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5화
살짝 떨어진 곳에서 카밀레가 첼로를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첼로를 챙겨 케이스에 넣고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좋았어.”
“저도요.”
성공적인 리허설 후에 주고받는 말에는 이전보다 훨씬 끈끈한 신뢰와 감격이 맺혀 있다.
카밀레는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긴장이 풀린 숨을 내쉬며 웃었다.
“이번 협주곡 정말 어려운 곡이었는데, 다 외우고 있지?”
“예, 그렇죠.”
“난 가끔 피아니스트들 보면 신기하더라. 어떻게 그걸 다 외우는 거야?”
다른 연주자들에게 가끔 듣는 질문이다. 아무래도 피아노 악보는 타 악기에 비해 조금 복잡해 보이니까.
난 암보에 대한 기술이나 노하우를 굳이 다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웃으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글쎄요? 익숙해져서 그렇죠.”
“그냥 기억력이 좋은 것 같기도……. 타티아나, 똑똑한 편이지 않아? 중앙음악학교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이야기로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칭찬을 듣는 건 조금 난처하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과 달리 카밀레는 부모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애는 악보를 외우는 걸 힘들어하고 있어서 걱정이야. 참…….”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괜히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달리아가 이제 막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고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것이나 기대하는 바가 많은 듯했다.
아무래도 날 모델로 하고 바라는 것 같은데…… 문제는 난 누군가의 모범이 되기엔 문제가 정말 많은 사람이란 점이었다.
성취나 내면 그 어떤 면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난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나처럼 살길 바란 적이 없었다.
가급적 카밀레가 나보다 더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길 바라면서 어물쩍 대답해 넘겼다.
“아하하, 저도 처음엔 잘 못 외웠어요. 아마 잘하게 될 거예요.”
“그러려나?”
카밀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난 빨리 덧붙였다.
“어쨌든, 달리아 만나게 해 준다고 하셨죠? 같이 가요.”
“응, 그러자.”
단원들과 다시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모두 각자 다른 용무가 있어서 저녁엔 어차피 따로 다닌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전 인원이 한 호텔에 머물고 있긴 했지만, 리허설 때만 한자리에 모이는 형식이었다.
난 카밀레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허리를 좌우로 스트레칭했다.
“햐, 날씨 좋네.”
“그러게요.”
“벌써 4월이야.”
벌써란 말에 공감이 많이 간다. 정말 피아노 연습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는 것이 체감될 정도다.
나도 카밀레를 따라 허리춤을 손으로 짚고 앞뒤로 돌려 가며 잠깐 운동을 했다. 카밀레는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날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가자. 잠깐 걸으면 돼.”
오케스트라는 다 같이 버스로 이동해 왔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 먼 곳이라면 빅토르에게 부탁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카밀레는 그리 멀지 않다며 손짓했다.
난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달리아는 어디에 있나요? 호텔에?”
“아니, 아무리 다 자란 척해도 여덟 살짜리를 혼자 호텔에 두면 불안해서 안 돼. 근처에 레슨 겸 맡겨 놨어.”
“근처에요?”
“응. 그네신 음악원 다니는 대학생인데 아주 어린애도 가르칠 수 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 뒀더라고. 부탁 좀 했지.”
러시아엔 유명한 음악원들이 많고,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더 어린 학생을 개인 레슨하기도 한다.
생활비도 충당하고 교수법도 수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거기에 더불어 맡아야 할 학생이 많이 어리다면 베이비시터의 업무도 함께하는 것 같다.
데리고 있으면서 레슨도 하고, 필요하다면 몇 시간 정도 봐 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보수도 좋을 테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 때는 음악원 학생 신분으로 레슨하려면…… 어휴, 말도 마.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진짜…….”
카밀레는 옛날 음악원생과 요즘 음악원생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결론은 세상이 좋아져서 카밀레처럼 아이를 키워야 하는 사람들도 편해졌다는 것 같다. 난 그냥 웃기만 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걷던 난 길가에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다양한 물건들을 파는 가게였다.
마침 잘되었다 생각하며 난 카밀레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선물 좀 살게요.”
“선물은 무슨 선물!?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음, 뭐가 좋을까요.”
카밀레는 작은 콩쿠르였고, 달리아도 어리니까 신경 쓰지 말라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난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달리아를 만나서 직접 축하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아무것도 없이 그냥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메트로놈 같은 걸 주면 싫어할지도.’
물론 달리아가 앞으로 피아노를 연습하려면 메트로놈도 잘 쓸 줄 알아야겠지만…… 연습을 해 본 나는 안다.
지쳐 쓰러질 정도로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메트로놈의 짤각거리는 소리가 노이로제를 일으키는 악마의 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는걸.
예전에 에르네스트에게도 메트로놈을 준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연주자였으니까 괜찮았을 뿐이다.
달리아에게 준 선물이 그녀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계속 그냥 가도 된다며 날 설득하려 하는 카밀레를 보면서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괜찮은 걸 떠올렸다.
