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3화
연주를 마친 비탈리 선배가 일어났다.
선배의 실력을 아는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청중들의 박수 소리에도 약간의 안타까움이 섞여 들린다.
난 그것이 연주자들에게 비수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예선 라운드의 오전 세션은 완료되었습니다.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저녁 세션 참석은 5시입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짧은 안내 멘트 이후 방송 종료를 알리는 크레딧 화면이 올라갔다.
비탈리 선배는 오전 세션 마지막 주자여서 그대로 끝난 것이다. 가만히 보면서 난 홀로 중얼거렸다.
“왜 그러셨어요…….”
저녁 세션에 나갔더라면 조금 더 잘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난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선배는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에 가능한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전 세션 티켓을 구매한 청중 중엔 선배의 연주를 듣기 위해 티켓을 산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청중에게 있어 선배의 콩쿠르 무대는 곧 독주회와도 같다.
무작정 연주자 편의만 봐서 저녁 세션으로 순서를 옮기는 게 능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선배를 응원하는 청중이라면 시간을 두고 진정하길 바랐을걸.
“…….”
어쨌든 이미 무대는 끝났다. 이제 와서 비탈리 선배가 다시 무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리허설 때 들었던 비탈리 선배의 음악은 정말 괜찮았었는데. 상당히 기대할 만했던 그 음악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단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배의 첫 국제 콩쿠르 예선 무대는 이렇게 끝났다. 오래도록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연습해야…….”
난 중얼거리며 조건 반사와 같이 스마트폰을 끄고는 피아노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런데 건반을 몇 번 눌러 보니 자꾸만 머릿속에 아까 선배가 연주하던 그 힘없는 음악이 떠올라서 방해가 되었다.
내게 영향이 가는 일은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어 봐도 소용없었다.
그 무기력하고 어린 연주자의 모습은 내 뇌리에서 좀처럼 씻기질 않았다. 비탈리 선배가 아니라 내 트라우마를 걱정해야 할 것 같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선배의 일은 안 됐지만 나까지 이러면 안 되잖은가. 난 일부러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단지 생각으로 떠돌던 것들을 엮어서 입 밖으로 만들어 내면 그 말은 구속력을 지니고 날 통제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그건 다른 듣는 누가 없어도 상관없다. 내가 듣고 있으니까.
“…….”
다시 머리를 비우고는 아예 악보를 펼쳐 놓았다.
이미 모두 암보한 악보이지만 이렇게 보면서 다시 한번 프레이징을 정교하게 확인하고 따라서 연주했다.
일단 시각적인 정보가 계속해서 들어오니 다른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 차례 연습을 마치고 나자 맥이 탁 풀렸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조차 옆으로 치워 버리고 연습을 계속하려니 점점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를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니 조용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교내를 울리는 여러 진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
무턱대고 향한 곳은 우리 교실이었다.
그곳엔 레슨이나 연습을 마쳤거나 공부 중인 아이들이 있을 테지. 당장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 타티아나.”
친구들은 날 보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번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눈치를 보진 않았다.
다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침묵이 살짝 이어졌다.
침묵이 너무나 싫었던 난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화두를 꺼냈다.
“다들 방송 보셨나요?”
“어…… 응.”
“봤지.”
일단 말문을 열어 놓자 그제야 친구들은 하나둘 이야기했다.
“선배 진짜 안됐더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쓰러진 분도 쓰러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탓할 수도 없어.”
“그건 당연한 거고.”
“저녁에 나갔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혼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보단 지금 이렇게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이런저런 의견을 들으면서 난 천천히 근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아쉬워하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가만히 있는데, 내 옆으로 라리사가 살짝 다가오더니 물었다.
“타티아나, 괜찮아?”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괜찮죠. 조금 전까지 연습하고 있었는걸요?”
“그, 그래? 방송 다 보고?”
“예.”
멘털이 흔들린 비탈리 선배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도 난 무기를 확인하듯 다시 건반을 짚었다.
만약 같은 상황이 나나 아나스타샤에게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건 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리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예리한 아이였다.
“그런데 왜 다시 반에 온 거야?”
“…….”
그 날카로운 질문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은근히 나와 라리사의 대화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낀다.
나쁜 소식은 되도록 전해 주지 않으려고 애써 주기도 한 착한 친구들이다.
내가 온 것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혼자 연습실에 있길 무서워했다는걸.
내 기분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걱정하게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얼버무렸다.
“글쎄요…….”
“타티아나…….”
라리사는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더니 갑자기 조금 더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고는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가끔 그녀에게선 박력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말 너무 차갑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 건 다 잊어버려.”
“…….”
“콩쿠르 참가를 앞두고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이해하지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란 건 알잖아? 그러니까 네 무대에만 몰두해.”
라리사는 지금 내게 도움이 될 말을 딱 집어 줬다.
