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1화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리허설은 어제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콘퍼런스 홀을 빌려선 다시 처음부터 곡을 연주했고, 몇 번의 구간 반복을 거치면서 세세하게 다듬어 나갔다.
시간도 비슷하게 2시간 정도 집중해서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모두의 집중력을 극한까지 몰아세우며 음악의 수준을 끌어 올린 뒤, 아르투르는 지휘봉을 내리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툭 하고 끊어진다.
여기저기에 한숨과 삐걱거리는 소음 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르투르는 좌중을 둘러보며 웃었다.
“기대 이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좋은 결과를 이루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잘 따라 줘서 고맙습니다.”
여기저기서 단원들의 화답이 잇따랐다. 진지한 감사와 장난스러운 농담 등이 뒤섞여 있었다. 아르투르는 꽤 인망이 두터운 지휘자였다.
이 오케스트라가 이틀 사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나 역시 제대로 체감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조각나 있는 부분들이 느껴졌다면, 오늘은 정말로 한 악기처럼 동시에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그 틈으로 스며들기가 더더욱 편했다.
오늘 리허설했던 것들을 다시 조금 생각해 보고 있는데, 아르투르가 내게 직접 물었다.
“타티아나는 어떻습니까?”
“저…… 말인가요?”
“곡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지 않았습니까.”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곡으로 연습하고 있지만 난 이들과 함께 가지 않는다.
모르는 장소에서 모르는 오케스트라와 다시 한번 곡을 새로 정립해야만 했다.
그러나 난 그게 별로 두렵지 않았다. 이미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 오케스트라와 한 번 쌓은 경험들은 그대로 남아 내 음악을 단단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다른 그 어떤 오케스트라와 다시 마주하더라도 그들이 내 음악의 형태를 본다면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봐 줄 터였다.
그건 내가 정말 제대로 된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난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다행이군요.”
아르투르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지 다시 내게 확인한 것으로 조금이나마 안심한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오케스트라만 잔뜩 연습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르투르는 그래도 모자라다는 듯 이어 말했다.
“이 템포라면 내일은 각자 준비로 충분하고…… 저희 측 연주자가 돌아오기 하루 전인 사흘 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맞춰 보는 건 어떻습니까? 타티아나만 괜찮다면 그날은 되도록 저희가 타티아나에게 맞춰 드리고 싶습니다.”
이 오케스트라가 다시 전적으로 내 연습에 도움을 준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지만, 이들도 모스크바에 연주회를 위해 온 상황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사흘 후라면 정말 연주회를 코앞에 둔 상황이다.
단지 리허설이 필요한 거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비중을 내게 옮길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앗, 괜찮아요. 전 여러분이 연주회에 전력을 다하시길 바라요.”
“그걸 위한 수순이기도 합니다.”
아르투르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보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미소였다.
“그렇다면…… 지휘자님 말씀대로 해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이야기가 잘 끝나자 아르투르는 담백하게 모두에게 지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만 해산.”
그 말이 끝나자 단원들이 무대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었다. 그래서 저마다 내게 인사를 건네는 걸 잊지 않았다.
“고생했어! 타티아나.”
“오늘도 너무 멋졌어. 우리 정말 언제 연주회 해?”
모두 한층 더 친근해진 기분이 든다. 난 앉은 채로 모두의 인사에 가볍게 답해 주었다.
바이올린을 다 챙겨 넣은 요나스도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
“예, 요나스.”
그다음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꽤 많은 단원이 차례대로 내려가고, 카밀레도 첼로를 들고 일어섰다. 그때까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나도 살짝 일어섰다.
“카밀레, 오늘도 달리아는 알피나에게 맡기셨나요?”
“응.”
어제 약속했던 대로였다.
난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가선 다시 두 사람을 보고 달리아를 데려오는 것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밀레는 이미 그런 내 생각까지 다 읽고는 거기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도 같이 가서 차 한잔하자고 하고 싶어.”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그러면 분명 우리 애가 떼를 쓸 거야.”
달리아가 내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건 안다. 내 사정을 헤아리기에 참고 있지만, 자주 얼굴을 비춘다면 분명 이야기를 하겠지.
사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되레 달리아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조금 개운해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써도 괜찮은걸요.”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까 오늘은 되도록 집에 빨리 들어가서 쉬도록 해. 그게 좋겠어.”
그러나 카밀레의 태도는 확고했다. 진통제가 필요해도 이런 곳에서 찾지 말란 투였다.
약간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난 연주자로서 잔뼈가 굵은 카밀레가 지금 이러는 것도 전부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조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적당히 선을 그어 주는 것도 분명 내게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거리가 멀어진 사람이 늘어난 기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서운하다고 할 순 없었다. 난 이성을 되찾고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타티아나.”
마지막으로 카밀레와 인사하고 난 무대를 걸어 내려왔다. 홀 밖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차가운 눈밭을 걷는 듯했다.
***
오전 연습을 마친 나는 이 음악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세계의 강자들은 물론이고, 아나스타샤와 임세연도 전력으로 상대해야 할 경쟁자들이었다.
그 애들은 최선을 다해 날 꺾으려 할 테니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겠지. 지금까진 그런 믿음만으로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그 믿음이 정말 믿을 만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내가 이렇게 고민이 많아진 만큼 그 애들도 고민하는 게 아닐까. 결국 이런 우리 사이의 관계가 모두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기만 한 건 아닐까.
“…….”
불식간에 찾아든 그 의문은 내 머리를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건반을 내리침으로써 그런 생각을 짓눌러 버렸다.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방해라고 느껴질수록 내 음악은 점점 더 견고해졌다.
