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2화
에르네스트에 이어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까지 빠진 교실은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하지만 우린 각자의 스케줄로 학교에 빠지는 일이 잦은 연주자들이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다.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았네. 그 애들 순서가 어떻게 되더라? 발렌티나가 거의 맨 뒤였던 것 같은데.”
“바르바라가 13일. 그리고 발렌티나는 18일이었어.”
“발렌티나는 투덜거리던데.”
“차라리 앞에 했으면 하나 봐. 나라도 그렇긴 해.”
“난 뒤가 좋은데.”
지금 여기에 없는 두 아이는 어딘가 모르는 곳에 간 게 아닌,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볼 수 있는 큰 무대에 가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거나 텔레비전 등을 틀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빈자리를 느끼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응원할 수 있었다.
쇼팽 콩쿠르의 공식 홈페이지 등을 보면서 한참 동안 두 사람의 일정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야기꽃을 피울 때였다.
“아무튼…… 그 애들 돌아오고 나면 다음 달엔 너희들이겠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쇼팽 콩쿠르의 본격적인 예선 일정은 며칠 뒤인 8일부터 시작이다. 아직까진 본격적으로 몰입할 만한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살짝 떨어질 때쯤이 되자 자연스레 모두의 관심은 다음 콩쿠르 참가자인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들은 떠들썩해졌다.
“연습은 잘……되어 가고 있겠지 당연히! 너희가 어떤 애들인데. 그런데 왜 내가 다 떨리는 것 같지?”
“나도 솔직히 쇼팽 예선전보단 퀸 엘리자베스 쪽이…….”
“한 달 내내 어떻게 한다니? 진짜 생각만 해도 힘들어.”
쇼팽 콩쿠르가 피아노 세계에서 가지는 위상은 정말 대단하지만, 제일 관심이 집중되는 건 10월에 있는 본선부터다.
때문에 지금은 5월 내내 세 번의 경선으로 결과를 내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가장 큰 콩쿠르였다.
“…….”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다.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 곡도, 의상도, 그리고 운영 측의 안내에 맞춰 이것저것 조율하는 것도. 한 달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타국에 체류하는 일이니까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꽤 있었다.
만약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했다면 아마 곡에 집중도 제대로 못 했을 것 같다. 날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아버지와 오빠, 예고르, 빅토르, 나제즈다…… 그리고 함께 준비하는 아나스타샤도.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살짝 돌아보자 그녀 역시 날 보더니 웃었다.
지금 친구들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해 이야기하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재미있지 않냐는 눈빛이다.
우리가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본 친구들은 그나마 잘되었다며 웃었다.
“그래도 둘이서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무대에 서는 날도 다르고, 머물 곳도 다르니까 같이 볼 일은 어쩌면 본선 전까진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안이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있어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하고, 미처 다하지 못한 유예의 협조자이기도 한 복잡한 관계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앞서 그녀는 내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터다.
때문에 난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책상에 팔을 괴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말했다.
“그건 모르지 않겠니?”
“뭘?”
“세 번의 무대에 모두가 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첫째 주에 내가 짐 싸서 올지도…….”
설마 진심으로 그런 말씀 하시는 건가요?
난 놀란 눈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객관적으로 듣자면 아나스타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선 진출자 73명 중 두 번째 스테이지인 준결승에 가는 건 아마도 24명. 사정에 따라 더 붙거나 더 떨어지거나 할 순 있겠지만 대략 2/3은 무대에 한 번만 서고는 일주일 만에 탈락하는 것이다.
물론 남아서 일정을 계속 보거나 벨기에 관광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보통은 탈락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편을 선택한다.
아나스타샤나 내가 그 2/3 안에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다.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예선에 통과할 자신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실제 무대는 부딪쳐 봐야 아는 것이니까.
현장에서 어떤 변수들이 존재할지 모른다. 난 세상에 100%는 절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 세계에서 73명만을 뽑아 한 달 내내 경선시키는 곳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아무리 그게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아나스타샤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한들! 지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할 틈도 없이 친구들이 득달같이 들고일어나서 아나스타샤를 둘러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나스타샤!”
“우리도 지금 재수 없는 소리는 안 하려고 하는데 참가자인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너 만약에 떨어져도 타티아나 두고 그냥 올 거야? 그렇게 하기만 해 봐. 공항에서 붙잡아선 도로 벨기에로 보낼 테니까.”
그 협박엔 나도 웃고 아나스타샤도 웃어 버렸다. 같이 간 우리가 같이 돌아오는 건 이 아이들에게 있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도 그랬다. 만약 내가 떨어진다 해도 아나스타샤가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간다면 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걸 직접 지켜볼 테니까.
원성의 목소리가 많자 아나스타샤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니?”
“우리 진심이야!”
“알았어. 진정해 다들.”
그러고도 친구들은 한참이나 아나스타샤를 몰아세웠다.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 그녀를 나무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도 평소 같았으면 한두 마디 들어 주다가 반격을 시작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듯 두 손을 다 늘어뜨리곤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렇게 아침 시간을 잡담으로 보내다 보니 금방 오전 스케줄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아, 수업 시작하겠다.”
“너흰 연습하러 가 봐. 빨리.”
이미 수업을 받지 않고 우리만 연습을 하러 빠지게 된 건 한참이나 된 일이라서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근래 들어 반 친구들과 보는 건 지금처럼 아침에 잠깐, 그리고 점심에 잠깐뿐이었다. 그래도 그 잠깐이 내겐 정말 중요했다.
친구들이 주는 응원과 에너지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활력소였으니까.
