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20화 (1,020/1,277)

##  1020화

쇼팽 콩쿠르는 본선부터 교통비와 숙식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예선은 참가자들이 모든 것을 알아서 예약하고 처리해야 한다.

때문에 폴란드로 출발한 네 명은 모두 같은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도 같은 호텔로 잡았다.

혼자서 준비하는 것보단 훨씬 수월하다며 발렌티나가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난다.

모두가 국제 콩쿠르의 최하 나이선에 간신히 걸쳐 있는 10대 학생들이고, 같은 학교이기도 하니까 먼 폴란드에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기대처럼 잘하는 것 같았고.

경쟁은 무대에서 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분위기가 안 좋다는 말이 나오니 약간 나쁜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안나.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아, 처음 들으셨구나. 약간 안 좋은 소식이긴 해요…….”

안나는 마음이 편치 않은지 살짝 주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도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것이라 한다.

“어제 선배 네 분이 같은 비행기 타셨잖아요? 그런데 공항에서도 좀 늦어졌고,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까지 택시로 이동했는데 언어 문제가 있었는지 길을 헤매는 바람에 꽤 늦어 버렸나 봐요.”

“늦었다고요!?”

어제 발렌티나와 전화했을 땐 그런 말 없었는데?

시간을 아침부터 꽤 넉넉하게 잡고 갔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문제 생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외국이다 보니 여러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닥쳤나 보다.

콩쿠르 첫날부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체력도 많이 빠지고 멘털도 크게 흔들린다. 걱정스러워졌다.

안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접수는 잘했는데…… 11학년 선배 두 분이 책임을 놓고 다투었다고 하네요.”

예선이 열리는 홀에서 하는 접수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하면 어떻게든 융통성 있게 받아 줄만 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접수를 했다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상관없죠. 그런데 계기는 사소해도…… 왜, 그렇잖아요. 예민한 상황에서 말이 나오다 보면 험해질 수 있는 거.”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대형 국제 콩쿠르를 앞두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상태에서 처음 가는 외국. 다른 보호자는 없고 열여덟 살 두 명이 책임자처럼 움직여야만 한다.

모든 것이 문제없이 잘 풀려도 긴장감에 피곤할 만한데 트러블이 겹쳐서 예정 시간에 늦기까지 했다면 확실히 크게 다툴 만도 했다.

책임 소재가 확실하다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두 선배가 아마 비슷하게 의견을 냈을 테니까…….

“그렇게 다투고 나선 꽤 심각한 분위기인 것 같…… 헙.”

나름대로 그곳의 상황을 예측해 보고 있는데, 안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겁하듯 놀랐다.

안나는 솔직한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성격이었다. 입을 가리고 있어도 그녀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뒤늦게 안나는 자책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미쳤지. 이런 이야기를 왜 했지?”

“……안나만 해 줬어요. 반 친구들은 제가 오니까 아무 말도 않더라고요. 아마 알고 있었겠죠.”

“친구분들이 똑똑하신 거죠! 전 바보 멍청이라서 다 이야기한 거고요!”

안나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반 친구들이 나와 아나스타샤 앞에서 대화를 피하고 눈치를 보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몇 주 뒤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는 내 앞에서 이런 안 좋은 이야기를 하면 괜히 부정이라도 탈까 봐 입을 꾹 다문 거겠지.

발렌티나도 딱히 알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니까 그냥 이대로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안나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생각하는지 횡설수설하더니 결국 수습할 수 없음을 깨닫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무튼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난 안나가 곤란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되었을 정도로 큰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난 대신 수습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딱히 걱정은 안 해요. 네 명이 합심해야 하는 연주회도 아니고 각자 하는 경연이잖아요?”

“그것도 그렇죠. 뭐…… 다 경쟁자이니까.”

“그러니 예선엔 문제없을 거예요.”

틀린 말을 한 것 같진 않다. 난 앞서 네 사람 각각의 기량을 미리 본 적도 있으니까. 무대에서 망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안나가 내게 거꾸로 물었다.

“정말 문제없는 거예요?”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해서 죄송해요.”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 했으면서 바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안나는 어수선하게 팔을 흔들었다.

“저도 수업 들어가 볼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연습 잘하세요!”

“고마워요, 안나.”

“뭘요.”

그다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구두 소리도 멀어져 갈 때쯤, 난 홀로 복도에 남아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

지금 발렌티나에게 전화해서 뭐라고 할 건데? 선배들 때문에 분위기 안 좋지 않냐고? 괜찮냐고?

아마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알아서 잘 풀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교성도 좋고 눈치도 빠르니까…… 아마 선배 둘이 싸우더라도 잘 말리고 화해시켰겠지.

그래도 안 좋다는 소식이 지금 교내에 돈다는 건 조금 의아했지만, 아마 어제 이야기가 뒤늦게 퍼진 게 아닐까 싶었다.

“괜찮겠지.”

중얼거리며 난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지금 내 옆엔 아무도 없다. 에르네스트는 어디론가 떠났고, 발렌티나도 폴란드로, 아나스타샤와는 거리감이 분명하다.

물론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카밀레와 달리아라는 인연도 있었다.

음악을 함께할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가슴속 어딘가에 불안한 먹구름이 끼어 있는 기분을 느꼈다.

‘오후 리허설이 있으니까…… 준비해야지.’

오늘 오전엔 나 혼자 하는 독주곡이 아니라 협주곡을 연습해서 어제 했던 것들을 다시 되새기고 완벽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오케스트라에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잘할 수 있었다.

