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예선 참가자 73명에 대해 전부 알진 못하지만, 주말 동안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예상컨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일과다.
체력과 컨디션 관리를 위해 식사와 가벼운 스트레칭도 병행하면서 최대한 음악들을 몸에 각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쇼팽 콩쿠르 방송도 본다.
올해 국제 콩쿠르에 참가를 희망한 거의 모든 연주자가 두 콩쿠르를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콩쿠르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콩쿠르에도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렇고.
앞서 진행 중인 예선을 볼 때면 내가 저 무대에 서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게 된다.
“…….”
스마트폰 화면 속 연주자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자아는 음악을 분석하면서 당락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객관적이지 못한 참가자로서의 나는 또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오진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건만, 내 뇌리엔 그때 봤던 충격적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이렇게 길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였고, 콩쿠르 측에선 그에 대한 대처도 잘했기에 다른 잡음 없이 잘 넘어갔다.
표면적으론 딱히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비춰졌으므로 언론에서도 예선전에서 생긴 잠깐의 이슈로 하루 정도 이야기했을 뿐이다.
계속되는 예선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세상은 당장 스포트라이트를 필요로 하는 연주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난 그 일로 한 연주자가 어떻게 자신의 연주를 망쳤는지, 내부적으로 어떤 갈등이 생겼는지 안다.
‘못 보겠어.’
난 스마트폰을 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의자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냥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다. 라리사도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했고, 나 역시 그게 현명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실수가 아닌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무대에서 얻은 결과가 우정의 균열에 얼마나 쉽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 버린 나는 좀처럼 어두운 망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잘 준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합리적인 연주자로서 활동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심각하게 이야기해 봐야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렵다. 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합리적이지 않은 걸 아는 친한 친구들에겐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요즘 이야기 핀트가 잘 안 맞고, 발렌티나는 당사자고, 세연은 걱정을 부추기고 싶지 않은지 연락이 없다.
그리고 리처드나 한승우는 시크해 보여도 은근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섭다.
에르네스트는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른다.
“…….
팔을 이마에 대고 누워 있다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는 에르네스트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했다.
혹시 기적적으로 전파가 닿는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잠깐이라도 연결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신호도 가지 않고 전화를 연결할 수 없다는 ARS 안내만 흘러나왔다.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난 속으로 투덜거리며 도로 누워 버렸다.
이미 기대가 많이 줄어들어 있긴 했다.
이전엔 혹시나 하면서도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젠 정말 지체 없이 바로 전화를 걸어 버리는 게 그 방증이었다.
물론 연락이 된다고 하더라도 에르네스트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순 없었다. 그 역시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중일 테니까.
하지만 음악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좋으니까, 어색해도 좋으니까 받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
심란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어 누운 채 옆으로 고개만 돌리니 피아노는 건반 덮개가 열린 채 그대로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기분이 조금 불안하고 우울할 뿐이다. 국제 콩쿠르 무대를 앞두고 안 좋은 소식을 들었으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겠지.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마음이 복잡할 때도 피아노 앞에 앉았고, 무대 위에 섰다.
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막 일어나려는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혹시 에르네스트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난 빠르게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그런데 화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티치의 이름이었다.
살짝 들떴던 기분이 다시 밑으로 가라앉는다.
난 선배의 실패와 친구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6월을 상상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등을 모두 덮어 놓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뢰할 수 있는 연주자로서 전화를 받았다.
“예, 타티아나입니다.”
-통화 괜찮습니까? 혹시 연습 중이라면…….
“지금 괜찮아요. 휴식 중이었어요.”
난 다리를 꼬면서 이야기했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는 뉘앙스가 저편까지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데 아르투르는 내 휴식 자체에도 흥미를 느끼는지 살짝 깊게 물어 왔다.
-다행이군요……. 음, 타티아나. 쉴 때는 무엇을 합니까?
“쉴 때요?
-음악은 많이 들어 봤는데 그 외의 건 잘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운용하는 그와 음악을 맞춰 보면서 우린 서로의 성격이나 음악성 등에 대해선 꽤 많이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곳은 항상 연습실이나 홀뿐이었다. 카밀레와는 사적으로도 조금 더 친밀했지만 지휘자와 그런 시간을 가지는 건 조금 어려웠다.
나 역시 아르투르의 실력 외엔 잘 모르는 것이다.
거리감을 조금 좁히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 난 무언가 재미있는 게 없나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쉬면서 쇼팽 콩쿠르 예선전을 보다가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꺼 버리고, 혼자 누워서 투덜거렸을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확실히 거리감이 줄긴 줄 것 같다. 그러나 아르투르를 당황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난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냥…… 스트레칭 좀 하고는 의자에 누워 있었어요. 스마트폰을 보기도 하고요.”
-특별한 건 없나 보군요?
