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5화
라리사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입을 가린 채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믿음은 무너졌다.
너무했다. 이 상황도 어떻게 보면 라리사가 주도한 상황인데.
만약 그녀가 옆에 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전화를 넘겨주지 않았다면 내가 나중에 알아서 발렌티나에게 연락했을지도 모르는데.
궁상맞은 핑계를 떠올리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지금 당장 제일 무서운 건 전화 저편에 있는 발렌티나였으니까.
씩씩거리는 그녀에게 난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발렌티나…… 이야기 들어 드릴게요. 화 푸세요…….”
-넌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화가 난…… 아니야. 네가 문제가 아니지. 이건 아나스타샤도 똑같으니까!!
조금 가라앉나 싶었는데 갑자기 또 활화산이 폭발했다. 그사이 아나스타샤도 무덤덤하게 자기 준비에만 철저했던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나랑도 거리를 둘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난 억지로 견딜 수 있었지만 발렌티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다 참다 폭발한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보지 못했다. 난 차분하게 마음을 먹고 다시 천천히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래도 걱정 많이 했었어요, 발렌티나.”
-…….
진지하게 말하니 저편의 발렌티나가 갑자기 뚝 하고 멈춘다.
그녀도 원래 아무렇게나 짜증을 부리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늘은 정말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뿐이다.
조금 지나니 발렌티나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해.
“괜찮아요.”
-네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면서도…… 괜히 그랬어. 하지 말걸.
그녀도 내 성격을 잘 안다.
내가 정말로 폴란드에 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끄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침묵하는 와중에도 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발렌티나도 그 정도는 짐작했던 모양이다.
난 비로소 조금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걸요.”
-글쎄? 생각해 보면 네가 먼저 전화했다고 하더라도 난 그냥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얼버무렸을 것 같아.
아마 그랬겠지.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투정을 부리려다가도 바로 그렇게 하진 못했으리라. 난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요?”
-머리에 열이 올라서 별소리를 다 해 버렸네.
라리사를 거쳐 바로 폭발한 덕분에 발렌티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그녀의 말들을 받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살짝 눈만 들어 라리사를 돌아보자 그녀는 신뢰감이 깃든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가 발렌티나를 잘 다독여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다.
사실 나도 충분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할 것도 없었다. 발렌티나는 이미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도 덕분에 조금 개운해졌어. 네가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것도 듣고 나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할 것도 없고.
“그냥 하시면 되지요.”
-어떻게 그냥 해? 그 어린애 같은 두 사람이 오늘 아침까지도 얼굴 안 보고 모른 척하는 게 진짜로 꼴 보기 싫었다고?
그래도 다시 떠올리면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도 그쪽에 직접 가 있지 않고 이곳에서 상황을 듣는 것만으로도 답답했었는데, 눈앞에서 그것을 다 지켜본 발렌티나나 바르바라는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발렌티나는 시니컬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그 와중에 각자 나한테 와선 미안하다느니, 예선 잘하라느니 하는 게 더 짜증 나. 진짜로 그러길 바라면 가면서까지 분위기 망쳐 놓질 말든가. 한 살이라도 많으니까 수습이라도 하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 어쩌라는 거야?
투덜거리는 걸 보니 정말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11학년 두 선배 역시 경험이 부족하니 실질적으로 믿음직스러운 어른처럼 콩쿠르 준비 등을 깔끔하게 기획해 놓진 못한다.
그런 기대는 애초에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심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만이라도 자중했어야 했다.
선배로서의 일을 할 수 없다면 연주자로서의 협조라도 제대로 해 줬어야지. 그 점에선 도저히 감쌀 말이 없다.
하지만 바짝 머리를 들이밀고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의 입장에 몰입하지 않고 살짝 떨어져서 관대한 시선으로 보면…… 상황이 참 안 좋았구나 싶다.
실제로 연주자로서의 일조차 똑바로 못 해낼 정도이기도 했으니까……. 결국 극복하지 못한 거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선배들도 모르는 것 아닐까요?”
-모르긴 왜 몰라? 화해하면 되잖아.
“그렇긴 하죠…….”
단순하게 딱 자르는 발렌티나의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어차피 난 선배들을 더 변호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 말하진 않았다.
발렌티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많이 풀어진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했다.
-어쨌든 두 사람 없어지고 나니까 난 좀 나은데 바르바라가…… 모르겠어. 연습할 때 들어 보니까 피아노 소리가 좀 불안해.
바르바라가 그렇게까지 영향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꽤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바르바라를 도와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발렌티나가 도와주세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오늘 잠깐 나갔다 올까 해. 멀리 나가지 않고 요 근처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남들 다 연습하는데?
“컨디션 정상화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돌아다니면 안 좋은 기억들도 잊고 다시 재정비할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시 그렇지?
발렌티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이번엔 약간 장난치듯 하소연했다.
