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3화
작년 여름, 협주 연습을 할 기회를 찾던 난 미하일 선생님의 주선으로 리빈스크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내 기억과 음악에 남아 있다.
카밀레는 나를 조금 더 강하게 포옹했다. 특히 그녀와 있었던 일은 조금 더 특별했다.
그녀의 딸인 달리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 위해 집에 가기도 했고, 거기서 그대로 하룻밤 잔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난 카밀레와 마주 안으며 웃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기쁘네요.”
그녀는 내 양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떼어 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말이! 우리 가끔 메시지를 하는 게 전부였잖아. 너란 애는 참, 요즘 애들답지 않게 SNS를 안 하니 소식 알기가 어렵다니까?”
“아하하, 죄송해요.”
“뭐, 그래도 뉴스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어서 답답하진 않았어.”
카밀레는 상관없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내게 몇 번이나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뉴스를 보면 바로바로 연락을 하는 것 같아서 난 그녀에게 감사함과 부채감이 조금 있었다.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난 다시 그녀와 살짝 포옹했다가 놓아주었다.
그녀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단원들도 많았다.
이 오케스트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악장, 요나스 비슈나이카스가 박수를 치며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받자 그는 약간 격식에 신경 쓰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로 예술가가 된 것을 축하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요나스. 여러분 덕분이에요.”
“우리가 뭘 했다고?”
그는 킥킥거리며 우스갯소리로 넘기려는 듯 말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공로 예술가로 인정받은 대외적 이유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한 협연, 그리고 가을 연주회를 성공시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끔 도와준 사람들이 아무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순 없다.
난 악수한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작년에 많이 배운 덕분에 그 후에도 잘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 보는 오케스트라와 이틀간 리허설을 한 귀중한 경험은 고스란히 내 자산이 되어 주었다.
그 덕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잘 대처하며 짧은 일정 안에 예술 감독 일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요나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자 그는 푸하하 하고 한차례 크게 웃더니 손을 놓으며 작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일부러 소리 내 웃었던 건 약간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지금 요나스의 목소리에선 약간 뿌듯해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그는 혼자만 이런 감정을 느낄 생각은 없다는 듯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도 네 덕분에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기량이 다들 좀 올라간 것 같아. 그간 피아니스트들이랑 몇 번 협연했었는데 피아니스트들의 평도 좋았고, 청중들 반응도 괜찮더라고.”
“리빈스크 오케스트라는 원래 훌륭했었어요.”
“뭐,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
겸허하게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또 이럴 땐 쿨하게 받아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환한 미소로 긍정하자 요나스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널 정말로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그래서 이번에 부탁하기도 했고……. 흔쾌히 들어줘서 고마워.”
“저야말로요.”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다시 연습을 할 수 있게 된 데엔 참 많은 우연이 따라 주었다.
연락을 받은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내용은 꽤 복잡하고 난감했다.
모스크바시의 초청으로 연주회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협연하기로 한 피아노 연주자의 해외 일정이 불가피하게 길어지는 바람에 리허설도 제때 못 하고 이곳에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붕 떠 버린 것이다.
연주회 자체는 좋은 기회여서 쉽게 취소할 수도 없었고, 여러 고민 끝에 오케스트라는 그냥 일정대로 기다렸다가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휘자 아르투르는 단지 오케스트라 연습만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실제 연주자가 올 때까지 피아노 파트를 맡아 연습을 도와 줄 연주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물론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원하는 피아노 연주자는 많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필요로 하는 피아노 협주곡은 딱 정해져 있었기에 곡을 어느 정도 완성된 형태로 바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을 원했다.
그런 사람을 짧은 시간 안에 바로 찾아내는 건 이 넓은 모스크바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조건에 부합했던 게 바로 나였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기로 했다는 협주곡의 이름을 듣자마자 난 깜짝 놀랐다.
바로 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연주하려고 연습하던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협주곡 중에서 양측이 연습을 필요로 하는 곡이 정확하게 일치할 확률은 단순히 생각해 봐도 정말 희박했다.
난 빙그레 웃으며 우리의 행운을 다시 한번 축하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전 무척 기뻐요.”
“이런 기회 잘 없지.”
요나스 역시 신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다른 단원들 사이에서도 떠들썩한 분위기가 일었다.
“운이 좋았어. 타티아나라면 믿을 만하지.”
“타티아나는 우리 연습을 도와주고, 우리는 타티아나의 연습을 도와주고. 정말 최고의 상황 아니야?”
당연히 제일 좋은 건 원래 무대에 설 피아노 연주자와 리허설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문제가 생겨서 그에 대한 대처로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인데도 최고의 상황이라 말해 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단원들 모두 의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들을 향해 다가가며 나도 그 뜨거운 열의에 발을 담갔다.
“저도 정말 운명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좋은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타티아나!”
앞서 인사한 카밀레와 요나스에 이어 다른 단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40명이 넘기에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오가는 대화 속에서 모두와 눈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인사를 마치고 보다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맨 앞에 있는 빈자리였다. 그 옆엔 요나스, 그리고 뒤쪽엔 카밀레가 앉았다.
