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8화
카밀레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입을 열면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카밀레는 들고 있는 첼로 가방이 무겁다는 듯 옆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더니 내게 제안했다.
“잠깐만 더 이야기할까?”
그녀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여긴 따뜻한 차도, 달리아도 없었다.
온전히 나와 카밀레가 감내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깐 이 시간을 기다려 왔는데도 이렇게 되니 머릿속이 하얗다. 카밀레가 먼저 미안하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혹시 기분 많이 상했니?”
“그, 그런 건 아니에요.”
“휴, 다행이다.”
카밀레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는 눈을 마주하고는 옅게 웃었다.
“갑자기 불러서 차 마시자고 하고, 같이 갈진 알아서 정하라고 하고…… 지금 조금 황당해 하는 것 같네. 그렇지?”
그녀를 믿었기에 멋대로 휘둘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터라 괜찮았지만, 사실 조금 기분 나쁘게 여겨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긴 했다.
심지어 카밀레는 내 생각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나도 알아. 네가 전화로 카운슬링을 원했다는걸. 그리고 주말 일정을 전부 집어치우더라도 네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지.”
그 말은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내게 모종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이번 주말을 전부 쓰더라도 그걸 갚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궁금한 게 많기도 했고.”
거기엔 그녀의 개인적 호기심도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에서 흥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환영이었다.
뭐든 좋았다. 정말로 난 오늘 카밀레에게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오픈할 생각이 있었다.
약간 하소연하고픈 마음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내 나약함을 비웃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그러나 카밀레는 이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기 관리에 능하고 인내심도 강한 네가 나한테까지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싶더라고.”
“그건, 카밀라가 먼저 그래도 좋다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지금처럼 친구들끼리 이야기해서 해결해도 될 일을 가지고 나한테 이야기할 줄은 몰랐지.”
콩쿠르에 대한 불안 같은 건 자신에게 말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음악계 선배로서 날 이해해 주고 있었던 것 아닌가?
내 눈을 본 카밀레는 오해를 사고 싶은 건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별것 아닌 일이란 건 아니야. 네가 지금 얼마나 심란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도 그랬으니까.”
카밀레는 날 이해하고 관심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을 파고들려 하진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더 네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을 사람들이 있잖아?”
“……같이 콩쿠르에 참가하는 친구들이요?”
“아마 나한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거야. 굳이 대역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거든.”
간단하게 선을 긋는 걸 보며 카밀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선배로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면 도움을 줄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단지 불안을 공유할 친구가 필요한 것뿐이라면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 난 전화로 카밀레에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친구가 없다고 했었지. 때문에 그녀는 날 불러내서 직접 보고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차를 마시잔 건 단순히 그런 의미였다.
“…….”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가도, 이렇게까지 명료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불안을 공유한다는 건 그것을 함께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킨다.
난 그것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고.
카밀레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난 나대로 느끼고 생각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누면 불안만 더 커지고…… 모두들 방해 받고 싶지 않아 해요.”
그러나 내 말을 듣자마자 카밀레가 물었다.
“물어봤니?”
“예?”
“직접 물어봤는지 궁금해서. 그냥 네 생각뿐인 것 아니야?”
그녀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마치 내가 절대로 그러지 않았으리란 걸 안 봐도 안다는 듯.
정확한 파악이었기에 반박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난 바보가 아니다.
에르네스트가 멋대로 가 버린 것도, 아나스타샤가 혼자서 연습하기 시작한 것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제 생각만은 아닐걸요. 분명 피한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그건 아마 네 친구들도 너처럼 참을성이 강해서 그럴지도 몰라. 보통 가까운 사이면 닮기 마련이거든.”
“…….”
카밀레의 말은 넘겨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난 평소에도 친구들의 인내심으로 우리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밀레는 나 한 명만 보고도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알아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관점의 차이가 있다면, 난 그 인내를 우리 사이를 엮는 밧줄로 생각했다면 카밀레는 벽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완전히 색다른 이야기를 들으니 약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카밀레가 깔끔하고 단순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아까 전화로 네가 용기를 낸 것처럼…… 먼저 물어봐.”
카밀레에게 상담을 요청한 건 정말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지금 그녀는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니 그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아마 네 이야기를 정면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하나둘 정리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최근 들어 내가 아나스타샤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가 날 피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내가 쫓아가서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지금 우리 관계는 굉장히 기이했다.
아나스타샤는 용기를 내어 나와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을 종용한 난 그녀가 좋은 결과를 내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나스타샤와 정면으로 다시 마주할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이 중요한 시기에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다는 건 정말 이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쩐지 참을 수 없어졌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오기가 생기네요.”
“……용기가 아니라?”
“전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요.”
에르네스트에게 강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고 그냥 보낸 건 그의 고집을 구세프 선생님도 꺾지 못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에게 혹시라도 밉보일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피아노가 아닌 작곡에 보다 진심으로 뛰어드는 그에게 난 그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가만히 지켜보고 응원하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이야기하지 못한 것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거나 진정한 라이벌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겁이 많았던 탓이었다.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난 원래 당위 없이 움직이지 못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건 조심스러움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로 쓰이고 있었다.
전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새삼 깨닫고 나자 보다 확실해졌다.
“노력해 볼게요. 당장 지금부터.”
“응?”
“리허설 가시는 거죠? 같이 가요, 카밀레.”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증명해 나간다.
마치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뜨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그게 내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카밀레는 너무 갑작스럽게 그럴 필욘 없다는 듯 말했다.
“괜찮겠어?”
“괜찮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드릴게요.”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월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비나 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무덤덤하게 밖을 바라보았다.
등교 전까진 그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늘의 색을 보니 잠깐 내리고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최소 오전 내내 내릴 비다.
비를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씨가 어떻든 내가 할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침 연습을 재개했다.
‘협주곡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
지난 토요일,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리허설을 한 뒤로 협주곡에 대한 이해와 완성도가 많이 올라갔다.
3시간도 넘게 진행된 강행군에 아르투르 지휘자님이 적극적으로 앞장서 주신 덕분이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완벽한 집중력으로 3시간 내내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소리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연주에 모든 걸 쏟았고, 그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와 난 약속했다.
오케스트라는 며칠 후 있을 연주회에서 청중들을 놀라게 하고, 난 다음 달 콩쿠르 무대에서 심사 위원들을 놀라게 만들기로.
목표만 다를 뿐 같은 목적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이번엔 리허설 대체 협연자로 몇 번 함께했을 뿐이지만, 언젠가 정말로 이 오케스트라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게 되리라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곡들도…….’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예선에서 쓸 독주곡들도 충분하게 준비해야 한다.
난 다시 손끝에 신경을 집중하며 피아노를 제어했다. 어제보다 더 예민하게 모든 것들이 느껴진다.
이미 내 감각은 한계를 몇 번이나 돌파했다. 예전을 떠올리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곧 잠재력의 우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불안감은 이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언젠가 바닥이 나타난다면 그걸 더 깊게 파고들어 갈 뿐이다.
“…….”
피아노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착실하게 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내 내면 속 깊은 곳에 쌓여 있는 것들이었다.
콩쿠르를 앞두고 이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카밀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도 똑바로 못 하고 서먹해져 있는 건 결코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다투거나 한 것도 아닌데.
존중이니 인내니 하는 합리화로 납득하려 하고 있었지만, 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혼자서 계속 침잠하고 있었을 뿐이다.
계속해서 내가 이 불안함을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면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불쑥 튀어나와서 날 흔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전에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마치 음악의 완성이 그렇듯.
“후.”
피아노 소리엔 내 각오가 섞여 나온다.
난 그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