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7화
알피나는 여전히 눈앞에 놓인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재잘거리는 달리아와 그 이야기를 들어 주며 차를 마시는 타티아나의 모습은 마치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장면처럼 느껴졌다.
초면에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부탁했던 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친절했다.
카밀레가 옆에서 장난을 치며 도와주긴 했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팬 서비스를 다 해 준 것이다.
“…….”
타티아나가 사인을 해서 돌려준 음반을 내려다보면서 알피나는 이 음반을 처음 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피나는 타티아나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큰 연주회를 하기도 하고,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그게 알피나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피나는 그네신 음악원의 학생으로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힘든 학과 생활은 물론이고 연주회든 콩쿠르든 뭐든지 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강하게 그녀를 몰아세웠고, 한편으론 그간 쌓여 온 스트레스와 피로도가 신체의 컨디션과 정신을 무너뜨리기 시작해서 반쯤 슬럼프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기였다.
그때 별생각 없이 우연히 구매한 이 음반이 알피나를 그 슬럼프에서 빼내 주었다.
‘아직도 이만한 건 못 찾았어.’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세 곡 중 첫 번째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4번, 테레제.
그 곡은 예전에 알피나가 한 번 다루어 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연주회에 가지고 올라가기엔 조금 애매해서 무대에서 연주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베토벤 소나타 중 연주할 수 있는 곡으로 레퍼토리에 넣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타티아나의 테레제를 들어 본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알피나는 자신이 그간 굉장히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세계적인 음악원인 그네신에 들어와선 레퍼토리를 늘리는 데에 급급했고, 음악의 완성도는 항상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넘어가곤 했다.
자신이 그 정도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태도가 알피나를 슬럼프로 착실하게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알피나는 그 뒤 일주일 내내 다른 모든 걸 내팽개치고 베토벤 소나타만 연습했다.
하루에 못해도 12시간은 피아노를 붙잡았고, 그 결과 알피나는 이전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음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
그저 음반 하나를 듣고 떠올린 바를 실행했을 뿐인데 그것이 알피나에게 가져와 준 결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피나에게 있어서 타티아나는 그냥 숱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 아니었다.
물론 나이도 한참이나 어리고 아직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란 건 알지만, 그런 걸 따져서 문화부에서 공로 예술가 훈장을 줬던가? 실력 있는 음악가에게 나이 같은 건 의미가 없다.
알피나는 이미 타티아나의 음악에 반해 버린 후였다.
그래서 요즘 활동을 하지 않고 콩쿠르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직접 보고 실황 연주를 듣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마치 기적처럼 타티아나가 직접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게 무슨 행운이지?’
물론 알피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상황은 아니다.
타티아나는 카밀레의 친구로 잠깐 따라왔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어떠한 이끌림을 느끼며 알피나는 타티아나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
그런데 달리아와 한창 이야기하던 중 타티아나가 갑자기 말을 뚝 멈추고는 찻잔을 든 채로 굳었다.
물론 잠깐뿐이었고,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짓긴 했지만 잠깐 사이 얼굴에 스쳐 지나간 그 고뇌의 흔적을 알피나는 놓치지 않았다.
‘대체…….’
마지막에 무슨 대화가 있었지? 알피나는 빠르게 다시 떠올려 보았으나 별로 특별한 말이 오갔던 건 아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큰 무대에 오르는 타티아나가 만약 우승을 하게 된다면 그 후엔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였고, 달리아는 한껏 들떠선 타티아나가 보다 유명세를 얻은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대해선 알피나도 적극 응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런 기대를 받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음악을 구사하긴 하지만, 그래도 타티아나는 아직 열일곱 살로 국제 콩쿠르엔 첫 출전이다.
그런 그녀가 아무 부담감도 느끼지 못하고 능숙하게 준비하리라 기대하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었다. 되도록 그 이야기는 삼가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다음 이야기들은 괜찮지 않았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타티아나는 콩쿠르에 대한 내용은 적당히 받아쳤다. 그런데 막상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냐는 말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거야말로 별문제 없이 그냥 받을 수 있는 말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그에 맞는 결과가 따라온다.
그런 말은 여러 선생님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반론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니까. 타티아나도 심심치 않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대충 답해도 달리아를 설득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그 대답을 틀어막는 듯 보였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알피나는 모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알피나는 국제 콩쿠르에 나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무책임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은 쉽지만 막상 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게 현실이죠.”
그렇게 운을 떼자 멍하니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투명한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갑자기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알피나를 보자마자 아무 관계도 아닌데 같은 음악계에 있다고 선배라고 불러 주기까지 했다. 지금은 거기에 조금이나마 부응할 때다.
“전 최선을 다한 다음에도 결과가 안 좋으면 엄청나게 무거운 후회가 느껴지더라고요. 아, 그 곡에 시간 쏟지 말걸. 뭐 하러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지? 차라리 이 콩쿠르는 그냥 참가하지 말고 넘길걸…….”
“…….”
“막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고, 그런 느낌 있잖아요.”
세상 여러 일이 그렇겠지만 연주자의 일은 특히 투자 대비 리턴의 비율이 극도로 낮다.
3분 연주를 위해 30시간 연습하는 건 예사고, 300시간을 쏟아부어도 무대에서 단 3초만 삐끗하면 모든 게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린다.