그 후로도 계속 잡담이 오갔다. 리허설의 시작을 알릴 지휘자가 자리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르투르 지휘자님은요?”
“금방 오실 거야.”
요나스는 문 쪽을 대충 손짓하며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지휘자님은 그렇지 않아도 올해 너랑 같이 콘서트를 하고 싶어 하셨는데…… 이렇게 먼저 기회가 왔네.”
우연과 의지만 따라 준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뒤쪽에서 몇몇 단원들이 끼어들며 농담을 던졌다.
“콩쿠르 시작 전에 본 게 다행이지. 아마 끝나고 나면 저 애 앞으로 오케스트라들이 줄을 설 텐데.”
“앗, 설마 이번에 본 걸로 순번 밀리는 건가? 타티아나, 우리 번호표 다시 뽑아야 해?”
물론 콩쿠르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면 다른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 기회도 늘어나겠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콩쿠르의 결과를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 부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농담에 이런 생각부터 하니 친구들이 날 고지식하다고 하는 거겠지…….
하지만 결과가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바뀌지 않는다. 난 고개를 저으며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르투르 지휘자님과 했던 약속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작년에 공연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다시 채워 넣어야죠.”
다시 리빈스크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던 건 어떤 상황에서나 유효하다. 난 그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꼭 함께하도록 해요.”
“퀸 엘리자베스 우승한 다음에 바쁘다고 하면 안 된다?”
“아하하하.”
이어지는 농담에 난 밝게 웃기만 했다. 만약 우승을 하고 리빈스크로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
하지만 그런 미래를 떠올리는 내 머릿속이 마냥 들떠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우승한다는 것은 곧 아나스타샤나 임세연을 밀어내고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에 올라선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경쟁에 익숙한 내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질 일은 없었다. 그 누가 상대라 하더라도 난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대해선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
아나스타샤는 이번 콩쿠르에 많은 것을 걸고 날 마주하고 있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콩쿠르에서 많이 움직일 것이라고 난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세연은 나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정말 착하고 좋은 아이이지만…… 피아니즘의 근원에 대해선 누구보다 가장 닮아 있는, 날 추적하는 죄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결과가 나온 후에 홀가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고민에 빠지게 될 것 같았다.
‘그만…….’
내 우승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앞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다.
두 사람 역시, 그리고 70명이 넘는 참가자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거기에 최고의 모습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빠르게 생각을 전환했다. 깊고 어두운 무언가가 날 잠식하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오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 카밀레. 콩쿠르 하니 생각났는데, 달리아의 소식 들었어요.”
“어?”
“야로슬라블 청소년 콩쿠르에서 상을 받지 않았나요?”
미하일 선생님과 대화하다가 건너 들은 정보였다.
선생님은 내가 잠깐 스쳐 지나가듯 말한 달리아란 이름을 그냥 넘겨듣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다.
카밀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콩쿠르라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기쁜 일은 전해지기 마련이죠. 축하드려요.”
그녀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여덟 살인 아이가 무대에 선다는 것도 굉장한 일인데 상을 타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어려서 두각을 드러내는 건 기본적인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 노력의 가치를 중요시하며, 지금도 몸소 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능의 가치를 낮게 보는 건 절대 아니었다.
특히 기악 연주자들은 재능의 격차가 크게 두드러지곤 한다.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하단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리아의 수상은 충분히 축하할 만했다.
카밀레는 옅게 웃으며 내 축하에 답했다.
“정말 고마워, 타티아나.”
“달리아에게도 전하고 싶은데…… 통화할 수 있을까요?”
“통화보단…… 이따가 잠깐 보지 않을래?”
“예?”
“달리아도 여기 와 있거든.”
리빈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진 꽤 멀다. 난 조금 놀라서 카밀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히 한숨을 쉬더니 팔을 툭툭 쳤다.
“안드류스와 루타는 어머니에게 맡겨 놨는데 달리아는 연주회를 보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데리고 왔어.”
“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 이번에 음악학교 1학년이 되었으니 이제 자기도 음악가라면서 실황 연주회도 자주 봐야 공부가 된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데…… 내가 거기에 반박을 못 하겠더라. 선생님들도 허락해 주셨고.”
“후후, 너무 귀여워요.”
“귀엽긴 해.”
뒤편의 단원들 사이에서 달리아가 누굴 닮아 그리 똑 부러졌는지 모르겠단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런데 난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카밀레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연주회 없는 연습은 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거절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카밀레와 처음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지.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다.
난 기분이 좋아져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따가…… 연습 끝난 후에 봐도 될까요?”
“달리아가 정말 좋아할 거야.”
카밀레도 시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천천히 문이 열리며 우리가 기다리던 지휘자가 들어섰다.
“…….”
순식간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사이에서 난 먼저 일어나 아르투르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줘서 고맙습니다.”
짧은 인사말은 그저 말일 뿐. 우리가 음악가로서 주고받는 진짜 신뢰는 맞잡은 손을 통해 오갔다.
본격적인 특별 리허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