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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27화 (1,027/1,277)

##  1027화

말문이 막힌 내가 버벅거리자 카밀레는 웃음을 그치더니 날 몰아세울 의도는 없었다는 듯 말했다.

-뭐, 안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리허설에 어지간하면 참가해야 한다.

자주 자리를 비우면 얼마 못 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어야 할 테니까.

그러나 협연자, 그것도 대체 협연자인 내겐 그런 압력이 덜하다. 사정이 있다면 내 의사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상관없다고……?’

하지만 부담을 덜어 주려는 카밀레의 이야기를 들어도 난 여유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되레 더더욱 초조해지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날 옭아매고 있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내 이야기를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누구라도 날 필요로 하길 바라서?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던 난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웃어 버렸다. 결국 내가 바랐던 건 그런 것들이었나.

“…….”

자조하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인정해야 했다.

난 여러 이유와 상황으로 친구들과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렵게 된 지 며칠 만에 불신과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견딜 만하다고, 콩쿠르를 앞두었으니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며 버티고 있었지만…… 결국 난 이런 불안감에 취약하고 나약했다.

가만히 혼자 있으면 항상 불길한 생각들이 먼저 든다. 우울한 잡념들을 덮어 놓고 무작정 긍정적인 미래만을 그리는 건 불가능했다.

난 항상 믿음과 당위를 필요로 했다. 그걸 늘 확인시켜 주는 게 내 친구들이었고.

평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힘을 얻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스스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밀레는 이해해 줄까.’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카밀레라면 내 심경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감정들을 전부 내보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문제들은 상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상담을 부탁하려니 살짝 부끄러웠지만,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카밀레.”

-응.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시나요.”

-내가 뭐라 했더라?

“제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총량이 높아지면…… 이야기해 달라고 하셨던 거요.”

카밀레에게 상담을 부탁할 생각이 들었던 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게 기대가 많으실 미하일 선생님이나 독단적인 에르네스트의 행보에 걱정이 많을 구세프 선생님에게 상담을 하긴 정말 어렵지만, 단지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이 있다고 해 준 카밀레에겐 아무래도 부담감이 덜하다.

물론 적당히 상담할 어른으로 카밀레를 골랐다는 것엔 죄책감이 약간 있다.

그녀는 이렇게 쉽게 대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너무 기대지 않고 이야기 해 볼 생각이었다. 난 아직 제정신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말씀을 듣고 돌이켜 보니, 신경 쓰고 있던 일이 좀 많았던 것 같아서요.”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카밀레는 내 말을 이해했다.

-요즘 많이 버겁구나? 타티아나.

“……약간, 그래요.”

-그럴 만도 하지. 열일곱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 나였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못 잤어. 진짜로.

음악계 선배로서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그 목소리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카밀레는 다정하게 물었다.

-게다가 엊그제 쇼팽 콩쿠르 예선전에선 무서운 일도 있었고. 너희 학교 선배였지? 예민해질 만도 하네.

역시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피아노만을 다루는 쇼팽 콩쿠르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카밀레는 그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는 듯했다.

단순하게 남의 일로 치부해 잊어버리고 내 일에나 집중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음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밀레에겐 설명할 것도 없었다.

역시 상담하기로 마음먹기 잘했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질문했다.

-친구들은 뭐라고 해?

“치, 친구들이요?”

-같이 다니는 아이들 있지 않니?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는 친구도 있다고 들었는데.

물론 있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나 다른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카밀레에게 상담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입을 열면 울적한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난 되도록 건조하게 대답했다.

“지금 제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친구는 없어요.”

달리 이유를 붙이고 싶진 않았다. 카밀레도 이 이상 캐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큰 무대를 준비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좀 외로워 보이더라. 그런 의미에서 첼로를 하는 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부러워요.”

-그만큼 짜증 나는 일도 많으니까 부러울 건 없어.

합주가 즐겁기만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처하다.

헛웃음으로 대충 넘기려 했는데, 카밀레는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차라리 음악적 이견으로 짜증이 나면 다행이지. 그게 아니면 참 곤란하긴 해.

“……예?”

멍하니 되물어도 수화기 너머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카밀레 역시 지금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온다.

내게 해 줄 말들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난 그녀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주었으면 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얘기해 달라는 말에 덥석 상담을 요청한 내가 이제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조금 우습지만…… 그냥 평범한 말들이라도 좋았다.

단지 내가 혼자서 빙글빙글 돌지 않고 앞으로 향해도 된다고 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농담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조금 풀어 볼까 싶었는데, 이윽고 카밀레가 이야기했다.

-있잖아? 타티아나. 오늘 네가 리허설에 오든 말든 그건 네 판단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야. 내가 널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없는 거고.

당연한 말인데도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된다. 마치 할 맘이 없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쓸데없는 어리광처럼 들렸을까? 지금이라도 사과하는 게 좋을까?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스마트폰을 들고 서 있는데, 이어지는 카밀레의 목소리는 앞선 모든 걱정들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런데 그런 거 다 신경 끄고. 차나 한잔 안 할래?

“차…….”

-마침 나 지금 알피나에게 달리아를 맡기려고 하고 있거든. 그 아파트에서 보는 건 어때?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카밀레의 호의로 상담을 요청하긴 했지만, 그냥 전화로만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을 생각이었다.

내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너무 길게 이야기하는 건 정말 민폐밖에 안 될 테니까.