다른 참가자들은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모든 시간을 온전히 연습에 쏟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지금 주어진 내 준비 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난 책상을 정돈하고는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짧게 인사하자 모두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반을 빠져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가방을 어깨에 턱 걸쳐 맸다.
“농담 한 번 했다가 죽는 줄 알았어.”
“혼날 만한 농담이었어요, 아나스타샤.”
그렇지 않아도 한마디 해 두고 싶어서 난 그녀의 말을 다시 빌려 와 내밀었다.
“얼마 전에 그러셨잖아요? 더 위쪽을 보자고 말이에요.”
강한 연주자들이 잔뜩 있는 무대로 향하면서 우리는 시야를 넓게 하기로 했다. 바로 옆이나 아래를 보는 건 잠깐이면 족하다.
아나스타샤도 자신이 직접 말한 것을 금방 잊진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그런데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시면 쓰나요.”
“……응?”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아나스타샤가 반드시 세 무대 모두에 서겠다고 자신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어떤 대답이든 좋으니까 해 달라는 의미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맞아. 바른 소리 잔뜩 한 만큼 나도 지켜야지.”
늘 생각은 하고 있다며 아나스타샤는 이어 작게 중얼거리더니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 마. 내 음악이 약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바라는 건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음악을 보이고, 내가 거기에 최선을 다해 마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후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진 아직 잘 모르겠다. 단지 우리가 진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란 걸 알 뿐이다.
장소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무대로 정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고 한 걸음 나서거나 물러서면서 찾아낸 경계를 단적으로 현실화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나저나, 오후엔 뭐 해?”
“오후엔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이 있어요.”
“와, 오케스트라랑? 난 한 번 연습하는 것도 결국 일정에 맞는 곳을 못 구했는데. 어떻게 구했니?”
“저번에 도움을 받았던 곳과 어떻게 이야기가 잘되었네요…….”
오케스트라라는 대규모 음악가 집단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같이 연주회를 하는 것도 아닌, 콩쿠르에 나갈 피아노 연주자가 협주곡 리허설을 위해 잠깐 함께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리허설을 위해 돈이나 일정, 레퍼토리 등 현실적으로 맞춰야 할 조건이 굉장히 많다.
때문에 거의 모든 피아노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의 소리만 담긴 음반을 틀어 놓거나 오케스트라 파트 반주자의 도움을 받아 협주곡을 연습하곤 했다.
나도 지금까진 계속 그렇게 하다가 이번에 운이 좋아 기회를 잡은 것뿐이다.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나스타샤에게도 그 운을 조금 나누어 줄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기…… 혹시 그럼 같이 가시면 어떨까요? 상황이 맞진 않지만 제가 그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를 아는데 한 곡 정도는…….”
“에이,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마. 그건 민폐잖니. 그리고 그분들은 널 원하는 거지. 내가 아니라.”
“그거야…….”
아나스타샤도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을 음악으로 증명해 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다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그건 정말 오케스트라에겐 민폐고 아나스타샤에겐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손을 살랑거렸다.
“난 그렇지 않아도 레슨 때문에 바빠. 어째 난 콩쿠르가 가까워질수록 레슨 때문에 바쁜지 몰라?”
“마지막 순간까지 도와주고 싶으신 마음이겠죠?”
“그냥 내가 어설프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는데…….”
제자의 음악이 형태를 갖추고 완성도를 높여 갈수록 선생님들은 더 손대지 않으려고 하신다.
아예 다른 곡으로 넘어가서 지도를 하면 하지, 충실한 구조를 갖춘 곡은 연주자가 알아서 키워 나가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선생님들 나름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지도 선생님처럼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레슨을 봐주시는 분도 계신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약간 헷갈려 하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마음먹고 따라 보기로 한 것 같았다.
“아무튼! 각자 최선을 다하자, 우리.”
기세 좋은 그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하지만 각자란 단어는 묘하게 내 가슴에 꽂히는 부분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앞서 음악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마지막까지 그와는 각자 알아서 한 게 되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렇게 말문이 막히고 살짝 상처받는 기분을 느끼는 걸 보면 나도 마냥 무덤덤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참 곤란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에게 괜히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난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2시 40분. 난 차량을 타고 프리스넨스키구로 향했다.
평소엔 그냥 가로질러 가거나 아나스타샤의 집에 들리는 일뿐이라서 이곳을 돌아다닐 일은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용무가 있었다.
바로 고층 마천루들이 모여 있는 남부 비즈니스 중심가가 그 목적지였다.
“옛날 기억이 나십니까? 생일 파티를 하셨던 것.”
“예, 나요.”
몇 년 전에 여기서 가장 높은 페더레이션 타워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가 한 층을 통째로 빌리시는 바람에 깜짝 놀랐었지…….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일 때문에 이곳을 찾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비즈니스 중심가로 들어선 차량은 곧 그중 한 건물의 앞에 섰다.
소로킨이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난 빅토르와 자하르를 대동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내 이름을 이야기하자 바로 따라붙어 안내해 주었다.
약속은 31층의 비즈니스 룸으로 잡혀 있었다.
“음…….”
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복장을 다시 점검했다.
그냥 교복을 입고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적당히 포멀한 원피스를 입었는데 리허설 분위기에 어울릴진 모르겠다. 일단 가 봐야 알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직원은 복도 안쪽으로 날 안내했다. 따라가니 커다란 문이 몇 개나 보였다. 그중 하나를 직원이 노크하며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문을 열고는 날 안쪽으로 안내했는데, 안으로 한 발자국 채 딛기도 전에 누군가 튀어나와선 날 끌어안았다.
“타티아나! 오랜만이야!”
“아, 카밀레.”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인 카밀레 스반세이텐은 내 친척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날 친근하게 맞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