“특별한 거…….”
-하하하하, 괜히 생각해 보려 하진 않아도 됩니다.
그는 괜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껄껄 웃더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저번에 이야기했었던 마지막 리허설을 오늘 하면 어떨까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아, 그랬었죠.”
-어제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희 측 연주자 일정에 변동이 약간 있을 수 있어서……. 결정이 난 오늘에야 말씀드리는군요.
내가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끼어들 수 있었던 건 본 협연자가 스케줄 문제로 합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트러블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스케줄이 왔다 갔다 하는가 본데…… 그래도 결정이 나긴 한 모양이다.
그럼 정말 내게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난 그저 리허설 대체 협연자일 뿐이니까. 본 협연자가 오면 오케스트라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된다.
평소 같았으면 두 번 고민 않고 지금 당장 만나도 좋다고 했을 것 같다. 마지막 배려이기도 하고, 깔끔하게 매듭지을 타이밍이기도 했으니까.
“…….”
그러나 난 곧장 대답하는 대신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오늘 연습은 제대로 집중해서 할 수 있었나? 협주곡은? 내가 느끼는 이 비합리적인 감정이 오케스트라에 전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나?
그건 다시 피아노로 확인을 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난 조심스레 아르투르에게 말했다.
“저기,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오늘이 곤란하면…….
“아, 그런 게 아니라…… 조금만 생각해 볼게요.”
-그렇습니까?
신경이 팔려서 연습이 잘 안 될 뿐이지…… 막상 실전이라 생각하고 연주하면 잘할 자신은 있었다.
내 내적 불안에 맞먹을 정도로 피아노 연주자로서 똑바로 해내지 못하면 정말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또한 강했으니까.
오케스트라와의 연습은 한 번이라도 더 챙기는 게 중요하다. 일단 혼자서 마지막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아르투르는 잠시 내 기색을 살피고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씀을 미리 드려서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준비가 안 된 제 문제이니…….”
-어떤 준비를 하실진 기대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마시죠. 마음 가볍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르투르.”
짧게 감사를 보내자 아르투르는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 친구들과는 이야기하기도 어렵지만, 날 찾는 음악가들은 많았다. 그건 내가 움직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아마 시간이 흐른 미래에도 내가 연주자일 수 있다면 이런 요청 등을 받아 활동하겠지.
작년 초에 안정을 찾은 이후 난 어렵지 않게 그런 행복한 미래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옆에 자연스럽게 친구들을 그려 넣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그림은 조금 희미해져 있었다.
“…….”
내 마음이 약해지거나 멀어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난 친구들을 사랑한다. 대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만 그런 내 마음과 관계없이 흘러가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국제 콩쿠르는 그런 큰 힘이 작용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고.
앞서 두 선배의 케이스는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내게 무척 가깝게 다가왔다.
“협주곡들을 봐 둘까.”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일어섰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내려다보니 흩어져 있던 신경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툰 선배들, 모레 무대에 설 바르바라, 그다음의 발렌티나,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모두에게 뻗쳐 있던 생각도 지금은 잡념일 뿐이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면서 첫 음을 짚으려고 할 때였다.
“……아.”
또 한 번 벨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정말로 살짝 짜증이 났다. 왜 뭔가 하려고 하면 자꾸 방해가 오지?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도 요즘 날 건드리지 않는데 누가?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한 나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이번에 온 전화는 카밀레로부터 온 것이었다.
난 다시 목소리에 신경 쓰며 전화를 받았다.
“카밀레.”
-안녕. 아직 쉬고 있지? 타티아나.
밝은 목소리였다. 이미 내 상황을 알고 있다고 밝힐만한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예. 그런데…… 지금 지휘자님과 함께 계시나요?”
-응. 옆에서 통화하는 거 듣다가 지금은 따로 나왔어. 음, 아무도 없어.
그녀는 바로 긍정하더니 혼자라고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 보니 정말 나와 통화를 하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상황과 힌트가 주어지자 난 어느 정도 카밀레가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할 만한 말들을 즉각 떠올렸다.
그런데 단계적으로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카밀레는 순식간에 휙 하고 내 코앞까지 치고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게 맞나 싶긴 한데…… 오늘 리허설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건 왜야? 설마 부담되어서 그래? 오늘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질문 폭탄을 받으니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녀가 묻는 건 오케스트라에 대한 것이었으니 대답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그저…… 확인을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결국 문제는 내 내적인 부분에 있기에 별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카밀레는 나보다 훨씬 더 경력이 깊고 예리한 사람이었다.
-우리 단원들도 가끔 그러는데, 보통 그렇게 말하고 나면 연습 안 나오더라고.
“아.”
나도 모르게 빈틈을 찔리고 헛숨을 내쉬자 수화기 너머에서 킥킥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녀를 속이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