그러나 카밀레는 오케스트라 일은 별개로 두고 나와 이야기하기 원한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말해 주는데 거절할 순 없었다.

“좋아요.”

-그럼…… 거기 위치 기억해? 아니지, 내가 다시 메시지로 주소 보내 줄게.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시간이…… 1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저희 집이 좀 멀어서요.”

-나도 우리 애 씻기고 준비 시키려면 한참 걸려. 걱정 마.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난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피아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습을 조금 해 가는 게 낫겠지.’

달리아나 알피나가 만약 연주를 부탁한다면 난 거절하지 못할 테다.

달리아는 특히 내 우울함을 눈치챈 것 같았으니까…… 되도록 그런 티가 나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프리스넨스키 구에 가면 오케스트라와 리허설도 하게 될 테고……. 아까 아르투르에게 말했던 대로 내 음악이 어떤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6분 정도…….’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몇몇 음악과 협주곡의 중요 프레이즈 몇 가지를 떠올렸다. 시간을 오래 쓸 순 없었다.

나도 옷을 갈아입고 준비 할 시간이 필요했다. 프리스넨스키까지 가는 데에도 오래 걸리니까.

해야 할 일, 그리고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낮게 가라앉아 있던 의욕이 고개를 든다.

끈적한 진흙처럼 뭉쳐 있던 머릿속이 팽이처럼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카밀레와 연락하며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프리스넨스키에 도착했다.

아파트 앞에 빅토르가 날 내려 주었고, 저번에 방문한 적 있었던 알피나의 집을 찾아 올라갔다.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고 노크를 하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타티아나.”

“실례할게요.”

며칠 만에 본 알피나는 조금 더 기운차 보였다. 그저 마주하기만 했는데도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손짓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거실에 앉아 있는 카밀레와 달리아가 보였다. 두 모녀는 날 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괜히 부른 게 아닌가 했는데.”

“멀리 사신다고 들었어요!”

난 반가운 미소와 함께 다가가서 달리아를 살짝 안아 주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알피나는 굉장히 들뜬 모습으로 마치 춤을 추듯 주방으로 향했다.

“차 끓일게요. 타티아나는 디카페인이죠?”

“제가 도와드릴…….”

“손님은 앉아 계세요. 말씀 나누고 있으면 제가 가지고 갈게요.”

호스트가 이렇게 말하면 꼼짝도 할 수 없다. 난 가만히 앉아선 살짝 어색하게 카밀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달리아가 기쁜 듯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학교에 안 가신 거예요?”

“예? 아…… 그렇죠.”

“그럼 오전엔 뭐 하셨어요?”

“연습실에 있다가…… 음, 쇼팽 콩쿠르도 봤네요.”

“저도 봤어요!”

재잘거리는 달리아의 말을 받아 주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이라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자리는 카밀레에게 전화로 했던 상담의 연속이었다. 내가 근래 느끼는 불안에 대해 말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어떻게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할지,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차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자리에 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애매했다.

이미 저번에 알피나는 내가 복잡한 고민을 떠안았다는 걸 눈치채고는 적당한 조언을 해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달리아는 내 우울함을 꿰뚫어 보기도 했고.

그런 두 사람이 있다 보니 되레 더 이야기하기가 곤란했다. 되도록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만약 카밀레가 먼저 화두를 던진다면 거기에 답해야겠지만, 그녀는 가만히 앉아선 이따금 알피나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머금자 따뜻함이 퍼진다.

난 일단 이 따뜻함을 따라가기로 했다.

***

차를 마시고 나선 달리아가 레슨 받는 것을 견학하기도 했다.

저번에 했던 것처럼 알피나는 내게도 피아노에 앉길 권했다.

난 알피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녀가 설명한 부분만 다시 반복해서 조금 더 간소하게 보여 주었다.

미리 연습을 조금 해 온 덕분일까, 난 꽤 만족스럽게 알피나의 보조로서 시범을 보일 수 있었다.

영민한 달리아는 이번에도 순식간에 우리가 보여 준 것들을 습득해 나갔다.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달리아를 보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순 없었다.

“이따가 올게요.”

“염려 마시고 다녀오세요.”

달리아를 맡기고 카밀레는 알피나의 아파트를 나섰고,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나왔다.

이대로 카밀레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하러 갈 예정이다.

“…….”

그냥 카밀레가 날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담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티타임은 알피나와 달리아가 있어서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그냥 흘러갔다.

상황을 조성한 카밀레가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아마 그녀가 날 부른 이유는 티타임 자체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날 멋대로 휘두른 것이지만, 난 그냥 모른 척 따라가 줄 생각도 충분히 있었다. 딱히 나쁠 것도 없었기에.

“어떻게 할 거야? 타티아나.”

하지만 카밀레는 멈춰 서더니 분명하게 내 의사를 다시 물어보았다.

그냥 여기서 내가 돌아가더라도 붙잡지 않겠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난 문득 궁금해져서 그녀에게 말했다.

“절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따지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의아했다.

상담이라기엔 한 이야기가 너무 없었고, 리허설에 데리고 가려는 걸로 보기에도 어려웠다. 전혀 권유랄 게 없었다.

카밀레는 대단하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그 말을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거야?”

이번엔 살짝 기분이 상했다.

“저 지금 무슨 시험당하고 있었던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며 그녀가 이어 말했다.

“네가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은 방심하고 있던 내 폐부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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