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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16화 (1,016/1,277)

##  1016화

다른 사람의 집에 이렇게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어서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알피나가 워낙 친절하게 맞이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슬리퍼를 내어 주고는 물었다.

“잠시만요. 주전자에 물 좀 올릴게요. 두 분 차는 어떻게 드릴까요?”

“홍차면 충분해요.”

“전 디카페인으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까다롭게 굴지 말고 홍차 한 잔 정도는 그냥 마셔도 큰 문제 없겠지만, 되도록 난 평상시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알피나가 마침 디카페인 차도 있다며 주방으로 향했고, 그녀를 잠시 기다리는 사이 난 카밀레와 달리아와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 꾸며 놓은 집은 아니었다. 딱 봐도 선물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화분 몇 개와 구석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있을 뿐이었다.

가구도 별로 없고 텔레비전도 없었다. 알피나는 그네신 음악원의 대학생이라고 했으니 아마 자취하면서 되도록 가볍게 지내는 것 같았다.

카밀레와 나란히 소파에 앉자 달리아는 지금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가를 비비더니 카밀레에게 가서 칭얼거렸다.

“왜 먼저 말 안 해 줬어요? 타티아나 선생님이랑 연주회 한다고.”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이 워낙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었기에 카밀레는 모스크바에 같이 온 딸에게도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야 협연자에게 트러블이 생겼고, 오케스트라 리허설만 내가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달리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달리아는 아직 오케스트라와 연주자가 어떻게 연주회를 꾸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알아챈 듯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달리아가 물었다.

“그냥 연습만요?”

“저번에도 그랬는걸요.”

“아쉽다…….”

달리아는 1년 전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슬쩍 들더니 중얼거리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 타티아나 선생님이 연주회 하는 거 직접 보고 싶었는데…….”

이제 연주자이니 연주회도 봐야 한다면서 어머니를 따라 나올 정도로 달리아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니 같은 피아노 연주자인 내가 무대에서 어떻게 연주를 하는지 직접 보고 싶어 할 만도 했다.

카밀레가 살살 달래듯 말했다.

“다음 달에 큰 콩쿠르에 나간다고 하니까 그때 보면 되지.”

“그것도 텔레비전으로 봐야 하잖아.”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아마 텔레비전으로 송출된 연주는 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콩쿠르 무대에 달리아를 초대할 순 없었다.

근처에서 하는 거라면 모를까, 벨기에에서 한 달이나 되는 일정이니 부담이 너무 크다. 아마 카밀레가 제일 곤란할 테지.

난 적당히 달리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주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저도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 달리아.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면서요?”

“그렇긴 한데요…….”

“……?”

“다른 애들이 다 못 해서 받은 거 같은데…….”

아마 겸손하게 답하려고 고른 말 같은데, 그냥 들으면 혼자만 잘해서 받았다고 들리기도 했다.

옆에서 카밀레는 어떻게 지적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마를 감쌌다. 난 달리아가 귀엽기도 하고 카밀레가 재미있기도 해서 웃었다.

어쨌든 이 흐름의 수습은 내가 해야 했다.

“후후, 그럴 땐 하나만 생각하세요. 자신의 연주에 만족했나요?”

“음…….”

카밀레의 무릎 앞에 앉은 채로 달리아는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내 앞에 그 손을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손가락은 엄지를 제외한 네 개만 펼쳐져 있었다.

“4점이요.”

“5점 중에서요?”

“네.”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했네요. 상을 받기에 충분해요.”

달리아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난 지금 그녀가 그렇게 판단했다는 점을 굉장히 높게 샀다.

스스로 무대 평가를 하고 만족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달리아가 자신감 있고 균형 잡힌 좋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연주자로서 무대에 설 일이 자주 있을 텐데, 어려서부터 이렇게 잘 해낸다면 앞으로 미래가 정말 기대된다.

난 환하게 웃으며 옆에 두었던 선물을 달리아에게 건넸다.

“그런 의미에서…… 자, 달리아.”

“저 주시는 거예요!?”

“마음에 들진 모르겠네요.”

내가 무언가 들고 들어온 건 봤는데 설마 자기에게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달리아는 깜짝 놀라더니 카밀레부터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심스레 내 손에서 포장된 상자를 받아 갔다.

지금 열어 봐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조마조마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물을 보고 달리아가 실망한 표정을 보인다면 정말 가슴 아플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아까 봤던 장난감 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긴장되는 순간, 달리아가 포장을 뜯자마자 그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기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와, 헤드폰!”

“집에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조금 더 편할 거예요.”

“집에 있는 건 왼쪽이 안 들려요!”

달리아는 마침 딱 필요했던 물건이었다는 듯 상자를 껴안았다.

난 그저 하나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골랐을 뿐인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카밀레조차 그건 처음 알았다는 듯 달리아에게 물었다.

“고장 났다고? 달리아. 그거 왜 엄마한테 이야기 안 했니?”