음악마저 느슨해지면 정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아마 그 두려움에 휘말려 그야말로 처참하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콩쿠르나 연주회 직전에 그렇게 망가지는 연주자는 생각 이상으로 정말 많다.
그러나 다행히 난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무대를 준비한 경험이 꽤 많았고, 덕분에 지금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우.”
그 애들은 나와 다르길 바란다. 적어도 이런 불안에 시달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 애들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
등교해서도 반 분위기는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친구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만 안다. 난 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두 선배가 얼마나 다투었는지, 그래서 네 사람의 분위기가 어떤 상황인지 알 방법은 없지만…… 멘털이 흔들릴 정도로 상황이 별로라 하더라도 난 네 사람이 제 실력을 낼 정도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아마 예선만 끝나고 긴장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금방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그건 아마 크게 어렵지 않겠지. 그런 희망을 가지고 난 연습실로 향했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연습하다 보니 11시경이 되었다.
“……지금쯤 하겠지?”
잠시 연습을 멈추고 난 스마트폰으로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홈페이지에선 모든 예선 경연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예선은 오전, 저녁 타임으로 각각 3시간씩 나누어서 치러지며 한 타임에 예닐곱 명의 연주자가 출전하게 된다.
오전 경연은 10시부터 시작인데, 폴란드와의 시차를 고려한다면 11시에 보면 된다.
예선은 어제도 있었지만 그걸 보지 않고 오늘 처음으로 보기로 한 것은, 바로 옐브루스 선배가 오늘 오전 첫 순서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에 딱 맞췄는지 이제 막 연주자 소개가 나오고 있었다.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마트폰 볼륨을 조금 더 올리고는 조용히 집중했다.
“…….”
박수 소리와 환호, 그리고 낯익은 남자 연주자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저번에 봤던 턱시도와 같은 것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더 멋졌다. 그리고 연주도 저번보다 좋았다.
“제 조언을 확실하게 들어주셨네요…….”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옐브루스 선배는 공동 리허설을 마치고는 내게 직접 자신의 단점을 짚어 달라고 물었었다.
그때 난 당황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선배에게 조언을 해 주었고, 선배는 그 조언을 잘 받아들인 듯했다.
정석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살짝 튀어 보려고 하던 어색한 부분은 말끔하게 사라졌고, 훨씬 더 세련되고 안정된 연주가 들려왔다.
독특한 성향이나 음색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이 스타일 자체가 만들어 내는 높은 수준이 옐브루스라는 연주자를 그 어떤 것보다 돋보이게 해 주었다.
녹턴과 마주르카 두 곡, 에튀드 두 곡, 그리고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선배는 완성된 음악을 자신 있게 선보였다. 그야말로 쇼팽다운 연주였다.
콩쿠르에서 이 정도의 연주를 하면 절대 그 누구도 흠을 잡기 어렵다.
“브라보.”
스마트폰 소리만 울리는 조용한 연습실에서 난 작게 말하며 박수를 쳤다.
멀리서 들리진 않겠지만 이 정도 찬사는 보내도 된다고 생각한다.
폴란드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문제가 겹쳐서 다른 선배와 다투는 등 날 걱정하게 하는 소식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연주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잘 극복해 줘서 다행이었다.
다음 순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르는 연주자였다.
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예선전의 모든 참가자의 연주를 다 듣고 말 것 같아서 꾹 참고 다시 내 피아노 소리로 연습실을 채웠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가니 학생들 사이에선 온통 옐브루스 선배에 대한 이야기밖에 오가지 않았다.
“영상 봤어? 와, 쇼팽은 그렇게 쳐야 하는구나.”
“진짜 완벽하더라.”
“우리는 선생님이 수업도 안 하고 실시간으로 보라고 틀어 줬었어.”
나만 연습실에서 혼자 들은 게 아니라 이미 전교에 안 들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나스타샤는 몰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었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반 친구들은 아나스타샤라면 이해가 간다는 듯 달리 신기해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의 마이페이스는 워낙 유명했으니까.
그래도 난 혹시나 싶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쇼팽 콩쿠르 예선은 아예 보지 않으실 건가요?”
“아니? 바르바라랑 발렌티나 건 봐야지.”
“……그럼 됐어요.”
두 사람 것도 관심 없다고 하면 살짝 나무랄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냐고.
요즘 아나스타샤는 점점 더 다른 사람들에겐 가까이 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친하던 내게도 거리를 둘 정도니까 걱정이 된다.
그만큼 그녀도 콩쿠르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긴 하지만…… 점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결국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난 아나스타샤와 짧은 인사만 나누고는 헤어져서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살짝 손만 풀고 시간을 슬쩍 보니 1시 30분쯤이었다. 오늘 예선 오전 타임의 마지막 순번이다.
다시 실시간 영상을 틀자 무대에 올라온 것은 비탈리 선배였다.
“…….”
난 비탈리 선배에게도 기대가 꽤 많았다. 옐브루스 선배와는 스타일이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굉장히 실력이 좋은 연주자였다.
무대 중앙에 선 비탈리 선배는 여유 있는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보니 다툰 것으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건 비탈리 선배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난 기대되는 마음으로 연주를 지켜보았다.
첫 곡인 마주르카는 정말 개성적이면서도 완성도 높게 연주되었다. 걱정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곡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였다.
“어……!?”
갑자기 화면 속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급한 발소리 등이 이어졌다.
연주 중에 있어선 안 되는 소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탈리 선배는 피아노에 집중해서 연주를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음은 멎지 않았고, 결국 심사 위원 중 한 명이 무대 위로 소리를 쳐서 연주를 중단시켰다.
피아노 소리가 멎고 다시 혼란스러운 상황만 이어졌다.
카메라가 청중석을 비추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뭔가 비상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
대체 무슨 일인지, 무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비탈리 선배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난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