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4화
첫날에 10대 네 명이 먼 타지에서 헤매고 다툰 건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여행지에서 친구와 싸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일 테니까.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조금 버겁다.
비탈리 선배는 갑작스레 연주를 중단당한 바람에 이후에도 제 실력을 미처 다 못 냈다. 그러니 무척이나 침울해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내가 바란 건 같이 간 친구들이 선배를 조금이나마 케어해 주는 거였다. 정 안 된다면 차라리 아예 건드리지 말든가.
그런데 두 선배의 행동은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라리사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평소 침착하고 다정한 성격인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나도 바르바라에게 들은 건데, 어제…… 비탈리 선배가 운이 좀 없었잖아?”
“그렇죠.”
“그래서 같이 간 세 명이 조금 위로해 주려 했었나 봐.”
같은 음악가로서 누군들 그런 마음이 안 들겠는가. 역시 거기까진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 이어진 라리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문제는 옐브루스 선배였어. 위로랍시고 한 농담이 어땠는지 아니? 피아노 연주로 청중을 실신시킬 정도였으니 아마 그대로 연주했다면 우승감이었을 거라고…….”
“제정신이에요, 그 사람?”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농담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지.
옐브루스 선배 딴에는 예전 프란츠 리스트나 니콜로 파가니니 같은 전설적인 연주자들이 청중들을 여럿 실신시켰다는 일화를 떠올리고 적당히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그건 진짜로 팬들을 열광시켜서 벌어진 일이고, 이번 일은 나이 많은 노인이 심인성 실신을 일으켜 생명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형태만 비슷해 보일 뿐이지 농담을 해선 안 되는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옐브루스 선배는 정말 철딱서니 없게도 위로랍시고 그런 이야기로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했나 보다. 의도는 알겠지만 방법이 많이 잘못되었다.
내가 어이없어하자 라리사는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제정신 아니지. 바르바라랑 발렌티나도 그 말 듣자마자 바로 미쳤냐고 따졌대. 그런데 이미 말은 나와 버렸고, 비탈리 선배도 발끈해서 맞받아쳐 버린 거지.”
“어떻게요?”
“그러면 차라리 네 차례 때 쓰러졌으면 좋았을 거라고.”
막 나가는 농담은 핀잔과 질타로 상대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위로차 모인 그 네 명 사이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하며 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실언이네요.”
“맞아. 사람이 쓰러졌는데 연주자가 말을 그렇게 하면 돼?”
사석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런 말들이 오갔겠지만…… 그건 변명거리가 안 된다.
난 선배들이 조금 더 점잖고 어른스러우리라 생각했었는데, 실망이었다.
무대 위에선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성인 연주자로 보였지만 내면은 역시 아직 열여덟 살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득 저번 공동 리허설 때 두 선배의 태도가 생각났다.
‘그때도…….’
옐브루스 선배는 내 앞에 우뚝 서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단점을 지적해 달라고 했었다.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마이페이스였다.
그리고 비탈리 선배는 둘을 비교하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물었었다. 옐브루스 선배에게 약간의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성격들을 알고도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딱히 문제가 될 정도로 모난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 훨씬 더 괴팍한 성격의 연주자들도 세상에 많다.
두 선배 정도라면 어떻게든 잘 협조해서 실력을 선보이고 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외부 요인으로 제 실력을 못 내게 된 상황에서 비탈리 선배는 쉽게 무너졌고, 옐브루스 선배는 친구를 잘못된 방법으로 대했다.
어쩔 수 없나 싶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라리사도 두 선배에게 꽤 실망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꽤
복잡한 심경인지 라리사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튼 서로 실언을 하고도 몇 번이나 받아쳤고, 결국 화난 발렌티나가 강제로 다 쫓아 버렸다네……. 그리고 오늘 두 사람 돌아오는 것도 각자 비행기 따로 해서 온대.”
“오늘 오나요?”
“거기 오래 있을 이유가 딱히 없겠지.”
일찍 예선을 마치고 폴란드 관광을 하는 건 자유이지만 특별한 계획이 있지 않은 한 그렇게 하진 않는다.
여행 경비가 지원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학생이라면 학교에서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둘째 날 무대에 선 선배들이 돌아온다는 것까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굳이 다른 비행기를 탄다고?
너무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라리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최악인가 봐. 난 솔직히 선배 둘은 모르겠어. 알아서 하라고 해. 문제는 남아 있는 우리 애들이야.”
“……바르바라가 13일이라 했죠?”
“응. 며칠 남았지……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목소리에 힘이 없어.”
앞서 두 선배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돌아가 버렸으니 남겨진 두 아이는 더더욱 불안할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다투기나 하는 두 사람이 없어져서 시원하다는 심경으로 자기 무대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강단 있고 냉철한 연주자로서 멋지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도 이 멀리에서 지켜보는데도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어제 라리사가 그냥 잊어버리라고 할 정도로 난 많이 동요했었다.
