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1화
아나스타샤는 남은 캔 커피를 다 마셔 버리고는 걸터앉아 있던 창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거 어디다 버릴까…….”
그리곤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쓰레기통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나와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괜한 어색함을 어떻게든 무마시켜 보려는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아나스타샤와 몇 번이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번엔 우리 둘 다 비슷한 문제를 지칠 때까지 끌어안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
아나스타샤는 괜히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창밖을 보고는 아직도 비가 온다며 날씨 이야기를 했다. 난 그녀를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지막엔 장난처럼 별것 아니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그녀도 요즘 꽤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와 말다툼을 했다면 그 뒤 마음이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나처럼 죄책감을 여전히 떨쳐 내지 못했을 테니까.
직접 이야기하진 못하겠지만, 나와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길 바랐다.
그건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어떠한 책임감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우리의 마음을 외면하고는 떠나 버렸다. 자신에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한 셈이다.
문제는 에르네스트가 그토록 확실하게 음악가로서의 일에 집중하길 종용했다는 걸 알면서도, 난 잡념에 더 휘둘려 버렸다는 점이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애를 볼 낯이 없네…….’
섭섭함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진의를 알았다면 아나스타샤와 더 잘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난 고립감과 무력감을 조금 더 크게 느꼈다.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선 아나스타샤는 그와 다퉜다는 것 자체에 더더욱 죄책감을 느끼고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을 뿐이다.
그녀에게 더 자세히 묻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니?”
“그냥요.”
“네가 그냥이라고 할 때가 제일 무서워.”
“그럴 리가요. 제가 어딜 봐서 무서운 사람인가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양팔을 벌려 보였다. 어딜 봐도 난 남에게 위협적인 사람이 못 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큭큭 웃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딜 봐도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난 불만스럽게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나스타샤는 세상에 두려운 것 없이 강해 보이지만, 평범하게 걱정도 많고 무서워하는 것도 있는 사람이란 점이었다.
되도록 아나스타샤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부턴 서로 걱정되는 일은 다 말하는 거예요. 아셨죠?”
“엑, 갑자기?”
“도와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혼자서 연습하는 게 안 된다면 내가 옆에서 들어 줄 수 있다.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같이 옆에 있어 줄 수도 있고.
“대화는 반드시 하는 편이 좋아요. 카밀레가 옳았어요.”
“카밀레?”
“아까 말씀드렸던…….”
“아, 오케스트라 사람?”
“예.”
만약 카밀레와 친해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고 먼저 말하지 않았을 테고, 나도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상담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 등 다른 어른들에게 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기에 아마 난 혼자서 잔뜩 곪은 고민을 안고 가야만 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난 이어 말했다. 카밀레의 덕이 컸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상담을 받아 준 덕분에 이렇게 아나스타샤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연주회 마치고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인사를 해야겠어요.”
“그냥 나한테 바로 이야기해도 괜찮았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 지쳐 버릴 때까지 속으로만 앓았던 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아나스타샤가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나와 제대로 이야기할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말을 했을 테니까.
가만히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가리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그러니까 걱정되는 거…… 음, 뭐가 있지?”
“오늘은 바르바라가 무대에 서는 날이죠.”
“아, 그렇지.”
중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쌓여 있다.
난 그중에서도 당장 염두에 두고 있던 것들을 꺼내어 이야기했다.
“그리고 싸웠던 선배들이 학교에 오는 날이기도 하고요.”
주말 동안 선배들도 연락을 하고 다시 화해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비행기를 따로 타고 올 정도로 틀어진 사이가 그렇게 며칠 만에 바로 회복될 것 같진 않았다.
주말 동안 약간 진정했을지는 몰라도 아마 여전히 서먹한 사이겠지.
아나스타샤는 내 걱정을 알면서도 냉정한 눈빛을 했다.
바르바라나 발렌티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지만, 단순히 선배들만 놓고 보자면 이 이상 신경 쓰는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사실 그건 우리랑 별 상관이 없지 않니?”
“맞아요. 상관없죠.”
“하지만…… 콩쿠르에 나갔다가 사이가 틀어져 돌아온 사람들을 본다는 건 기분이 좀 안 좋긴 하지.”
아나스타샤는 본인이 한 말에 반론하며 내 생각에 따라오려 노력했다. 그리고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 단순히 기분이 안 좋은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합리적인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녀도 그 끔찍한 예감을 완전히 무시하진 못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전조나 맥락 없이도 틀어지는 것이 관계다.
우리는 심지어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불안한 상태를 이어 나가고 있다.
“…….”
친하지도 않은 선배들의 일에 내가 겁을 집어먹은 건, 내가 붙잡고 있는 관계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계속해서 내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사그라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우린 그런 일 없을 거잖아?”