-에휴…… 누군 다른 사람 신경도 안 쓰고 분위기 망쳐 놓고, 누군 다시 바로잡으려 하고……. 이게 맞나 모르겠어, 정말.
“이번은 확실히 선배들이 나빴어요. 비탈리 선배가 운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응이 너무 미숙했다고 생각해요.”
-애도 그런 애들이 없더라니까 진짜?
내 동조에 발렌티나가 다시 한번 공명하려는 찰나, 그녀를 다시 끓어오르게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적당히 잘랐다.
“돌아오면 제가 한마디 할게요.”
-어? 정말?
“예. 진심이에요.”
그건 발렌티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하려고 했던 각오이기도 하다.
비행기도 따로 타고 온다는 그 속 좁은 선배들이 언제 학교에 등교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교내에서 내 눈에 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약간 불량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벼르고 있는데 아직 생각치 못한 부분을 발렌티나가 치고 들어왔다.
-뭐라고 할 건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아하하하하, 뭐야.
그녀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작게 속삭였다.
-아무튼 네가 선배들을 혼내 준다니까 벌써부터 답답했던 짜증이 사라지네. 정말 약속한 거다?
“예, 약속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하진 말고.
선배들에게 심하게 하지 말란 건 선배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발렌티나는 내게 벌컥 화를 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외의 다른 것에 너무 많이 신경이 팔려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필요 이상으로 선배들을 몰아세우거나 할 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답하자 발렌티나가 한껏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만 믿고 우린 계속 열심히 할게.
“힘내세요.”
-응, 고마워.
전화를 마치고 라리사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다시 묻지 않았다.
옆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러 가지를 추론해 낸 듯한 표정이었다.
난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라리사에게 당한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괜히 말을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언제쯤 올까요?”
“글쎄? 왜? 그 애한테도 이야기해 주려고?”
“알고는 있어야죠.”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똑 부러지는 태도로 우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남겨진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를 정말로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닐 터였다.
아마 이야기를 듣는다면 먼저 참지 못하고 전화할지도 모른다. 난 그런 기대를 안고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
약간 우울했다.
오전 연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발렌티나와 직접 통화하고, 이제 그녀와 바르바라 두 사람이 정신을 바로잡고 극복할 문제라는 걸 확인한 덕분인지 나 역시 준비하던 곡들을 제대로 연습할 수 있었다.
연주자로서 제대로 기능해야 하는 건 그녀들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아침에 아나스타샤와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만 머리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왜 굳이 하지 않겠다고…….’
라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아나스타샤가 오자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해 주었다.
그러나 선배 두 명이 어떻게 했는지를 듣고도 아나스타샤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정말로 뭘 어떻게 하든 별 신경 안 쓴다는 태도였다.
그 냉랭하고 다부진 태도는 언뜻 믿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툼과 반목을 그녀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섬칫하기도 했다.
콩쿠르에서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는 게 당연한 걸까?
여러 트러블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 다투거나 하는 건 나도 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의견이 잘 맞고 모든 일이 잘되기만 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투었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풀어야 할 일이지, 비행기를 따로 타고 귀국할 정도로 틀어진 사이를 회복시키지 않는다는 건 너무 심각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
이어서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때도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고는 직접 통화했느냐고 한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내가 전화로 직접 발렌티나를 조금 안정시켜 주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대체 왜 그렇게까지 냉정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이가 틀어진 선배들이 떠올라서 내 목에 제동을 걸었다.
물론 두 선배의 상황과 우리는 전혀 다르다. 우린 해외 콩쿠르장이 아니라 아직 학교라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서로를 대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아나스타샤를 싫어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나스타샤에게 따지고 들 용기는 없었다.
아마 내가 느끼는 확신은 이미 깨어진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더더욱 용기가 사라졌다.
“하…….”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잘될 거라고, 우리들의 콩쿠르가 어떻게 되더라도 친구로서의 관계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드시 아나스타샤와 잘 지내고 임세연과의 인연도 끊어 놓지 않고 잘 이어 나가리라 다짐하고 있지만…….
사실 무섭다. 친구들을 잃을까 봐.
믿음이 흔들린다.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건 친구들 역시 그러리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해서 갈등하고 당연하듯 반목하게 된다면, 그리고 쉽게 그 사이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난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럴 밖엔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다.
“…….”
물론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면 엄청나게 난리가 나겠지. 단지 나나 아버지, 선생님이 아쉬워하시고 말 일이 아니다.
난 공로 예술가로서 카메라 앞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겠다고 천명한 적이 있었으니까.
평소 공로 예술가란 명예를 앞에 내세우거나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건 아니었다.
내 활동을 기다릴 사람들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면 되도록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렵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원래부터 없었지만 요즘은 부쩍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멍하니 건반을 툭툭 건드리던 나는 머리가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음악으로 다 채워 버리기로 작정하고는 본격적으로 다시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한 생각은 좀처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