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19화 (1,019/1,277)

##  1019화

내가 오기 전에 알피나가 달리아에게 어떤 레슨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 그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별로 없었다.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하지만 알피나가 권유하기도 했고, 그녀의 보조로 필요한 만큼만 적절한 예시가 되어 주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주해 본 지 좀 오래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였지만 그 음악만큼은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연주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어려운 건 지금 알피나가 가르치고 있는 표현력에 대한 차이를 어떻게 보여 주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돼.’

다행히 달리아는 귀가 밝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내가 즉석에서 한 연주가 피아노와 방, 건반 컨트롤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듣고는 자신의 음악에 도입하려 했다.

빠른 피드백이었고, 어설플지언정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귀에 들리도록 한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재능 있는 아이를 앞에 두자 아까 알피나와 대화하며 들었던 복잡했던 생각이 조금 진정되며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달리아라면 훗날 정말 굉장한 연주자가 되리라 기대할 만했다.

달리아가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고 잔뜩 칭찬을 받자 카밀레도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나와 알피나가 바로 옆에 있으니 약간 더 욕심이 난 듯한 눈빛도 슬쩍 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시계를 다시 확인하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만 가 볼게요. 너무 오래 실례했네요.”

계속 있겠다고 하면 아마 알피나는 방까지 내어 줄지도 모른다.

난 그녀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이미 표정만 봐도 절대 거부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카밀레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이쯤에서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알피나 역시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기며 이야기했다.

“아…… 괜찮은데. 음, 뭐 놓고 가시는 거 없죠?”

우리 물건을 챙겨 주는 알피나를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그냥 달리아를 데리고 갈 거라 생각하고 온지라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있다가 갈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사 왔을 텐데…….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알피나는 눈을 마주치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녀도 원하는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긴 했으니 아마 그걸 선물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하다.

갈 때가 되었다는 걸 알자 달리아의 태도가 살짝 바뀌었다.

달리아는 여덟 살답지 않은 예의 바름으로 알피나에게 인사했다. 정말 정중한 인사였다.

“오늘 레슨 감사했습니다, 알피나 선생님.”

“나도 달리아랑 만나서 너무 기뻤어.”

“정말 좋았어요. 리빈스크에 가서도 열심히…….”

그런데 그 어른스런 태도는 얼마 못 가 무너졌다. 갑자기 우울한 표정으로 달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알피나가 당황해서 물었다.

“왜 그러니?”

“오늘 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좋은 시간은 계속되지 않는다. 언젠가 끝났다가 다시 시작될 뿐이다.

바로 나와 다시 만난 것이 좋은 예시였다. 세상은 좁고, 음악가들의 세계는 더더욱 좁다.

약간의 행운만 도와준다면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기까지 시간이 반년이 훌쩍 넘게 흘렀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직 어린 달리아는 이런 이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밀레는 왜 갑자기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내일 또 보면 되는데?”

“?”

달리아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고, 카밀레는 그제야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는 크게 웃었다.

“달리아, 엄마가 여기 일주일 넘게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랬었…… 설마!”

“그 설마란다. 매일은 안 될지 몰라도 일단 내일은 리허설이 있으니까.”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카밀레가 일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은 달리아를 봐 줄 사람이 계속 필요했다.

상황을 이해한 달리아는 다시 들뜬 모습으로 카밀레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말? 나 내일도 레슨받을 수 있어?”

“알피나 선생님이 시간이 되신다면.”

시간이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카밀레와 달리아는 알피나를 원했고, 그녀 역시 이 요청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또 맡겨 주신다면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럼 같은 시간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내일 레슨 일정도 순식간에 잡혔다. 달리아는 정말 안도했는지 크게 한숨을 쉬는 시늉까지 해 가며 말했다.

“저번에 타티아나 선생님도 한 번만 해 주시고 가셔서…… 이번에도 한 번뿐인 특별 레슨인 줄 알았어…….”

“그랬어?”

“응…….”

중얼거리며 달리아는 이쪽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두 번째 레슨이라기엔 짧았지만 어쩐지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 보인다.

***

차에서 내리며 내 경호원들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그럼 오늘도 오후 2시 30분 즈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돌아섰다.

4월이 깊어 가며 풍경이 조금씩 더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앞서 온 어린 학생들이 저마다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며 등교 중이었다.

그중엔 달리아처럼 어린 학생도 있었다. 가만 보고 있자니 어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

알피나의 아파트에서 내려온 후, 난 근처 카페에서 카밀레 모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주제는 못 본 사이 무슨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였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달리아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달리아는 내가 연주회를 하거나 훈장을 받고 음반을 낸 것이 너무나 특별한 일이라서 자신의 일은 별것 아니라며 말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학교에 갈까 고민하다가 음악학교를 선택하고, 처음으로 지도 선생님을 만나서 레슨을 받고, 과제 곡에 허덕이다가 울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콩쿠르에 나가 상까지 받아 온 모든 것이 달리아가 처음 겪는 특별한 일이었다.

나 역시 모든 게 처음이었던 때가 있었다.

건강도 엉망이고 손도 약해서 다시 쌓아 올리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땐 상당히 심각했었다.

피아노를 치다가 손이 저려서 끙끙거렸던 이야기를 했더니 달리아는 못 믿겠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물었으나 곧 점점 더 열의에 찬 눈빛이 되어 갔다.

‘마음 같아선…….’

그런 달리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고 싶다. 선생님이라 불리며 레슨이라 할 것까진 안 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만으로 덜컥 약속할 순 없었다.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달리아를 맡은 건 알피나이고, 리빈스크에선 다니는 음악학교의 지도 선생님이 계신다는 점이다.