그 일념만으로 난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로 먹구름을 몰아낼 방법은 모르겠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도 의연하게 연습실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관철하는 것뿐이었다.

***

넉넉하게 시간에 맞춰 난 프리스넨스키구로 이동했다. 장소는 어제 리허설을 했던 건물이었다.

똑같이 안내를 받아 비즈니스 룸에 도착하니 몇몇 단원들이 날 맞이했다.

스무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빨리 온 모양이다.

“어서 와,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단원들과 인사하며 내 자리로 향했다. 카밀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팔랑였다.

“오늘은 일찍 왔네? 요나스도 없고……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카밀레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되죠.”

“아하하. 그럴까, 우리?”

그녀는 아예 의자를 내 쪽으로 더 바짝 붙이고는 몸도 이쪽으로 기울였다.

우린 연습을 공유하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로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사적인 측면으로도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카밀레가 친근하게 이야기했다.

“달리아가 어제 정말 좋아하더라. 고마워.”

“기뻐해서 다행이에요.”

“헤드폰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저녁엔 연습실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 대서 결국 같이 가서 나도 연습했지 뭐니?”

“정말인가요?”

“응. 각자 연습실 빌려서 우리 애는 피아노, 나는 첼로. 웃기지?”

아마 어머니로선 한 연습실에 들어가서 달리아를 지켜보고 싶었겠지. 실제로 우리 학교만 하더라도 레슨 같은 걸 할 때 참관하는 어머님들이 많다.

하지만 음악가인 카밀레는 딸과 같은 시간에 연습하는 것을 택했다.

그녀는 약간 이상하지 않냐며 내게 물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달리아만 혼자 연습한 게 아니라 카밀레도 함께해서…… 아마 달리아는 더더욱 열심히 연습했겠죠? 멋지다고 생각해요.”

“음…… 뭐, 그건 나도 어차피 연습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달리아가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달리아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고 연습에도 열정적인 건 어머니인 카밀레가 몸소 모범이 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카밀레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본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난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저도 계속 연습했어요. 오늘 협주곡에서 나아진 부분을 보여 드려야…… 할 테니까요.”

“음, 그건 걱정이 안 되는데.”

농담처럼 히죽 웃으며 말하던 카밀레의 입가에선 어느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예?”

난 당황해서 되물었다. 지금 그냥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지 않았나?

카밀레는 다른 단원들이 듣지 못하도록 가까이에서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했다.

“뜬금없긴 한데…… 어제 우리 애가 그러더라고. 네가 약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레슨해 달라고 조르지 못했다고.”

달리아는 단지 음악을 듣는 귀만 민감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눈도 상당히 예민했다.

어제 난 달리아를 보면서 되도록 어려운 것들은 잊고 좋은 시간만 보내려 했었는데, 그럼에도 달리아는 내가 내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카밀레도 어렴풋하던 추측에 확신을 얻었는지 덧붙여 말했다.

“사실 나도 어제 네가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그다음엔 약간 그런 걸 느꼈거든. 알피나와 이야기할 때도 조금 우울해 보였고.”

“…….”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잘못 본 거라고 그저 잡아뗄 순 없었다.

내 실수였다. 내색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면 확실하게 해야 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허점을 찔려 말문이 막혔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그걸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에너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난 고민해선 안 될 부분을 쉽게 놓지 못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걱정되는 이야기를 들은 바람에 내 우울함은 더더욱 커져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시선을 내리자 카밀레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걸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 그런데 힘들다면 무리해서 이렇게 연습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솔직히 우리 오케스트라가 조금 멋대로 하고 있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이 연습과는 관계없어요.”

난 곧장 고개를 들고 반박했다. 문제는 내 안에 있다. 오케스트라나 카밀레가 문제인 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바라보자 카밀레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다시 한번 내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야. 지금 네가 전체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의 총량이 수용 가능한 수준이냐는 거지.”

콩쿠르가 다가오면서 내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 하나뿐이라면 충분히 견딜 만했다. 하지만 내 신경은 분산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를 이해한다고 말했으면서도 마음속으론 이해하지 못했던 답답함과 불만, 아나스타샤를 더 알고 싶지만 매듭짓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아 이후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

임세연이 음악가로서 완성되어 날 뛰어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게 단지 일방적인 속죄의 감정으로 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의문.

켜켜이 쌓이는 여러 모순과 스트레스는 내 신경에 각각 작용하지 않는다. 모두 한데 다발로 묶여선 이따금 정신을 후려친다.

“…….”

그럴 때마다 난 생각 자체를 아예 꺼 버리듯 대응하고 있었다. 지금까진 할 만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다.

“괜찮아요.”

“정말?”

“예. 그리고 전 스트레스에 강한 편이라서요.”

지금까지 내가 겪어 온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건 버틸 만했다.

물론 그땐 친구들이 항상 옆에서 도와주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나름 강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카밀레는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건 자랑할 만한 게 아니야, 타티아나.”

“…….”

“아니다, 괜한 참견일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알겠지?”

카밀레의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그녀는 굳이 내 속내까지 파고들지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지켜봐 주는 어른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시선은 날 외면하지 않는다.

나는 감사를 담아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리고 이미 충분히 도움을 받고 있어요. 제가 어제 달리아와 카밀레를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세요?”

“응? 그, 그래?”

“정말이에요.”

그녀는 약간 당황스러워했지만, 난 약간의 과장도 없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