아무도 그 앞에 있는 300시간을 봐 주지 않는다.
때문에 허무함을 느낄 때도 많았다.
최선을 다하여 결과에 관계 없이 스스로에게 만족하란 건 어떻게 보면 자기 최면이나 다름없는 말이기도 했다.
알피나의 말에 공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웃긴 건지 타티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알피나는 찻잔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해 보기도 했어요. 노력을 최소화하면서 요령 있게 살 순 없을까 해서요.”
“그 결과는요?”
“당연히 훨씬 더 많은 후회를 했죠.”
물론 요령이 좋아서 잘 사는 사람도 있긴 할 테지만 일단 알피나는 아니었다.
“연주자로 사는 게 참 어렵죠.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니 남 탓을 할 것도 없고, 내 적극적인 바람으로 해야 하는 일인데……. 차라리 상금이나 명성을 쫓으면 머리 아플 일도 없을 텐데 말이죠? 어설프게 복잡한 걸 바라면 이렇게 머리가 아파요.”
타티아나가 왜 갑자기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침묵해 버렸는지 알피나는 모른다.
그래서 지금 하는 말들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타티아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설프게 복잡하다는 말 마음에 드네요.”
“타티아나도 그런가요?”
“아마도요.”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타티아나가 약간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알피나는 조금 더 자신감을 얻으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기왕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김에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최선을 다했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복잡한 바람이 있다는 건 그만큼 기대치가 높다는 뜻일 테니까.”
“…….”
타티아나는 말없이 물끄러미 알피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열변을 토하던 알피나는 정신을 차렸다.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네.’
시작은 타티아나의 상황에 이입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째 하다 보니 신세 한탄을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학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나오게 된 걸까.
이제 음악원 2학년에 불과한 알피나는 자신이 약간 할머니같이 된 것 같다고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람…….”
“멋있었어요! 알피나 선생님!”
달리아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박수까지 쳤다. 이런 걸 멋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카밀레 보기가 겁이 났다.
그런데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던 타티아나도 이윽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이번 콩쿠르를 마치고 나면 알피나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너무 두루뭉술한 질문이었지만 콩쿠르에 얽힌 압박감에 대해서라면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물론이죠. 타티아나라면 훨씬 더 잘할걸요?”
“후후,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는 타티아나는 또다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이미 자신이 이 아이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알피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었으면 할 정도로 좋은 티타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차는 식고 해는 진다.
“그럼 슬슬 일어날까……?”
카밀레가 먼저 의자를 뒤로 끌며 이야기했다.
마음 같아선 자고 가도 좋다고 권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일이었다.
지금 이 정도만 하더라도 알피나에겐 충분히 사치스러운 하루였다.
살짝 아쉬울 즈음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며 알피나도 일어서려 할 때였다.
“엄마, 호텔엔 피아노 없죠?”
“응? 그런데.”
“그럼 저 10분만 더 레슨받고 가면 안 돼요?”
달리아가 부탁이라면서 카밀레를 졸랐다.
알피나가 카밀레에게 부탁받은 건 3시간 동안 달리아를 레슨하고 돌봐 주는 일이었다.
카밀레가 조금 일찍 오는 바람에 차를 마시고도 아직 시간이 남긴 했지만,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엄마를 따라갈 터였다.
시계를 확인한 카밀레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알피나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게 좋았어?”
“그게 아니라, 아까 레슨 받다 말고 엄마가 와서 중간에 그만했거든요.”
“…….”
달리아는 음악에 상당히 진지한 아이였다.
적어도 배우던 건 제대로 끝마무리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카밀레는 물론이고 알피나도 헛웃음을 흘렸다.
여덟 살 된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그걸 무시할 어른은 없었다.
“그럼 아까 하던 거 마저 하러 갈까? 달리아.”
“네!”
밝게 웃으며 달리아는 피아노 앞으로 향했고, 그 뒤로 세 명의 음악가들이 따랐다.
직전까지 가르쳐 주던 건 바로 표현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보통 어린아이들에겐 테크닉을 위주로 가르치긴 하는데, 달리아의 음악적 이해력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욕심히 나서 알피나는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하면…… 어때? 소리가 다르지?”
“저도 해 볼래요.”
건반과 페달을 조합해서 음악적 표현력을 달리하는 건 아주 기초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알피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 중 한 소절을 따서 조금씩 다르게 연주하며 얼마나 큰 차이로 느껴지는지 몸소 실천하여 가르쳐 주었다.
“…….”
그 레슨 모습을 카밀레와 타티아나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둘 다 굉장히 뛰어난 음악가이기 때문에 알피나는 약간 긴장감과 고취됨을 동시에 느꼈다.
다시 한번 시범 연주를 마친 알피나는 고개를 돌리며 제안했다.
“여기 저만 선생님인 건 아니었죠? 타티아나, 달리아에게 연주자에 따른 음악성의 변화를 한 번 보여 주는 건 어때요?”
“아, 저는…….”
타티아나는 곤혹스러워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타티아나는 겸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런 자리에선 반사적으로 사양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피나가 권하고 달리아가 거의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천천히 다가온 타티아나는 알피나가 비켜 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슬쩍 건반을 스치는가 싶더니 손을 푸는 것도 없이 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알피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