연주자들의 수는 회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난 비탈리 선배 같은 연주자들이 많아도 괜찮을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에튀드 두 곡이다.

비탈리 선배가 선택한 것은 op.10의 7번과 op.25의 4번이었다. 마지막까지 방향성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프로그램이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난 비탈리 선배 역시 이렇게만 한다면 좋은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사 위원들은 분명 선배의 다음 음악에 호기심을 가질 테니까.

“브라보!”

에튀드까지 멋지게 연주를 마친 비탈리 선배가 일어서자 환호가 쏟아졌다. 나도 열심히 박수를 치며 선배의 성공적인 리허설을 축하했다.

비탈리 선배는 정중한 묵례로 화답하고는 청중석 쪽으로 내려왔다. 네 분의 선생님들이 선배를 앞에 두고 한마디씩 해 주셨다.

“긴장은 전혀 안 한 것 같더구나.”

“훌륭했어요, 비탈리.”

이번에도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지적할 부분이 없으니 이대로만 잘해 주길 바라는 느낌이다.

선생님들과 비탈리 선배가 이야기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내게 살짝 말을 걸어 왔다.

“흔치 않은 프로그램이었어. 그렇지 않니?”

“예, 그렇네요.”

“마주르카가 특히…… 보통은 다른 거 하잖아?”

“그렇죠. 59나…… 50? 그리고 24도 자주 나오는 편이고요.”

“56은 어때?”

“56도 많죠.”

우린 그간 콩쿠르에서 자주 보였던 곡들의 오푸스 넘버들을 대 가면서 비탈리 선배의 프로그램이 얼마나 드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깐 사이 선생님들의 짧은 평이 마무리되었고, 비탈리 선배도 청중석 앞을 가로질러 자신의 좌석을 찾아갔다.

“…….”

선배가 내 앞을 지나갈 때 즈음 난 살짝 긴장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냥 멋있었다고 한 마디쯤 해 주면 될 일이었지만, 앞서 옐브루스 선배의 일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설마 이 선배도 나한테 뭔가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사이 비탈리 선배는 내 앞을 휙 하고 지나가 버렸다.

“…….”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난 조금 창피해져서 어깨를 비틀었다. 이게 당연한 거지. 옐브루스 선배가 조금 특수한 경우였던 거고.

그렇게 한 번 질문을 받고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약간 오만해진 것 같았다. 난 급히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식혔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정말 발렌티나나 내 일에 신경 써야 한다.

부끄러움에 마음속으로 발버둥 치는 사이, 사회자 선배가 마이크로 안내했다.

“연주자 두 분, 그리고 청중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럼 15분간 인터미션이 있겠습니다. 그 후 다음 두 연주자의 무대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리허설에도 인터미션은 당연히 있다.

특히 이렇게 네 명이나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르는 공동 리허설이라면 더더욱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청중들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

안내가 끝나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일어서기도 했고, 스마트폰을 켜기도 했다. 어두운 홀에서 환한 빛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난 잠깐 힘을 풀고 의자에 푹 잠겨선 멍하니 지난 한 시간 동안의 여운을 되새겨 보고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나갔다 올까?”

“그럴까요?”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 일어서려는 찰나, 무언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느새 뒷좌석에 와 있던 비탈리 선배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

누구라도 아무 인기척도 없이 그렇게 건드리면 놀랄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살짝 눈을 흘기자 선배가 손을 들어 올리며 사과했다.

“미안해.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괜찮아요.”

“그냥 방금 어떻게 들어 주었나 궁금해서.”

비탈리 선배는 상식인이었다.

인터미션 중인 지금, 주위는 모두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하느라 어수선했다. 홀 안엔 사람들 목소리가 가득했다.

방금 전 연주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이런 분위기에선 얼마든지 묻거나 대답할 수 있었다.

모처럼이기도 하고, 아까 비탈리 선배가 내 앞을 지나갈 때 생각해 두었던 말들도 조금 있었기에 난 가볍게 대답했다.

“제 친구와 그 이야기 했었어요. 흔히 듣기 쉽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정말 멋졌다고요.”

“맞아요. 마주르카가 새삼 좋던데요.”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살짝 거들어 주었다. 그녀가 도와주니 조금 더 이야기하기가 편해졌다.

우린 한동안 비탈리 선배의 연주에 대한 칭찬을 잔뜩 해 주었다. 선배도 기분이 좋은지 약간 머쓱해하기까지 했다.

“억지로 찬사를 받아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억지가 아니에요. 실제로 잘하셨으니까요.”

“음…… 그래? 그럼 하나만 더.”

선배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후배들을 붙잡아 놓고 그저 칭찬이나 좀 받으려는 것이 본 목적일 리가 없었다.

그건 이상한 사람의 행동이다. 선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 본론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옐브루스와 비교하면 어때?”

비탈리 선배는 슬쩍 옆을 살펴 옐브루스 선배가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신중하게 물어보았다.

난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프로그램도 다르고 연주 스타일도 다른데 이걸 하나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할 수도 없고……

한 곡이 겹치긴 했으니까, 그걸 말하는 걸까?

“발라드 1번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누가 이길 것 같아?”

비탈리 선배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별생각 없이 선배를 대하던 난 약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담백하고 솔직한 질문이었다.

역시 바로 옆 경쟁자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비밀스럽게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내가 말하긴 조금 곤란하다.

옐브루스 선배도 그렇고…… 이 선배들은 왜 자꾸 날 곤란하게 하는 걸까.

“예선 후보는 많아요.”

“근데 아무래도 주변을 보게 되잖아? 내가 많이 본 건 옐브루스여서.”

“후후.”

약간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가 잘 가는 건,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난 에르네스트가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 떠난 건지 궁금했고, 또 같은 콩쿠르에 나가는 아나스타샤와 임세연을 굉장히 강력한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자각 정도는 있다. 그래서 난 선배에게 바른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택했다. 그 선택에 내 영향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마침 아나스타샤도 날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쳐도 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 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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