그러니 바르바라나 발렌티나에게 무어라 조언 등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
약간 침울하게 거기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고 있자 라리사가 말했다.
“발렌티나도 마음고생 정말 많이 한 것 같아.”
“시간이 조금 더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긴 해.”
발렌티나는 그나마 예선 기간 중 마지막 하루 전인 18일로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믿음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라리사가 가만히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혹시나 하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발렌티나가 너나 아나스타샤에겐 연락 안 한 거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나는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때문에 그곳에 가서도 힘든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예. 그래서 어떤 상황인지도 몰랐어요.”
“그 애도 참…… 괜히 너희 머리 아프게 하기 싫단 건 알겠지만…….”
작게 중얼거리며 라리사는 내 눈치를 살짝 살폈다.
이미 발렌티나가 그렇게 우릴 배려할 단계는 지났다. 난 이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 버렸으니까.
라리사는 앞으로 내게 어떻게 할 것이냐며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
그저께도 난 발렌티나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분위기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해 봤자 무의미하고, 어련히 잘 풀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발렌티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강점이 있는 아이이기도 하고, 언젠가 괜찮아지면 전화가 오리라 예상하고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결국 라리사가 먼저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라도 전화 좀 해 봐야겠어.”
“……라리사에게 짐이 많네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건 라리사는 잠시 후 목소리 톤을 달리하며 말했다.
“아, 발렌티나. 일어나 있니?”
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아주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라리사는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오늘 어때? 응, 응…… 그렇구나.”
예상과 달리 꽤 편안한 분위기의 통화였다. 라리사도 발렌티나도 성격이 좋은 아이들이라 다행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어서 난 가만히 라리사를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나? 난 어젯밤에 바르바라에게 너희 이야기 들었지. 응. 고생 많겠다.”
그런데 라리사는 돌연 내 쪽을 쓱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타티아나와 이야기하고 있어.”
발렌티나가 뭘 물어본 걸까?
무언가 길게 이야기하는지 라리사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듣다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 애도 너희 처음부터 삐걱거렸다는 건 알던데?”
안나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난 오늘 이야기에도 비교적 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리 무언가 해야 했던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날 신경 써서 불화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발렌티나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무어라 할지 궁금해져서 난 라리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발렌티나의 반응은 심플했다.
“바꿔 달라고?”
뭔가 라리사와 더 대화를 하는 대신 발렌티나는 날 직접 지목했다.
라리사는 스마트폰을 내리고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타티아나, 바꿔 달라네?”
“주세요.”
그 스마트폰을 받아 귀에 붙였다. 어제도 전화를 하지 못하고 망설인 탓일까, 뭔가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발렌티나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발렌티나. 저예요.”
-타티아나. 어젠 나도 정신이 없고 그래서 통화를 못 했네. 그런데 방송은 다 본 거지?
발렌티나는 확인부터 시작했다. 혹시 우울해하거나 위로를 필요로 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난 짧게 대답했다.
“봤어요.”
-우리 오자마자 엉망이었던 것도 알고 있었고?”
“예.”
-어제 뒤집혔던 것도 라리사가 이야기해 준 거야?
“예, 방금…….”
일단 발렌티나가 묻는 것에 차례로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 저편에서 버럭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전화를 좀 해!!!
갑자기 쨍하고 울리는 소리에 난 기겁해서 스마트폰을 거의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귓가에서 살짝 떼어 놓았다.
어쩌지. 이렇게 화가 많이 난 발렌티나는 처음이다.
천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과 전파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도 난 그녀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겁났다.
나도 모르게 라리사를 바라보니 그녀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난 쩔쩔매며 우는 소리를 냈다.
“바…… 발렌티나, 저 귀청 떨어져요…….”
-아니, 되도록 너한테 안 좋은 소식은 말하기 싫어서 첫날은 유야무야 대충 넘어갔어. 그런데 난 네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까 그냥 계속 그렇게 모르쇠로 있어야 하잖아! 네가 알고 있으면 먼저 말을 좀 해 달라고! 그래야 나도 판단이 서니까!”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기…….”
-내 말 안 끝났어!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발렌티나는 멈추지 않고 기관총처럼 마구 말들을 쏟아 냈다.
난 그간 혼자서 배려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발렌티나는 적어도 자신의 배려를 내가 알아차린 시점에서 내가 제대로 반응해 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내 신경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그런 그녀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다. 지금 잔뜩 혼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발렌티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나스타샤도 분명 다 알면서 상황 괜찮냐는 연락 한번 없고…… 바르바라도 멘털 터지기 직전인데 난 누구랑 이야기해?
“저희한테, 전화하면 언제라도…….”
-그러니까, 우리 쪽 분위기 안 좋은 걸 너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질 모르는데 다짜고짜 신세 한탄하려고 전화를 할 수가 없다고!
“잘못했어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어서 난 눈을 꾹 감으며 사과했다. 나 언제까지 혼나야 하는 거지?
그런데 눈을 감고 발렌티나의 목소리를 감내하는 와중에 내 앞에선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라리사가 웃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