“혹시 집에선 아직 디지털 피아노로 연습하나요?”
“응? 응…….”
“헤드폰도 그대로 쓰고요?”
“그렇지.”
“그럼 헤드폰으로 할게요. 그래도 될까요? 카밀레.”
연거푸 사양하는 카밀레의 의견은 듣지 않고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밀레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헤드폰 정도라면 그렇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서 어쩌지. 난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후후, 왜 해 주신 것이 없나요? 재워 주시기까지 했었는데.”
“그게 뭐라고…….”
카밀레는 괜히 중얼거리면서 첼로 가방을 이리 들었다 저리 들었다 했다. 기쁘면서도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이럴 땐 아예 빨리 내가 확실히 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난 바로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금방 사 올게요.”
가게 안엔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엔 달리아에게 선물하면 좋아할 것 같은 장난감 등도 있었지만, 콩쿠르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건네는 선물이니 제대로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해 두었던 헤드폰으로 하기로 했다.
직원에게 물어 헤드폰들이 있는 곳을 찾았고, 거기서 되도록 가벼우면서도 음질이 좋은 모델을 골랐다.
난 헤드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예전에 한승우에게 선물해 주었던 브랜드여서 믿고 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포장까지 깔끔하게 해서 들고나오니 카밀레가 괜히 핀잔을 주듯 말했다.
“뭘 포장까지 했니?”
“선물인데 포장을 해야죠.”
아무리 어린아이에게 하는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난 대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물인 헤드폰을 들고 난 카밀레를 따라 몇 블록 정도를 더 걸었다. 프리스넨스키구의 커다란 빌딩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아파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밀레는 이곳 지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계속 확인하며 앞장섰다.
다행히 길을 헤매는 일 없이 목적지인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린 그 아파트를 2층으로 올라갔다.
카밀레가 현관을 살짝 노크하며 말했다.
“달리아 엄마예요.”
“아, 어머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대답이 이어졌다.
잠시 기다리자 현관문이 열리고, 마치 포탄처럼 안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카밀레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달리아는 그대로 카밀레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꽉 껴안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카밀레는 그런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었어?”
“응!”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내게도 똑같았다. 그리고 현관 근처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흐뭇하게 모녀를 지켜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든 카밀레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리허설이 일찍 끝나서요.”
“잘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뒤에 계신 분은 그럼 같은 단원이신…….”
그제야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더니 갑자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달리아도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카밀레 뒤편으로 시선을 향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번엔 카밀레를 두고 폴짝 뛰어 빠져나와 내게 달려왔다.
“와! 타티아나 선생님!”
“잘 지냈나요? 달리아.”
난 무릎을 굽혀 달리아를 안아 주었다.
이 작은 아이가 말하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그냥 흘려듣기엔 내 마음에 굉장히 무겁게 꽂히는 느낌이 있었다.
테크닉적 기술이나 이론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아는 그보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의미로 날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내 입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혼자서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앞에서 어리둥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잠깐만, 제가 알기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아직 중앙음악학교 학생인…….”
“아하하, 맞아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난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러고는 정말 가볍게, 약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예전에 달리아를 가르친 적이 있어서요.”
“아…….”
정식으로 선생님이 되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아이가 날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란 걸 그녀는 금방 이해했다.
이내 달리아는 잔뜩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카밀레에게 돌아갔고, 그제야 난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이미 내 이름도, 학교도 알고 있는 그녀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그, 아. 평소 텔레비전에서 잘 보고 있어요. 전 알피나라고 해요. 그네신 음악원 피아노 학과 2학년이죠.”
“타티아나예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음악원에 다니신다면 제 선배이기도 하신데.”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니 알피나는 갑자기 독특한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엑, 그네신에 오려고요!?”
“같은 음악계에 있는 선배란 의미로 한 말이에요. 그런데 그네신에 가면 안 되나요?”
“어지간하면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가요!”
손사래까지 치는 그녀를 보며 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학교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대학생의 고충이라고 봐야 했다.
아마 모스크바 음악원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지 않을까?
어쨌든 인사를 마치고 나서 카밀레는 지갑을 꺼내 알피나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이제 달리아를 데리고 나가면 되는 차례였다.
그런데 계속 머뭇거리던 알피나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제안했다.
“저기! 두 분 혹시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않으실래요? 아직 계약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는데.”
“어머, 그치만 그런 실례…….”
“아뇨! 전혀 실례가 아니에요! 저도 아직 학생이라 듣고 싶은 것도 있고 그래서……. 아, 달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면서 알피나는 뒷걸음질까지 치며 현관에서 비켜 안쪽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조금 일찍 오긴 했지만 굳이 차 대접까지 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음악가로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고 그냥 가 버리는 건 너무 매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
카밀레는 어떠냐는 듯 살짝 눈빛을 보내왔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근처에 있는 카페 같은 곳에 갈 생각이었으니 이런 초대를 받은 건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알피나.”
알피나는 정말 행복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나를 움직이게 하는 큰 동기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