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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18화 (1,018/1,277)

##  1018화

카밀레는 타티아나의 피아노 실력을 가까이에서 보았기에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약간 자부심마저 있었는데, 왜냐하면 타티아나가 완성된 음악을 펼치는 것만 들은 것이 아니라 리허설을 함께하면서 불완전한 자신을 가다듬어 나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차르트 소나타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그 수준을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타티아나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의 강점은 정말 여러 부분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또래 그 누구와 비견해도 격을 달리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자신만의 색채감이 확실한 데다가 머리도 비상해서 금방 배우고 익혔다.

그런 천재적인 요소들이 카밀레가 파악한 타티아나의 강점들이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결정적으로 임기응변에 아주 능한 부분이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타티아나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반드시 연주를 성공해 냈다.

단순히 주변을 무시하고 오로지 피아노에만 집중해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주변을 면밀히 파악하고는 그 상황에 녹아들듯 적응해 필요한 연주를 완벽하게 구현해 낼 줄 알았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

타티아나는 이 모차르트 소나타를 암보하지 않고 있다.

대체 머릿속에 몇 곡이나 넣고 있는진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레퍼토리가 넓고 방대한 그녀였지만,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세상 모든 곡들을 다 외울 수는 없다.

과거에 한 번 연주해 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주 연주하는 곡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연주해 본 기억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타티아나의 눈은 악보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어 내림과 동시에 과거로부터 해당하는 음악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 음악을 피아노를 통해 방 전체에 뿌렸다.

‘거의 완벽한 사운드야…….’

단지 정확하게 건반을 누르는 것뿐만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공간 전체를 악기로 사용할 줄 알았다.

좁은 아파트와 업라이트 피아노도 타티아나의 솜씨를 조금도 깎아 먹지 못했다.

그녀는 이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곤 적절하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해 가장 완벽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전에 몇 번 연습할 때도 장소와 피아노에 따라 터치와 페달링을 달리하며 정확하게 음색을 맞추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본 타티아나의 실력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뛰어났다.

‘저 나이에 어쿠스틱에 대한 이해력이 이 정도로 높을 수 있나 싶지만…… 타티아나니까.’

어떻게 몇 번 연습해 보지도 않고 즉각 연주를 하면서도 이 정도로 연주하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감탄만 연발하며 카밀레는 타티아나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옆을 보니 알피나와 달리아 역시 피아노의 신을 영접한 사람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너무 큰 격차를 느끼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까지 했다. 카밀레는 그런 압도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능한 모든 실력을 보이고 있는 타티아나가 조금 살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지만 그녀가 음악을 대충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밀레는 감탄과 걱정이 반쯤 섞인 기묘한 마음으로 옆을 살피며 타티아나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다행히 연주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음악이 멈춰도 아무도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로는 이 정도로 할 수 있겠네요.”

이곳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던 그녀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자 그제야 해방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르게 들려요!”

달리아가 잔뜩 흥분한 채로 외쳤다. 진귀한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그 반응을 보며 카밀레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신과 같은 연주를 보고 혹시나 기가 죽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달리아는 되레 더더욱 몰입하며 흥미를 가지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타티아나에게 피아노에 앉기를 종용했던 알피나도 말했다.

“있잖아요, 타티아나.”

“예?”

“콘서트홀에서 그랜드 피아노로 쳤으면 이보다 음량을 더 쓸 생각이었어요?”

조금 더 깊게 들어오는 전문적인 질문이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큰 홀을 울리기 위한 큰 피아노엔 강렬한 피아니즘이 따라붙는다.

실력이 안 된다면 애초에 그 장소를 울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대답은 그 상식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었다.

“아뇨, 더 줄였을걸요.”

“왜죠?”

“모차르트 소나타니까요.”

도무지 대답같이 들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모두가 침묵했다. 그중 누구도 되묻거나 의아한 표정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농담을 하거나 대충 말하고 있는 게 아니란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소리를 정제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다. 그리고 모차르트 소나타의 정수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만약 보다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정교하게 음을 가다듬어선 훨씬 완벽하게 모차르트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흩뿌릴 터다.

잠깐 오간 질문과 답변이었지만 알피나는 그것만으로도 깨달은 것이 많은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네요…….”

“제 대답이 조금 부족한가요?”

“아뇨! 다른 그 어떤 대답보다 완벽했어요!”

그리고 다시 기운차게 돌아온 그 목소리에선 굉장한 의욕이 느껴졌다.

알피나는 당장 피아노 앞에 앉아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 내고 싶어 하는 피아니스트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카밀레는 웃으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의 무자비한 연주가 어떠한 폭력처럼 두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애초에 그럴 만한 그릇들이었다면 타티아나는 연주를 삼갔을 것이다.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자신의 힘으로 삼을 수 있는 음악가들이라고 믿고 있기에 타티아나는 자신의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애초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레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 달리아 차례예요.”

