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4화
협연자도, 오케스트라도 각자 다른 무대를 목표로 하는데 한자리에서 같은 곡을 리허설하는 상황은 굉장히 드물다.
일반적으론 거의 벌어질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고할 만한 정보도 없고,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은지도 모른다.
그건 여기 있는 그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도 겁내지 않았다.
“오늘 어디까지 연주할 수 있습니까? 타티아나.”
“모든 악장 전부요.”
“준비를 잘하고 있군요.”
“물론이죠.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걸요.”
“좋습니다.”
“오늘 좋은 연습이 될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 분들도 전부 계시고, 컨디션도 좋아 보이시고요.”
“높은 리허설 참여율은 저희 오케스트라의 자랑이죠.”
아르투르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가 무엇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 슬쩍 떠본다.
총보를 펼쳐 놓고 자세하게 짚어 나갈 필요는 없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던 아르투르는 이러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일어서며 말했다.
“이야기는 이쯤 하고, 그럼 일단 한 번 맞춰 볼까요?”
“좋아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단원들 모두 악기를 들고 우르르 일어섰다. 그리곤 약속이라도 한 듯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음악이 있는 곳으로 가겠지 싶어서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대기하던 31층 비즈니스 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콘퍼런스 홀로 향하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니 어지간한 콘서트홀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앞 무대엔 이미 보면대 등이 세팅되어 있었다.
“아까 스피커 치워 달라고 했던 건 치워 줬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콘서트홀 같은데?”
단원들은 한마디씩 감상을 던지며 무대로 나아갔다.
나 역시 주위를 살피며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이 공간의 음향에 대한 부분이었다.
‘페달을 조금 더 깊게 써야 할 것 같네…….’
홀 또한 악기의 일부다.
눈으로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이 공간에 대한 파악은 금방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콘퍼런스나 세미나 등을 목적으로 한 곳이라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기엔 살짝 부족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좁디좁은 연습실에 빽빽하게 앉아서 연습하는 일도 많은데, 음향을 감안할 생각이 들 정도면 이미 충분하단 뜻이나 다름없었다.
아쉬운 부분은 실력으로 메우면 된다. 그 정도는 해내야 연주자로서의 몫을 해낼 수 있다.
“보시다시피 소리가 위쪽에서 튕겨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낮게 깔면서 가 보죠.”
빠르게 상태를 분석한 건 아르투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정확하지 않은 주문에도 단원들은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모두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라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 자리에, 나 역시 무대 맨 앞에 설치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풀 사이즈의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였다. 내가 평소에 자주 만지던 모델이라 무척 익숙하다.
때문에 일단 연주하면서 알아가도 될 테지만, 다른 연주자들도 모두 악기를 세팅하면서 소음을 내는 중이라 나도 짧게 인사 정도는 하기로 했다. 이 피아노와는 초면이니까.
“…….”
가볍게 건반을 흔들어 보며 해머가 어디서부터 내 힘을 받아 주는지 느껴 봤다.
그리고 페달을 살짝 밟았다 떼기도 하면서 댐퍼 소음이 어느 지점부터 나는지도 확인해 둔다.
내가 분명 건반도 만지고 페달도 밟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내고 있지 않자 요나스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피아노 고장 났어?”
“아하하, 아뇨.”
어떻게 이 피아노를 다루어야 할지 살짝 알아보는 데엔 일부러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자 요나스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 조율하게 소리 좀 내 줄래? 피아노에 정확하게 맞추고 싶어서.”
“아, 죄송해요…….”
지금 나 혼자 피아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내 왼쪽엔 40명이 넘는 연주자들이 나와 협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난 짧게 사과하고는 이번엔 제대로 소리를 내어 이 피아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좋은 피아노네.’
누구의 손을 탔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정말 좋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 소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난 다시 천천히 아르페지오를 짚어 가며 그것들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 사이사이 다른 악기들의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처음엔 음이 살짝 안 맞다가도 순식간에 맞춰 오기 시작한다.
피아노 협주곡 연주 시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의 음색에 맞추는 건 일반적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배려와 협력이 짙게 느껴진다.
거기에 응하듯 나 역시 조금 더 부드럽게 건반을 다루었다. 되도록 여러 음색을 표현하면서 내 스펙트럼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손을 놓자 사방의 소리가 뚝 멎었다.
음악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잠깐 동안 조율을 하고 악기들을 점검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음악가로서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거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강하게 결속시켰다.
“…….”
아르투르가 나지막이 말하자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지휘봉을 들어 올리자 모든 악기들이 준비되었고, 작게 휘두름과 동시에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그 위에 살짝 손을 뻗었다.
***
실제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리허설은 혼자선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해 준다.
뮤직 마이너스 원의 음반을 틀어 놓고 하는 연습으론 이 밀고 당기는 정교한 역학을 절대로 공부할 수 없다.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와도 같았고, 그 엄청난 사운드를 옆에서 직접 맞아 봐야 나 역시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선 필사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연주에 임해야 한다.
“……후.”
연주를 마치고 나니 호흡이 살짝 흐트러진다.
사전에 상세하게 맞춘 것도, 프레이즈별로 리허설을 짧게 해 본 것도 아니다.
나와 오케스트라가 시작한 리허설은 처음부터 완전한 실전을 가정하고 있었다.
