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0화
연습이 혼자서 잘 안되면 날 찾으면 되잖아.
우린 함께 음악을 공유해 온 시간도 길었고, 앞으로도 같은 무대를 준비하면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집스럽게 혼자 준비하는 것을 택했다. 그 모습은 에르네스트와 많이 닮아 있었다. 두 사람 다 날 너무 힘들게 한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우흐흐.”
그녀가 웃는 모습을 늘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정말 화가 나려 한다.
오늘은 그동안 섭섭했던 부분들을 제대로 이야기하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상태였다. 난 그 각오를 입에 물고 이야기했다.
“왜 웃으시는 건가요?”
“다른 게 아니라…… 네가 오케스트라 사람에게 상담을 받았다는 게 신기해서…….”
“예?”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입을 벌렸다.
갑자기 왜 웃나 싶었다.
내가 카밀레에게 상담한 것을 바보 같다고 비웃거나, 내 나약함을 꼬집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 일을 두고 묘한 반응을 보였다. 신기하다니? 상담이라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어리둥절해져서 그녀를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넌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려고 꼭 끌어안고 있기만 하잖니? 그런데 누군가에게 상담이라니…….”
“그게 신기할 정도의 일인가요?”
“약간?”
어른에게 상담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생각한다. 별로 창피할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상식에 의거해 이루어진 내 의식과 달리 솔직한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꺼리고 있었다.
제대로 다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말한다고 한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란 강한 확신이 내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나의 고집스러운 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간 오래 봐 왔으니 내 성격을 파악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조금 기뻤다.
그리고 기쁨을 느끼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난 왜 이렇게 단순할까.
아나스타샤의 눈빛에 장난기가 맴돈다. 거기에 대한 약간의 반발심으로 쏘아붙였다.
“전 아나스타샤의 관점이 더 신기해요. 대체 절 어떻게 보고 계셨던 건가요?”
“아하하하, 화내지 마. 미안해.”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난 이런 대화에서도 그녀를 이기지 못할 거란 걸 직감했다.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도 비슷하니까 뭐……. 우린 약간 닮은 꼴인 거지.”
그런 말을 듣기만 해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단순한 자신을 재차 느낀다.
여기서 아나스타샤가 대충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를 던지고 상황을 넘기려 했다면 아마 난 이번에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캔 커피를 든 그녀는 말을 맺고도 마치 동의를 구하듯 빤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지려고 하는 신경을 곧게 다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비슷함은 같은 또래의 연주자라는 데에 있지 않았다. 성격이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정말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화려하고 쿨한 아나스타샤와 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성격도, 스타일도, 관점도 모두 다르다.
평소 난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렇게 보고 있으니,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가 떠올랐다.
우린 말을 아끼고 잘 참는 편이었다. 그 점은 어떨 땐 서로에게 단단한 밧줄이 되어 주고, 어떨 땐 높은 벽이 되기도 했다.
난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다가 뾰족하게 툭 던졌다.
“비슷한 것 맞나요, 정말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아나스타샤도 혼자 인내하면서 콩쿠르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쇼팽 콩쿠르에 나간 친구들의 일을 그렇게 남의 일처럼 취급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살짝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놓치지 않고 물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볼게요. 정말로 바르바라나 발렌티나 걱정은 안 되세요?”
“무슨 말이야? 그럴 리가?”
“그렇다면 왜 저번 주 금요일엔 그렇게 태연하셨던 건데요?”
난 그날 아나스타샤의 태도를 똑똑히 기억한다.
선배들의 일에 쇼크를 받은 두 사람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전해 주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아 했다.
큰 콩쿠르 앞에선 실력 발휘를 못하거나 친구 사이가 망가지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결정적으로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누구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그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설마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니?”
“별것 아닌 것처럼 말씀하실 게 아니에요. 심각한 일이잖아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니 아나스타샤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창가에 캔 커피를 내려놓고는 살짝 기대었다.
“심각하지.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 같이 이야기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나중에 따로 전화했으니까 걱정 마.”
“따로 하셨다고요?”
“응. 발렌티나가 화내더라.”
나도 발렌티나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혼났다. 그녀가 진짜로 전화를 한 건 맞는 것 같았다.
주말 내내 혼자 연습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고 하면 진심으로 한마디 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안 보는 사이 전화를 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힘을 풀자 아나스타샤가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내가 그 애들한테서 신경 끄고 있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네.”
“……그렇게 행동하셨어요.”
“자각 없는 행동이었어. 미안해.”
정말 후회한다는 듯 그녀가 사과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과 정도는 바로 받아 주겠지만 그래도 난 궁금했다.
