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화
등굣길 내내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주말 동안에도 아나스타샤와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도 유야무야 넘겨 버린다면 그녀와 정말 어색해질 것 같았다.
한번 붙잡고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치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이제 중요한 건 어떻게 적당한 타이밍에 그녀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보려 하면 아나스타샤가 본격적으로 날 피하려 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난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무작정 떼라도 써 보고 싶다. 필요하다면 경어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성이 반쯤 날아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반말과 달리, 목적을 가지고 멋대로 군다면 자신을 가지고 놀려고 든다고 아나스타샤에게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난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어 내 뜻대로 휘두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최대한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었다.
‘쉽지는 않겠지…….’
내가 느끼는 마음은 복합적이었다.
콩쿠르에 대한 압박감, 최선을 다해 결과를 내더라도 후회할지 모른다는 예감.
우리 관계가 얇은 얼음 위에 올라선 것처럼 생각보다 더 아슬아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경쟁자이자 친구로서 더 많은 확신을 쌓고 깊은 유대감을 얻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에 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내가 느끼는 아쉽고 답답한 마음은 말로 전하기가 참 어려웠다.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면 너무 부담스러워할 테고, 그렇다고 가볍게 이야기하면 유치하고 사소하게 느껴질 터.
적어도 이상하게 들리진 않도록 잘 정리를 해야 했다.
“…….”
어떻게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여전히 밖엔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빅토르가 우산을 들고 날 에스코트하려고 하길래 재빨리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그를 말렸다.
“잠시만요, 빅토르.”
“왜 그러십니까?”
“잠깐 앉아 있다가…… 갈게요.”
이대로 교실로 올라가서 아나스타샤를 기다리면 안 된다.
교실은 친구들이 많아 아나스타샤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렵고, 잠깐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해도 눈치 빠른 그녀는 바로 피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야생 동물은 한 번 놓치면 경계심이 높아져서 더 포획하기 어려워진다.
이번에 그녀를 놓치면 그다음은 훨씬 더 어색하고 힘들어질 것이다.
친구를 야생 동물로 대하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지 않았나 싶지만, 난 그만큼 절박했다.
긴장하며 비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아나스타샤가 보이면 바로 나가서 따라붙을 생각이었다.
창밖만 보고 있자 빅토르가 슬쩍 물었다.
“누구 기다리십니까?”
“예.”
“음…… 아나스타샤 양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소거법이죠.”
빅토르의 말대로 소거법으로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추리는 아니었다.
통학하는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는 모스크바에 없고, 기숙사에 사는 아이들은 이쪽 길로 오지 않으니까.
그는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선글라스를 괜히 추켜올리더니 이어 말했다.
“거기에 또 교실로 바로 올라가지 않으시는 이유를 소거법으로 추려 보면…….”
“아가씨 앞에서 소거법거리지 마라, 빅토르. 이 세상에서 소거시켜 버리기 전에.”
그런데 장난기 가득한 빅토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소로킨이 협박조로 말했다. 빅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내 기분이 상했을지 살피는 눈치였는데,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고 아나스타샤와 어색해져 버린 건 내 책임이었다.
빅토르에게 놀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창피해 하고 반성하고 있다.
“괜찮아요, 소로킨. 빅토르가 잘 맞췄는걸요.”
“설령 맞다 한들 입 밖으로 낼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아하하, 정말 괜찮은데.”
간신히 웃음으로 소로킨을 진정시키고 나자 빅토르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나 역시 미소를 보냈다.
차라리 장난을 주고받는 편이 나았다.
난 혼자 있으면 너무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곤 하니까 빅토르처럼 가벼운 농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좋다.
그의 생각을 조금 들어 보고 싶기도 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서 말을 더 걸어 보려던 찰나였다.
“저기 옵니다.”
“앗.”
빅토르의 말에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삼삼오오 등교하는 학생들 가운데 키 큰 여학생 한 명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그게 아나스타샤라는 건 걸음걸이에서부터 느껴졌다.
난 허둥지둥 가방과 우산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빅토르는 먼저 우산을 들고 나가는 대신 갑자기 내 쪽으로 무언가 건넸다.
“이거 가져가시죠.”
아무 생각 없이 받고 보니 캔 커피였다.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건 빅토르도 잘 알 텐데, 이걸 왜 준 건지 모르겠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이게 뭐냐고 물어볼 시간도 없어서 그대로 쥐고 차 문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펼치고 고개를 들었다.
“…….”
여전히 특별히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반에 들어가기 전에 아나스타샤와 마주하겠단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핑계를 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어그러진 우리의 관계에 바로 맞서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바꿔 보고 싶었다.
앞으로 두어 걸음 내디디며 아나스타샤를 다시 찾아보는 순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날 보고도 그냥 무시하고 갈 생각은 없는지, 그녀는 똑바로 내게 다가왔다.
“타티아나.”
내가 이제 막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부름에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서자 아나스타샤가 밝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라기엔 비가 오네.”
하늘에서 내리는 것들을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안다.
하지만 오늘은 뭐든지 좋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반가운 봄비니까 충분히 좋은 아침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네.”
아나스타샤의 눈빛에 살짝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으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우산을 어깨 뒤로 조금 더 젖혀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시크하게 대답했다.