오늘 일어난 일은 충격적이었고, 비탈리 선배는 안됐지만 그걸 계속 염두에 두고 있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라리사의 입으로 확인받으니 대답하기가 쉬웠다.
“알아요, 라리사. 그렇게 하려 해요.”
“응. 너라면 잘 해낼 거야.”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살짝 흔들고는 놓아주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긴장을 풀며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콩쿠르를 앞둔 내가 어지간히도 신경 쓰였나 보다.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신경 쓰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라리사가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는 어디에 있어?”
“연습실……?”
“누가 가서 그 애 좀 보고 와 줄래?”
그 말에 안드레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반을 나섰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아마 찾으러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
난 막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는 걸 느꼈다.
최근에 아나스타샤가 날 슬슬 피하기 시작한다는 걸 느끼면서 나도 그녀를 존중해야 한단 생각으로 거기에 응해 주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갔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콩쿠르 참가자 입장에서 방금 본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리고 우리는 잘할 수 있음을 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으리라.
하지만 에르네스트에게 결국 마지막까지 어떤 곡을 가지고 어디로 가냐고 묻지 못했던 것처럼 난 아나스타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다.
“이 애는 왜 안 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사이 다른 친구들이 안드레이가 언제 오는지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뒤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는 두 사람 몫이었다.
고개를 들자 안드레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로 바로 아나스타샤가 따라왔다. 그녀는 뚱한 표정이었다.
“뭐니? 연습하는 중이었는데.”
“어…… 안드레이? 아나스타샤 데리고 왔어?”
라리사가 당황해서 물었다. 안드레이는 무슨 문제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이 데리고 오라며.”
“가서 보고 오라고 했지 언제 데리고 오랬어!?”
그냥 아나스타샤가 연습실에 있는지 정도만 보고 오면 되는데…… 안드레이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은 듯했다.
대충 봐도 상황이 이해 간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서더니 웃었다.
“아무튼…… 뭐니? 아니, 말 안 해도 뭔진 알 것 같지만.”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비탈리 선배의 연주를 전부 보고 지금 편안한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그 뒤숭숭한 기분을 가볍게 떨쳐 내듯 말할 뿐이었다.
“우린 신경 안 써.”
똑 부러지게 이야기한 그녀는 이어 내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타티아나.”
“그, 그렇죠.”
애초에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에 난 곧장 대답했지만 약간 당황하기도 했다.
문득 얼마 전 쇼팽 콩쿠르 참가자들이 공동 리허설을 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변을 보기보단 위를 보자고 했었지. 그녀는 정말로 마음을 강하게 먹은 것 같다.
그러자 라리사가 아까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에게도 해 주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는 게 현명하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듣더니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거랑은 조금 달라.”
“응?”
“상황은 흔하지 않았지만 운 좋게 붙거나 제 실력을 못 내서 떨어지는 일은 흔하잖니? 비탈리 선배도 그랬을 뿐이야.”
두 사람이 이번 일을 받아들이고 넘기는 방식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라리사도 그것을 느꼈는지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짙게 웃더니 내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우린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래서도 안 되고.”
그래선 안 된다. 당위성이 가득한 그 말은 마치 그녀 자신에게 하듯 강력한 어감이었다.
그리고 난 묘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거기에 대해 난 별로 확신이 없었다.
***
그날 저녁 뉴스에선 쇼팽 콩쿠르에서의 사건이 보도되었다.
쓰러진 청중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알려졌는데, 원래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던 나이 많은 노인분이었다고 한다.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지만 클래식 애호가였기에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쇼팽 콩쿠르엔 항상 청중으로 참석했는데,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예선 내내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키다가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서 심인성 실신을 일으킨 것이다.
다행히 심근 경색처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부정맥 정도로 끝난 것 같지만……
문제는 뉴스에서 그 사건만을 크게 다루고 바로 그 때문에 연주를 중지하고 다시 한 연주자에 대해선 그리 크게 다루지 않았단 점이다.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니 크게 다뤄 줄 만도 한데, 바로 기회를 다시 얻은 데다가 겉으로 보기엔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기자들의 눈에 띄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괜히 언론에서 비탈리 선배의 역량 약화나 트라우마 등을 언급하면 없던 문제가 더 생겨날 수도 있다.
이번엔 운이 나빴지만 다음에 더 잘하려면 적어도 언론으로부터 단지 이슈만을 위한 관심을 받는 것보단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비탈리 선배의 연주자 인생은 이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앞으로 길게 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선배가 돌아오면 해 줄 수 있는 말 등을 생각해 두었다.
그리고 하룻밤 지나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난 친구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선배 두 명이 또 싸웠다고요……? 왜요?”
“또? 아, 너 첫날 있었던 일은 알고 있었구나?”
“조금요.”
첫날 선배들이 다퉈서 위태위태하다는 사실은 안나에게 들었다.
그런데 그걸로 이미 정리된 것 아닌가? 이제 와 싸우다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라리사는 조금 난감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듯 조소하더니 설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