첫 연습부터 한 번의 끊임도 없이 끝까지 연주했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1악장 초반부는 다시 하면 완벽할 것 같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 와중에도 난 방금 전 연주를 되새기며 어떻게 해야 조금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는지 계산했다.
옆에서도 깊게 숨을 쉬는 소리와 악보를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곡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아르투르가 깔끔하게 정리한다.
“좋았습니다. 첫 리허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우리 목표는 조금 더 멀리에 있으니까…… 일단 여기부터 봅시다. 1악장 총보 12페이지부터.”
듣기만 해도 대충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투르가 슬쩍 이쪽을 보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식 웃더니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바순은 조금 더 이불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플루트는 그렇게 귀신같이 울면 안 됩니다. 잠시 배경으로 스쳐지 나가는 구름처럼…… 그렇게 다시 해 봅시다.”
구간 연습이 시작되었다.
단 한 번 반복했을 뿐인데 훨씬 더 깔끔한 사운드가 나왔다. 아르투르의 정확한 지적과 단원들의 완벽한 교정이 정확하게 맞물려 떨어진 것이다.
전체 연습을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한 번 만에 베테랑 음악가들은 부족한 점들을 꿰뚫어 보고 빠르게 고쳐 나갔다.
나 역시 거기에 최대한 응하려 애쓰면서 내 연습으로도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가져갔다.
그렇게 구간 연습이 쉴 새 없이 반복되었고, 내 머리 역시 복잡해져 갔다.
“……이쯤 하죠.”
“으아.”
2시간쯤 리허설을 진행하자 우린 3악장 마지막까지 전부 짚고 구간 연습과 피드백을 마칠 수 있었다.
다들 피곤한지 신음을 내긴 했지만 이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중간에 잘되지 않아서 연습을 반복했다면 이보다 몇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모두의 실력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
나도 살짝 피곤한 팔을 살살 스트레칭하며 고개를 들었다. 힘들긴 했지만 이 2시간 사이 얻은 것들은 정말 값졌다.
다시 머릿속에 떠다니는 선율들을 잡아서 정돈하고 있는데, 아르투르가 날 휙 돌아보더니 말했다.
“덕분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타티아나.”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도 제대로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보인다. 난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내일도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내일까지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연습을 한다면 적어도 파이널에 올릴 협주곡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런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악보를 훑어본 아르투르는 그것을 덮고는 그 위에 지휘봉을 놓았다.
오케스트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담고 있는 지휘봉을 내려놓았다는 건 음악으로 모두를 엮는 건 여기까지란 의미였다.
“그럼 오늘 리허설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같은 시간에 뵙도록 하죠.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깔끔하게 마무리 인사를 한 아르투르는 무대 아래로 내려섰고, 여기저기서 다양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의자 끄는 소리, 악기를 정리하는 소리,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 등이었다.
“진짜 타티아나를 데려오길 잘했어!”
“다른 연주자랑 이런 식으로 연습했으면 절대 이만큼 못 했을걸?”
“첫 리허설에만 이틀 꼬박 걸렸겠지.”
“맞아.”
실제로 협연자와 오케스트라의 합이 잘 맞지 않으면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이 걸려도 버벅거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모두 그런 상황이 얼마나 악몽 같은지 잘 알고 있기에 지금 더더욱 안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내게 있어 단순한 칭찬과 찬사 정도가 아니었다.
다른 음악가와 유기적으로 이렇게 잘 협조할 수 있다는 건 나 역시 음악가로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난 밝게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내일 더 열심히 연습해 올게요.”
“대체 얼마나 더 잘하려고 그래? 지금도 충분히 잘하는데.”
“연습은 어디서 해? 학교에서 하는 거야?”
난 슬쩍 시계를 봤다. 이제 5시가 조금 넘었다. 학교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애매하다.
“오늘은 이만 집에서 하려고 해요.”
“아, 당연히 집에 연습실 있겠구나.”
단원들은 뭔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하게 호기심 서린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난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예민하게 살피던 중이라서 금방 그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잠깐 생각해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신중을 기해 요나스를 먼저 불렀다.
“저기, 요나스.”
“응?”
“혹시 오늘 괜찮다면 모두를 저녁에 초대하고 싶…….”
“사양할게.”
그러나 요나스는 내 조심스러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뭔가 그가 그렇게 대답하리란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라서 조금 움찔했다.
요나스는 날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우린 44명이나 돼. 물론 네 생각엔 감당 가능하겠다고 판단했으니 초대하겠단 말을 했겠지만, 그런 민폐는 우리 쪽에서 감당 못 해.”
“하지만 제가 리빈스크에 갔을 땐 카밀레가 재워 주셨는걸요.”
“그럼 카밀레만 초대하든지.”
“그건 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카밀레와 조금 더 친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집에 초대하는 것까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현실적으로 이 인원을 전부 초대하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집에 연락해서 준비한다고 해도 얼마나 빠듯할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할 텐데 갑자기 내 기분에 따라 멋대로 결정하는 건 정말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내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요나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가 갈 곳이 없다면 모를까, 모스크바시에서 제공하는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더한 걸 바랄 순 없겠지. 그래도 그런 말이라도 해 줘서 고마워.”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카밀레네랑 차나 한잔해. 그거면 충분할 테니까.”
마침 자신의 첼로를 챙긴 카밀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딸인 달리아를 직접 축하해 주기로 했던 건 잊지 않고 있었다. 난 함께 가자는 말을 전하기 위해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