우산을 드니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보인다.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자 그녀는 이렇게 서 있을 필요는 없다는 듯 학교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돌렸다.
“올라가자.”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이야기하고는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면서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만난 건 좋았다. 아나스타샤는 친근하게 먼저 다가와 인사했고, 자주 웃어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녀가 형식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뒷모습을 봐도 여전히 거리감이 멀다. 우리의 관계가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대로 교실로 올라가 버리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게 무의미해진다. 그 전에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잠깐만…….’
그런데 교내로 들어가 첫 계단을 오를 때까지도 난 고민하기만 했다.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아나스타샤가 형식적인 태도마저도 싹 치워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에 겁먹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똑바로 이야기도 못 하고 에르네스트를 보낸 후부터였을까. 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소심해져 있었다.
“…….”
말없이 따라가고 있는데 계단을 두어 걸음 올랐을 때, 아나스타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난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도 난 계단에 서면 섬뜩한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설마 아나스타샤도 나와 같을까.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내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에 그건 뭐니?”
“아, 이거요? 캔 커피요…….”
“그걸 왜 들고 있어? 넌 커피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러게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빅토르가 쥐여 준 건데 왜 준 건지도 모르겠고, 적당히 답할 만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건 어린애 같은 반항적인 대꾸였다.
“마실 순 있어요. 안 마실 뿐이지.”
“같은 말 아니야?”
“다르죠. 지금 마셔 볼까요?”
왜 이런 유치한 말이 튀어나오는 건진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로 딸 것처럼 캔 커피를 양손으로 잡자 아나스타샤가 도로 계단을 내려와서 나랑 같은 높이에 서더니 말했다.
“그냥 나한테 줘. 내가 마셔 줄게.”
“……마셔 주다뇨? 뺏으시려는 건가요?”
“진짜로 네가 마실 거였으면 왜 아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들고 있던 건데?”
사실 어떻게 할지 몰랐던 건 캔 커피 같은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난 왜 그녀의 반응을 걱정하면서도 유치하게 반항하듯 굴고 있는지 자각했다. 그냥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로.
“여기요.”
길게 말할 힘도 없어서 캔 커피를 건네주니 아나스타샤는 호쾌하게 따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되게 쓰다. 잠이 확 깨네.”
“괜찮으세요?”
“난 이런 거 잘 마셔. 천천히 마시면 돼.”
그녀는 캔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계단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 너무 불안하다.
같이 계단을 내려오자 자연스레 아나스타샤는 인적이 드문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
비 내리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물었다.
“주말엔 뭐 했니?”
“주말에……. 아나스타샤는요?”
그녀는 침음을 흘리며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야 연습실에서 온종일 있었지.”
그 대답이 전부였다. 대화가 순간 뚝 끊어졌다.
난 이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안다. 근래 에르네스트와 이야기할 때마다 느꼈던 분위기였다.
정말 아나스타샤가 나와 대화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을 맺을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습하는지 정도는 말해 줬어야 했다.
살짝 우울함을 느끼면서도 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도 비슷해요.”
“아직 오케스트라랑 연습하니?”
“예. 토요일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랬구나.”
오케스트라에 대한 질문도 여기서 끝이었다. 그 이상 묻지 않는다.
다시 캔을 입에 대는 아나스타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차분하고 쿨해 보인다. 콩쿠르를 앞둔 연주자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불안한 내가 미숙하고 이상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와 임세연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잘해야 하는데…….
‘잘하려면 지금부터지.’
살짝 움츠러들던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 허리를 곧게 폈다.
아나스타샤도 우리가 좋은 연주자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겠지. 다른 의도를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걸 믿고 직접 물어보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카밀레가 말했듯, 대답을 듣기 전까진 내 생각일 뿐이니까.
난 일부러 팔짱을 끼고 서서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연습이 쉽지 않더라고요. 최선을 다해도 어쩐지 잘못될 것 같고…….”
“……정말?”
“그렇지 않나요? 워낙 큰 콩쿠르이니 준비할 것도 많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아나스타샤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내가 애먹고 있다는 말에 보인 아주 작은 반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벌써 기뻤다.
괜히 떠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감정을 추스르며 이어 말했다.
“아무튼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같아서…… 오케스트라에서 친해진 분께 상담을 하기도 했어요.”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흥미를 보였다. 어떤 종류의 흥미인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분이 무어라 하셨는지 아세요?”
“글쎄?”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래요.”
“……응?”
아나스타샤는 다시 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당혹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날 돌아보았다.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카밀레가 내게 해 준 말은 굉장히 기본적인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단번에 설득되었을 만큼.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당황스럽다는 듯 다시 물었다.
“나?”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조금 슬퍼졌다.
“예. 같은 콩쿠르에 나가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공감대를 만들어 도움이 될 거라 하셨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단어나 문장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었다.
지금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자 바로 생각난 단 한마디가 하고 싶었다.
“혼자서 연습 잘되시나요?”
언뜻 시비조로 들리기까지 하는 내 당돌한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니, 잘 안돼.”
그녀가 연습이 잘되어 간다고 답했어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잘 안된다고 하니 더더욱 속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