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11화 (1,011/1,277)

##  1011화

아나스타샤는 원래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려고 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대 중 하나인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에서 에르네스트를 꺾기 위해 준비도 상당히 오랜 기간 했던 것을 안다.

그녀가 지닌 라이벌 의식은 지금 비탈리 선배가 옐브루스 선배에게 보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날카롭고 무거웠다.

그런데 결국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음반으로나마 남기려다가 그것도 하지 못했고…… 결국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

지금은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입고 연주자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으니 라이벌로서 아나스타샤가 품고 있는 무대 위에서 그를 꺾고 싶단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테지.

그 대신이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일단은 내가 아나스타샤를 같은 무대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이건 차라리 잘된 일인 걸까…….’

어차피 지금은 우리 둘 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다.

국제 콩쿠르라는 중요한 목표가 당장 눈앞에 떨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하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연주자로서의 입장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는 그러한 합의를 철저하게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각자 나름의 결과를 얻고 나면 그땐 정말 미루던 것들을 하나씩 다시 돌아봐야 할 때가 온다.

난 그것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겠지.

“…….”

가만히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었다. 아마 내가 비탈리 선배의 질문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도울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 선배가 어떻든 난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착각하게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도와주려는 듯 아나스타샤가 살짝 끼어들어 선배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저도 주변을 우선적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너도…… 아, 두 사람이 같이 퀸 엘리자베스 나간다고 했었지.”

“맞아요.”

“아무래도 의식할 수밖에 없지?”

두 선배의 경쟁자 구도나 우리 두 명이나 어쩌면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우린 서로를 아주 강한 연주자로 보고 있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는 선배의 말에 동조할 것 같았다.

수십 명의 천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또래 친구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이 그리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아나스타샤도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어른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타티아나의 말이 옳아요. 예선 후보는 많죠. 우리보다 나이와 경험이 훨씬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까 시야를 좁게 가지는 건 단점이 될지도요.”

“뭐, 그거야 그렇겠지…….”

“조금 더 위쪽을 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가 상대할 피아니스트도, 그리고 무대도.”

똑 부러진 대답이라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난 아나스타샤를 멍하니 보고 있기만 했고, 비탈리 선배는 나지막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말이 맞아. 위만 보고 가다가 결국 거기서 마주하는 게 제일 낫지.”

“그렇죠?”

나 역시 그 말엔 동의했다.

같은 학교에서 출전하는 친구에겐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계속 그러면 제대로 된 실력을 미처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아쉬운 예선을 치를지도 모른다.

우린 지금 참가자 중에서도 가장 어린 편에 속한다는 현실을 다시 제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건 일단 그 나이를 그저 숫자로 넘겨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증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최대한 실력 발휘에 집중하여 보다 큰 무대로 간 다음, 그곳에 자신이 바라던 사람이 있길 바라는 것이 훨씬 좋을 터였다.

가장 현실적이고 적절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위만 보고 있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래에도 있어요.”

“아래?”

“신경 쓰셔야 할 부분 말이에요.”

난 누굴 응원하러 왔는지 잊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비탈리 선배는 아직 리허설이 다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하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비탈리 선배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나와 아나스타샤도 남은 인터미션 시간 동안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홀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안내가 있었고, 쇼팽 콩쿠르 예선전 공동 리허설 2부가 시작되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10학년의 바르바라. 준비되셨다면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박수와 함께 무대 조명 아래로 나온 바르바라는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실제로 폴란드에도 가지고 갈 드레스였다.

바르바라는 우아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이렇게 보니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그녀와 약간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환영과 인사가 끝나고, 바르바라가 피아노 앞으로 향하자 다시 모두는 그녀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바르바라는 길게 숨을 내쉬더니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어라……?’

난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연주자들의 프로그램이 쓰여 있는 종이를 다시 꺼냈다.

거기에 있는 대로라면 바르바라의 첫 곡은 쇼팽의 녹턴 op.62의 1번이었어야 했다.

나장조의 안단테 템포로 느긋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곡으로 자신을 서서히 알리면서 시작하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가 연습해 온 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쇼팽의 에튀드 op.25의 4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상당히 과격하며 불안감마저 전달하는 곡이다.

“…….”

살짝 놀란 나는 옆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의 지도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바르바라가 멋대로 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곡의 의미는 뭘까. 다시 프로그램들을 살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탈리 선배가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이 바로 이 에튀드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싸움을 거는 거잖아요…….’