앞서 책임감을 가지고 달리아를 지도하고 있는 음악가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오늘 어쩌다 보니 피아노 앞에 앉긴 했지만, 기술적인 부분만 보여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카밀레에게 감사해야지.’

중간에 달리아가 내게 레슨을 요청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카밀레가 절묘하게 끼어들어선 딱 잘라 냈다.

오늘은 특수한 경우고, 앞으론 굉장히 바쁠 테니 이렇게 느긋하게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알피나가 있으니 이미 충분하기도 했고.

달리아는 약간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래도 떼를 쓰진 않고 받아들여 주었다.

“……후후.”

귀엽게 볼을 부풀리던 달리아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젠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런데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 타티아나.”

“안녕.”

반으로 들어서며 인사하니 몇몇 아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 쪽을 바라보고는 급히 산만하게 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난 문가에 멈춰 섰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모두 일부러 모른 척한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어제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쇼팽 콩쿠르 참가자들이 아침에 떠나자 모두가 응원하고 행운을 빌어 주느라 시끌벅적했었고, 거기엔 나도 자연스레 끼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있었던 다른 일이라곤 오전 연습을 하고 오후에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한 게 전부였다.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은 난 일부러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으며 눈치를 보다가 근처에 있는 라리사를 표적으로 삼았다.

“저기, 라리사.”

“응?”

“혹시 네일 파일 있으면 잠깐만 빌려주실래요? 아침에 방에서 쓰고는 그냥 두고 왔나 봐요.”

“아, 네일 파일? 빌려줄게.”

괜히 손톱이 신경 쓰인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검지부터 차례로 만지작거리고 있자 라리사가 곧 네일 파일을 빌려주었다.

손톱 관리는 피아노 연주자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난 매일 깔끔하게 손톱 정리를 하고 다니는지라 지금 굳이 더 다듬을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손톱을 다듬는 척했다.

화장지를 한 장 깔고 손톱을 문지르면서 고개만 들자 라리사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자연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뭔가 조용하네요. 혹시 수업 중에 쪽지 시험이라도 예고되어 있나요?”

“어…… 예고된 건 없긴 한데, 글쎄.”

“있을 수도 있는 건가요?”

“모르겠어…….”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대놓고 뭐가 문제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난 한 번 더 에둘러 말했다.

“쪽지 시험을 친다면 저만 안 치니까 뭔가 미안하네요. 모두 열심히 공부 중인데.”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타티아나 넌 이미 시험 다 쳤잖아.”

“간이 시험이었는걸요.”

“네가 지금 당장 시험을 제대로 쳐도 우리 반에선 제일 잘 볼걸? 반 애들 모두가 알아.”

고개를 돌리니 나와 라리사의 대화에 신경을 쓰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다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살짝 찝찝한 기분으로 난 건성으로 문지르고 있던 네일 파일을 다시 라리사에게 돌려주고는 스마트폰으로 뉴스 등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음악 관련 저널에선 드디어 시작되는 쇼팽 콩쿠르 예선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은 우리 학교의 네 명 정도였다.

다시 일정표를 확인하니 옐브루스 선배와 비탈리 선배는 내일. 그리고 바르바라가 며칠 뒤인 13일, 발렌티나가 예선 종료 하루 전인 18일이었다.

빠르게 뉴스들을 휙휙 넘겨 보고 있자니 아나스타샤도 도착했다.

“얘들아, 안녕.”

“일찍 왔네.”

“안녕,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의 인사에도 친구들의 반응은 약간 어색했다. 그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나스타샤도 어리둥절해하더니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좋은 아침, 타티아나.”

“예, 좋은 아침이에요.”

“다들 공부하느라 바쁘네. 오늘 쪽지 시험이라도 있나?”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 버릴 뻔했다. 어떻게 생각의 흐름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지?

하지만 라리사가 그건 아니라고 했고, 나도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더니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대충 앉아 있다가 연습이나 하러 가야겠다는 태도였다. 그 마이페이스적인 태도에선 언제나 배울 점이 참 많다.

“우린 연습하러 가자.”

“예.”

수업 전 아침 시간이 끝나간다. 난 아나스타샤와 교실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쓰는 연습실은 각각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조금만 가면 중간에 헤어져서 따로 가야 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나는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잠깐 이야기라도 더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

뒤에서 부른다면 돌아봐 줄 테지만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근래 들어 서로 다루는 곡이 다르고 연습도 따로 하는 편이다 보니 음악을 두고 이야기할 것도 없었고…….

갑자기 이러다가 에르네스트를 그냥 보냈다는 게 생각났다. 지금도 비슷했다. 난 그녀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 외롭다.

물론 콩쿠르를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각이 복잡해지는 건 나약함의 발로에 가까웠다.

아나스타샤도, 세연도 약한 나는 바라지 않겠지.

난 앞서 걷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얼마 가지 않아 짧게 인사하고는 그녀와 헤어지고 혼자 연습실로 향했다.

“앗, 타티아나 선배님!”

“안나.”

한 살 어린 9학년 후배 안나가 날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2년 전부터 날 잘 따르곤 했다.

“어디 가세요? 연습실?”

“예. 오전 연습해야죠.”

“진짜 연습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요. 존경해요!”

안나를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면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분들이 하는 만큼인걸요. 아나스타샤나 지금 폴란드에 가 계신 네 명도 그럴 테죠.”

“폴란드…… 아! 쇼팽 콩쿠르요?”

그거야말로 지금 가장 쉽게 화두에 올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안나는 갑자기 중요한 일이라는 듯 내게 조금 더 바짝 다가오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그 소식 들으셨어요? 거기 가신 분들 지금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거요.”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에 무척 당황한 내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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