“오른쪽으로 들으면 되니까.”

“그래도 말은 했어야지…….”

달리아가 정말로 한쪽밖에 나오지 않는 헤드셋을 고장 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달리아가 레슨을 중간에 끊고 레슨비를 반만 받아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여러모로 생각도 깊고 어머니를 잘 생각해 주는 아이였다.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달리아는 한 점 어두운 기색 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마침 필요한 물건이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선생님이란 말은 아직도 날 고민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달리아가 이렇게 기뻐한다면 뭐든 좋을 것 같았다.

선물인 헤드폰을 놓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곧 호스트인 알피나가 우리를 불렀다.

“차 드시러 오세요.”

집에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 보여서 그렇지 거실도 넓고 주방도 깨끗했다. 프리스넨스키구에 있기도 하고…… 정말 좋은 아파트였다.

난 지금 집에서 통학하고 있지만…… 만약 내후년쯤 음악원에 들어간다면 자취를 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오빠가 허락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아마도 이런 아파트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떻게 구한 집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라 생각해서 삼갔다.

난 지금 정말 우연히 초대받아 잠깐 차를 대접받는 것뿐이었다.

알피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자, 타티아나. 디카페인 차예요. 저도 맛은 잘 모르겠지만…… 바레니예랑 같이 드시면 괜찮겠죠?”

“감사합니다.”

난 예의 바르게 답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향기를 맡아 보니 루이보스인 것 같았다.

잠시 그 향을 음미하다가 살짝 입술을 적셨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날 보고 있던 알피나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타티아나, 진짜 미안한데요.”

“예?”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지금 그대로.”

차가 어떠냐고 묻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타이밍이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난 이제 다른 사람의 피사체가 되는 일엔 꽤 익숙해져서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괜찮긴 한데…… 어디에 올리실 건가요?”

“올리다뇨? 절대로 안 올려요.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요?”

“……?”

그간 사진 요청을 많이 받아 봤어도 보통 SNS에 올려도 되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지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서 조금 놀랐다.

찻잔을 든 채로 눈만 들어 알피나를 바라보니 그녀가 황망해했다.

그때,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밀레가 피식 웃더니 끼어들었다.

“아예 두 분이 찍지 그래요? 내가 찍어 줄게요.”

“그, 그, 그래도 되나요?”

“타티아나가 괜찮다고 하면요.”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은 두 사람이 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도 약간 어색하긴 했다.

알피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카밀레가 이렇게 중재해 주니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았다.

난 거기에 편승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알피나.”

그러자 주저하던 알피나는 내 옆으로 오더니 평생 사진을 처음 찍어 보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채로 슬그머니 섰다.

카밀레가 몇 번 농담을 던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연스러운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설마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사진 찍자고 한 건가 싶기도 했는데,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알피나가 애초에 우릴 집에 초대하지도 않았을 테다.

그리고 지금 사진을 확인하면서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아마 걱정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조금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카밀레는 사진에서 그치지 않고 내친김에 원하는 만큼 해 보자는 듯 말했다.

“혹시 타티아나가 낸 음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게, 있긴 한데…….”

“그럼 사인도 받아요.”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들이밀며 덧붙였다.

“분명 나중에 프리미엄 붙을걸요?”

“절대, 절대로 안 팔아요!!”

“아하하핫, 들었어, 타티아나? 안심하고 해 줘도 되겠다.”

크게 소리까지 친 알피나는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그래도 곧장 방으로 들어가더니 정말로 내 음반을 가지고 나왔다.

사실 나도 굉장히 부끄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피해 버리면 나중에 서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난 알피나의 요청에 응했다.

“감사합니다……. 평생 간직할게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나서도 뭔가 서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난 일단 목을 축이고 다른 이야기라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달리아가 불쑥 말했다.

“타티아나 선생님, 지금도 엄청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거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나면 정말정말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네요?”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난 아직 음악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열일곱 살일 뿐이다.

물론 국제 콩쿠르 우승이란 커리어가 붙는다면 그땐 확실히 유명해졌다고 해도 될 정도의 주목을 받겠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애초에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글쎄요.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유명해지면 좋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알피나에게 초대받은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도 나쁘진 않았다.

되레 이 잠깐의 순간이 알피나에게 유의미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난 콩쿠르 우승이란 결과에 따라올 여러 혜택이나 유명세 같은 것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일단 눈은 우승을 향하고 있긴 한데 정작 손은 위로 뻗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

여긴 내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약한 소리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난 싱긋 웃으며 일반론을 꺼냈다.

“그보다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자신의 연주에 만족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요. 그건 저에게도 적용된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내 말을 듣고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자신이 이해한 바를 다시 이야기했다.

“그럼 타티아나 선생님에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거겠네요?”

항상 버릇처럼 되뇌던 말이라서 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최선을 다한 것과 후회가 없는 것이 콩쿠르가 끝난 후에도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만약 최선을 다했는데도 후회하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연주자로서 처음으로 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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