1부에서도 옐브루스 선배가 발라드 1번으로 자신의 연주를 끝내자 그것을 마치 받아치듯 비탈리 선배가 같은 곡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건 서로 어떠한 연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프로그램 구성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자기 구성을 바꿔 가면서까지 비탈리 선배가 했던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앞서 연주한 선배를 실력으로 압도하여 덮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터치가 생생하게 느껴져 온다.

일반적으로 이건 정면 도전으로 여긴다. 물론 리허설이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난 약간 당황해서 음악에 미처 다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뒤편에서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뒤를 돌아보니 비탈리 선배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연주 중에 소리를 낼 순 없으니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 상황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눈을 마주치니 선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까 했던 말. 발아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란 경고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솔직히 난 이런 걸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기세로만 따지자면 바르바라가 절대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는 점에서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침 등굣길.

시내 도로가 막혀서 잠시 정차해 있는 사이 난 발렌티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타티아나. 나야. 어후, 추워라.

“공항이신가요?”

-응.

아침 비행기를 타고 발렌티나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난다. 거기엔 바르바라와 옐브루스 선배, 비탈리 선배도 함께한다고 한다.

앞으로 진행될 약 열흘간의 쇼팽 콩쿠르 예선 일정 동안 네 사람은 같은 음악학교의 연주자들로서 조명을 받게 될 테지.

얼마 전에 했었던 공동 리허설을 떠올려 본 나는 이 네 명이 얼마나 크게 부각될지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두 명의 선배가 보여 주었던 무대는 며칠이 지난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맴돌 정도로 인상적이었고, 바르바라가 했었던 연주 역시 그간 봤던 연습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강렬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떨리지.

“떨리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발렌티나라면 분명 잘 해내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

“제가 보장할게요. 리허설 무대에서도 이미 한번 증명하셨으니까 폴란드에서 못 할 것도 없지요.”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발렌티나의 음악은 앞선 세 사람의 음악을 잠깐 잊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돋보였다.

원래도 발렌티나는 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고전적인 음악성을 철저하게 지키는 태도를 갖춘 연주자였다.

난 그녀의 그런 균형 잡힌 실력을 굉장히 높게 평가해 왔다.

그리고 그 장점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지금, 발렌티나는 내가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운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가 예선에서 떨어질 확률은 정말 극도로 낮을 것이라는 것.

“네 분 모두 통과해서 10월 본선에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일단 본선에 갈 생각으로 시작한 거니까.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이 정도 자신감이면 충분했다.

난 웃으며 발렌티나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바로 옆에 있다면서 바르바라를 바꿔 주기도 했다.

-우리 열심히 응원해 줄 거지?

“물론이죠, 바르바라.”

-고마워. 나도 갔다 오면 5월엔 너 응원할 테니까. 아하하.

바르바라는 경쾌하게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기운찬 모습이어서 마음이 놓인다. 두 사람이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 가 봐야 할 것 같네. 그럼 가서 또 연락할게.

다시 전화를 받은 발렌티나가 말했다.

무언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분주하게 떠드는 목소리, 바닥을 딛는 발소리 등이 들린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때마침 막혀 있던 시내도 풀려서 차량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가벼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죠? 점심 즈음에 또 전화해요, 발렌티나.”

-응, 그러자. 끊을게?

“예.”

조용히 전화를 끊고 난 창문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4월의 하늘은 무척 맑았다. 아마 조금 후면 비행기도 저 어딘가를 날아 폴란드로 향하겠지.

멍하니 하늘을 보던 내 머릿속엔 지금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떠난 사람도 떠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확실한 발렌티나나 바르바라와 달리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도 모른다.

약간 주저하다가 난 혹시나 싶어 에르네스트의 전화번호를 불러왔다.

“…….”

지금 해 봐도 되는 걸까? 어차피 깊은 시골이라 전파가 안 터진다고 하긴 했지만…… 혹시 통화가 된다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마음 같아선 지금 어디냐고 묻고 싶다. 하고 있는 건 잘되는지…… 또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친구들에겐 쉽게 전화로 물을 수 있는 것도 어쩐지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전화하지 말까.

한참이나 고민하던 나는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하핫.”

그런데 전화를 거니 신호가 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아무 반응도 없다가 곧 상대방의 전화가 꺼져 있다는 안내 ARS만 흘러나왔다.

진짜로 전파가 아예 닿지 않는 곳인가 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곳을 찾아갔는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에르네스트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웃으며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런 것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다.

이제 이곳에 없는 친구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먼 곳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 그렇지. 아가씨, 오늘 오후엔 오케스트라와 연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아요. 3시로 약속해 뒀어요.”

“3시…….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멀진 않아요.”

물론 이제 곧 내 차례도 다가온다는 것을 난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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