“예? 저 아까 했는데요!?”

“다시 해 보셔야 공부가 되죠. 어서요.”

엄청난 연주를 마주하고 들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어서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담력이 센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손짓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피아노 앞에 앉은 달리아는 울상이 되어선 부탁했다.

“저 지금 너무 긴장해서…… 조금만 이따가 하면 안 돼요?”

달리아는 막무가내로 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불쌍하게 부탁하면 정말 안 들어주기 어려웠다. 카밀레는 몇 번이나 딸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잘 아는 카밀레는 타티아나도 아마 봐주지 않곤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여린 심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더니 가차 없이 말했다.

“긴장하신 그대로 하시는 게 좋아요. 진짜 실력은 바로 그럴 때 나오는 것이랍니다.”

웃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엄격할 줄은 몰랐다. 평소 상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달리아는 다시 거부하지 않았다. 가만히 타티아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타티아나가 다음 순번으로 자신을 앉혀서 일부러 잔뜩 압박을 주고 연주를 망치게 할 요량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신했는지 달리아는 천천히 건반을 짚었다.

“……!”

달리아의 모차르트 소나타가 어떤지 카밀레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또래에 비해선 잘하는 편이었지만 알피나의 연주에 비하면 표현력도 어설프고 음악적 완결성이 떨어지는 연주였다.

하지만 타티아나 다음으로 다시 연주에 나선 달리아의 실력은 갑자기 확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많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 주관이 담긴 음악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 공간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달리아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쿠스틱에 대한 감을 잡는다는 건 정말 많은 공부와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앞서 거의 완벽한 시범을 보인 덕분에 달리아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 중요성과 실마리를 잡아챈 듯 보였다.

아직은 해내기에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지만 그걸 이렇게 어려서부터 깨닫고 염두에 둔다면 장차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

딸의 재능을 확인하는 건 정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카밀레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간신히 참으며 달리아가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모차르트 소나타를 표현해 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연주를 마친 달리아는 손을 떼자마자 탄성을 지르며 휙 돌아보았다.

“와……!”

“잘했어, 달리아!”

결국 카밀레도 참지 못하고 달리아를 껴안았다.

옆에 선생님들이 보고 있는데 이러는 건 너무 경망스럽단 생각도 순간 들긴 했지만 지금 카밀레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달리아는 기분 좋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안겨 있더니 살짝 떨어져선 타티아나에게 선언했다.

“5점이에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까 타티아나와 이야기했던 자신의 만족도에 대한 점수였다.

5점 만점에 5점. 물론 콩쿠르 점수를 매기듯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직 개선해야 할 곳이 많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달리아는 지금 최선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타티아나도 기쁜 듯 박수를 쳤다.

“저는 500점 드릴게요.”

갑자기 백 배가 넘는 점수가 주어졌다. 달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음악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타티아나가 이렇게 호평한 것은 그녀가 지금 콩쿠르 심사 위원의 입장이 아니라 레슨하는 선생님의 입장으로 달리아를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 모차르트 소나타를 시연한 것을 듣고 달리아는 정확하게 필요한 포인트들을 집어내 연주했다.

그 예민함과 재능, 그리고 긴장했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집중한 것에 대해 타티아나는 굉장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

타티아나는 엄격한 만큼 칭찬도 후한 선생님이었다.

그래도 500점은 너무 높지 않나 싶었는데 카밀레에 앞서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알피나가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푸흐흐…….”

“……?”

“아니, 갑자기 그런 점수를 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죠. 그렇다면 전 달리아에게 9만 점 줄게요.”

알피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어떻게 봐도 농담이었는데 타티아나는 묘한 승부 의식이 생겼는지 말꼬리를 물었다.

“그럼 제가 박하게 매긴 것 같잖아요. 가중치를 줘서 50만 점으로 바꿀게요.”

“그럼 전 9백만.”

“점수 인플레이션이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결국 타티아나가 항복했고, 달리아는 백만이라는 단위가 이해가 안 가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지금 달리아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카밀레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른으로서 진지하게 한마디 해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다.

“알피나 선생님, 타티아나 선생님. 저희 딸에게 후하게 점수를 주시는 건 좋지만…… 그거 아시죠? 심사 때 자기 학생에겐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것.”

실제 콩쿠르는 아니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겠지만, 달리아를 보고 있던 두 선생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깨달았는지 웃었다.

“왜 그런 규칙이 있는지 새삼 알겠네요.”

“그러게요…….”

그 사이에서 달리아는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 싶었는지 불안한 눈을 했지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타티아나와 알피나는 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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