그런데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가벼운 어투였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로 내 머릿속을 꿰차고 있던 불안한 소리가 사라져 갔다. 이렇게 간단히 편해질 줄은 몰랐다.
분명 바라던 답이긴 하지만, 내 안의 교활함은 가볍게 상황에 동조하지 않았다.
“모르죠.”
“……진짜 너무해.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하신 것에 대한 복수예요.”
너무 심각한 건 바라지 않았으므로 장난을 치듯 말하긴 했지만, 그 진의를 아나스타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거리를 뒀던 것에 내가 상처를 받은 걸 굳이 꼬집어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이유가 있었고, 나도 잘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나 진심을 전하지만 않으면 우리의 관계도 어떻게든 유지될 거라는 바람이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한 번 있었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내게 할 말이 많겠지. 그렇다면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내가 생각보다 더 많이 제멋대로 굴었구나.”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사과를 구하듯 다가왔다. 난 피하지 않고 그녀와 마주했다.
자연히 나보다 키가 큰 그녀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난 우리가 지금 동등하게 마주하고 있음을 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팔짱을 꼈다.
“같이 해외에 나가는 건 처음이지?”
“그렇네요.”
“벨기에에 가는 거랑 머무는 건 어떻게 하기로 했니?”
이제 벨기에로 떠나기까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콩쿠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DVD 예선에 통과함과 동시에 비행기 티켓과 숙식 등을 모두 보장해 준다.
물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움직여도 상관없다. 전용기를 쓰고 호텔에 머물더라도 제시간에 무대에만 서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난 이미 마음을 정해 두었다.
“전 콩쿠르 측에서 제안하는 기본적인 방식을 따르기로 했어요.”
“호스트 패밀리를 만나 지내려고?”
“예. 대부분 그렇게 할 테니.”
조금 더 쾌적하고 안정된 방법을 고를 수도 있겠지.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나 혼자서 그 정도 할 능력은 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나 임세연을 설득해서 모두 함께 갈 수 있다면 모를까, 나 혼자 하긴 싫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그렇게 할 예정이야. 전부 제공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럼…… 각자 다른 호스트 패밀리에 머물겠네요.”
아마 참가자들이 많은 예선에선 서로 얼굴을 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각자 살아남아 큰 무대로 가기 위해 온 신경을 쏟는 것만으로도 힘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도 아마 거기서 제일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 둘뿐일 거야.”
콩쿠르 참가자로서의 고민을 호스트 패밀리로 의탁하는 가정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긴 어렵다.
하지만 우린 전화로 얼마든지 고민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도 팔짱을 풀고 손가락을 하늘 쪽으로 세웠다.
“그러니까 되도록 후회 없이 즐겁게 하고 오자. 만약 선배들 같은 일이 생기더라도 꼭 오늘처럼 이야기하고 말이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예선부터 결승까지 한 달간 진행된다.
만약 결승 무대까지 갈 수 있다면 아무 트러블 없이 순탄하게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모두 예민해지기 마련이니 평소와 다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을 감안하며 아나스타샤는 내게 약속해 주었다. 난 그녀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았기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해 주시길 바랐어요.”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안심한 것처럼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삐딱하게 대답할까 봐 상당히 긴장했던 것 같다.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다시 분명하게 전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나스타샤를 미워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내가 혹시 화를 내더라도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그러나 지금 전하면 그녀 역시 비슷한 말을 들려줄 테고, 우린 다시 맹목의 굴레로 엮일 테다. 지금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편이 좋다.
대신 난 그녀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오늘 바르바라의 무대 같이 봐요.”
“걱정되니?”
“조금이요.”
“그 애는 잘할걸?”
사실 발렌티나가 옆에 있으니 그렇게 큰 걱정이 되진 않는다.
발렌티나는 바르바라와 같이 놀면서 잊을 건 잊고 집중할 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주말 동안 두 아이는 충분히 프로 연주자로서의 자세를 다잡았을 테다. 우린 응원만 보내면 된다.
“전화를 한번 해 보는 게 좋을까요?”
“응원 전화? 그것도 괜찮겠지.”
“응원이기도 한데…….”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왜 그러니?”
말끝을 흐리자 아나스타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난 살짝 고민에 잠겼다.
폴란드에 있는 두 사람에게 응원 말고 무엇을 더 해 주어야 할지 생각해 보다가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약속이었다는 걸 떠올려 냈다.
“아.”
“뭔데? 어…… 옐브루스 선배네?”
난 선배들을 혼내 주기로 발렌티나와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자신감에 넘쳐서 그런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을 뿐, 사실 지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선배도 지금 기분이 딱히 좋진 않을 텐데 내가 다짜고짜 따지고 들면 순순히 들어 주기보단 맞대응할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아마 혼자였다면 조금 더 고민해 봤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어떻게 할래?”
그녀는 마치 장난스러운 악동처럼 물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알겠다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