어차피 폴란드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나와 라리사가 보는 앞에서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모두가 알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냉정하게 굴더니 혼자 있을 때 따로 전화를 했다.
그건 우리를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괜한 억측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지금까지의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면 달리 볼 수가 없었다.
“핑계를 대 주세요.”
“뭐?”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도 이해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앞으로도……. 아, 내 태도 말이구나.”
사실 나도 잘한 것 하나 없는 상황이니 이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반격하는 대신 순순히 인정했다.
아예 폴짝 뛰어올라 창가에 걸터앉은 채로 아나스타샤는 잠시 고민했다.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다리에서 그녀의 갈등이 느껴졌다.
대답하기 어렵다면 굳이 강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렇게는 안 되나 보네…….”
“……뭘요? 어째서요?”
“음…… 네가 말한 대로 핑계를 대자면, 에르네스트도 결국 그렇게 떠났는데 내가 멋대로 굴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이름이 왜 나와요?”
놀라기도 했고, 당황스러웠다.
먼저 핑계라도 대 달라고 한 건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다른 이의 이름을 턱 하고 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우려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에르네스트에게 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와 있었던 일이 이유였을 뿐이다.
“나 사실 그 애랑 조금 다퉜어.”
“……?”
“그 애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아나스타샤가 남을 핑계 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선배들이 다퉜다는 소식만 듣고도 내가 힘들어했던 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그…….”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안 좋은 생각들이 계속 맴돌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왜 그랬냐고 할 수도 없고, 에르네스트는 이미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아니, 이렇게 될 때까지 난 뭘 했지?’
갑자기 이야기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어져서 맥이 탁 풀렸다.
그런 날 진정시킨 건 조용히 내려다보는 아나스타샤의 눈빛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말로 날 흔들려 들지도 않고. 그러니 억측을 앞세워 안 좋게 받아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을 필요가 있었다.
난 다시 그녀의 말을 짚어 보았다. 조금 다퉜다는 건 말 그대로 조금이겠지. 그리고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사실 그런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에르네스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따졌던 적이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의미로 다툰 것이라면 나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침착한 태도로 바라보자 그녀가 이어 말했다.
“자세히는 말 못 해. 다만 그걸 구세프 선생님도 반대했다는 것만 알아 둬.”
“그건 들었어요.”
“들었니?”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바를 말했다.
“작곡 콩쿠르에 나가려는데 그걸 선생님이 반대하셨다고……. 선생님은 연주자로서 회복하길 바라실 테니까요.”
“음, 그렇겠지. 그래서 나도 반대했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씩 차분해졌다.
아직 회복에 전념해야 할 에르네스트가 다시 활동에 나서겠다고 결정한 것을 듣고 나도 속으론 반대하고 싶었다.
단지 떠오르는 이유들이 터무니없었고,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 나와 달리 구세프 선생님과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낸 것뿐이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처럼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제대로 사리 분별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랬는데 그 애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가 버렸지. 사실, 그 애도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나도 내키는 대로 하려고 했어. 신경 쓰지 않고 우리끼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열심히 준비해서 즐겁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딱 내가 그리고 있던 바를 아나스타샤 역시 똑같이 그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이어져 있는 복잡한 이야기들을 매듭짓기 전에 큰 무대에서 음악으로 놀며 깊은 동질감을 확인하는 건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약간 갈등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 애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더라고.”
뭘 따라간다는 걸까.
연주자로만 놓고 보자면 요즘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한창때의 에르네스트 못지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아마 더 좋아질 터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면 어떨까.
세계적인 천재들과 하는 경연을 앞두고도 내게 신경을 쓰는 건 그리 합리적이지 않겠지.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다잡을 이유를 찾아낸 것 같다.
그녀의 마음을 살짝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김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컨대, 별 이유 없었어.”
“뭐……라고요?”
“그냥 그 애가 하듯 나도 혼자서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거니까.”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면 그동안 가슴 졸였던 난 뭐가 되는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자 아나스타샤가 급히 사과했다.
“아하하하, 미안해.”
“말로 끝낼 생각이신가요?”
“어쩌지…….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래?”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모습이다.
나도 이번만큼은 단순히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녀가 정말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혼자선 연습도 잘 안되고, 괜히 슬럼프만 더 오는 것 같고……. 그 와중에 애들은 힘들어하고…….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
아나스타샤가 모종의 이유로 날 불안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면 난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다.
이미 과거의 일 같은 건 모두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안개를 붙잡으려 해 봤자 소용없겠지. 대신 난 불평하듯 한마디 했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치사해요, 아나스타샤.”
“응? 그러니? 난 되도록 페어플레이 하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아나스타샤는 내 불평에도 당당하게 받아쳤다. 할 말이 없어진 난 결국 두 손을 다 들고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