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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32화 (1,032/1,277)

##  1032화

모스크바의 비는 굉장히 차갑다.

날씨가 조금만 추웠다면 눈이 될 수도 있었던 물방울들이 운 없게 비가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구한 물방울들을 우산으로 튕겨 내며 옐브루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고 난리야…….”

괜히 그는 중얼거렸다. 어쩐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원래는 홀가분하고 기뻤어야 할 시기였다. 쇼팽 콩쿠르 예선전이라는 큰 무대에서 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왔다.

지도 선생님은 통과를 가정하고 본선 준비를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들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고, 아는 음악가들로부터 연락도 많이 받았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만약 예선 통과만 해도 상당한 커리어를 손에 쥐게 된다.

그건 앞으로 피아니스트로서 살아가는 데에 굉장한 이득이 되어 줄 것이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모든 것이 잘 풀린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옐브루스의 첫 단추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야 마땅했다. 그는 그걸 누릴 자격이 있었다.

“…….”

비 때문에 기분이 별로인가 싶었는데, 사실 주말 내내 찝찝했기 때문에 비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가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첫 단추를 잘 꿰는 데에 실패한 친구 때문이었다.

‘잘 좀 하지…….’

그의 친구 비탈리는 갑작스러운 트러블을 마주하고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콩쿠르 측에선 분명 빠르게 대처하고 비탈리에게도 유연하게 기회를 제공했다.

시간을 두고 저녁 세선에 출전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러나 비탈리는 몇 시간 정도 시간이 주어져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옐브루스는 같은 연주자로서 그 판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꾸준히 준비하고 텐션을 유지하며 무대에 올랐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대로 내려와 버리면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엔 몇 시간으로 어림도 없다.

만약 저녁 세션에 참가하란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가 망치기라도 한다면 자칫 배려까지 받았는데 실력도 없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비탈리는 그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바로 이어서 연주를 끝마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건 실수가 되어 버렸지만.

“…….”

옐브루스의 찝찝한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냉정하게 보자면 옐브루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비탈리는 그저 국제 콩쿠르가 첫 참가라 경험과 노련함이 부족해서 잘 해내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11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함께 피아노를 배운 비탈리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걸 제대로 큰 무대에서 못 보여 준 것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실패가 옐브루스 자신의 성과를 솔직하게 즐기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실패한 친구에게 말실수를 해 버린 것이었다.

‘대체 왜 그런 소릴 했지…….’

걸음을 멈추고 옐브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를 마치고 만난 비탈리는 초췌해 보였다.

그 모습이 딱하긴 했지만 옐브루스는 자신이 거기에 공감한다는 듯 말하는 것 또한 위선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실신시킬 정도였으니 우승감이지 않느냐고 한 건 확실히 도를 지나쳐도 너무 많이 지나친 말실수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런 위로가 익숙하지도 않은데, 괜히 머리를 굴리다 보니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수습도 어려운 말이 나와 버린 것 같았다.

그 말을 하자마자 두 후배가 옐브루스를 사납게 비난했고, 비탈리 역시 분노를 표했다.

차라리 그때 바로 사과했다면 좀 나았을까.

“…….”

하지만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 버렸다.

비탈리와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각자 돌아왔고, 주말에도 연락 한 번 안 했다. 아마 학교에서 봐도 어색하기만 하지 않을까.

차라리 본선에 빨리 진출해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모르겠는데, 문제는 쇼팽 콩쿠르의 본선은 반년 후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옐브루스는 계속 본선 준비를 해야 한다. 비탈리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리라.

결국 그렇게 되면 옐브루스 역시 비탈리를 더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조금 공허했다.

어차피 인생은 고독하게 사는 것이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터무니없을 줄은 몰랐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내린다. 옐브루스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학교로 향했다.

“…….”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등교하는 학생들은 적어 보였다.

모두 비를 피하는 데에 바빠서 옐브루스에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옐브루스는 교내로 들어섰다. 우산을 접고 반으로 향할 때였다.

‘저 애들은…….’

생각 없이 복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두 여학생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눈에 확 띌 정도로 화려하다. 10학년의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였다.

두 후배와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경력에 비해 8학년에 편입을 와선 조용히 학교를 다녔던 터라 친해질 기회가 적었다.

아나스타샤는 반대로 어릴 때부터 너무 유명한 아이여서 친해지기 어려웠다.

다행히 공동 리허설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사 정도는 하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약간 이상했다.

‘……뭔가 다른데.’

생각보다 착한 두 사람이니 아마 말을 걸면 콩쿠르 이야기를 하면서 응원해 주겠지.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가까이 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단순히 미인으로 유명한 후배들이라서가 아니었다. 되레 불량배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험한 골목에 발을 막 디디면 느낄 법한 서늘한 기분이 든다.

“?”

옐브루스는 자신의 망상이 어이없었다.

아나스타샤라면 조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타티아나가 불량한 행동을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공동 리허설 때 옐브루스가 타티아나에게 무작정 조언을 구했던 건 그녀가 진중하게 대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베르체노프라는 어마어마한 가문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평범한 학생들과는 수준을 달리할 정도로 품위 있게 행동했다.

또 학교 제일의 모범생이었다.

그 막 나가는 아나스타샤도 타티아나와 친해진 후로는 그녀에게 물들어서 얌전해졌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바로 타티아나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그냥 갈까…….’

거리가 꽤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옐브루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뭔가 놓고 온 것이 있는 척 돌아간다면 아마 계속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후배 여자애 두 명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길을 돌아가는 것도 정말 웃긴 일이었다.

물론 보통 아이들이 아니긴 하지만 자신도 쇼팽 콩쿠르 예선에 갔다 온 몸이다. 위축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지금 대화 중인 것 같으니까. 괜히 방해할 것 없이 스쳐 지나가면 된다. 옐브루스는 그렇게 결정하고는 조용히 다가갔다.

그런데 열 걸음 정도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

마치 레이더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동시에 옐브루스를 돌아보았다.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모델이라 해도 믿을 만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니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굳어 버린 옐브루스를 보며 두 사람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옐브루스 선배님.”

자기도 모르게 당황해 있던 옐브루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왠지 모를 압력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꼴사납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에 답했다.

“두 사람 다 안녕.”

설마 날 기다리고 있었냐고 하진 못했다. 그런 농담을 했다간 바로 양쪽에서 난타당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대충 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그런 그를 아나스타샤가 말로 붙잡았다.

“바로 귀국하셨네요?”

“뭐…… 거기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선생님도 괜히 돌아다닐 생각 말고 바로 돌아오라고 하셨고.”

“참 고지식하죠? 우리 학교 선생님들.”

“그, 그런가?”

유도 신문인가?

하지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 주는데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었다.

별수 없이 옐브루스는 그 옆에 서서 그녀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스타샤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 나갔다. 지금 꺼내기 가장 편한 주제는 역시 하나뿐이었다.

“콩쿠르 무대 봤어요. 역시 잘하시던데요. 충분히 통과하실 것 같아요.”

“칭찬 고마워.”

“넌 어떻게 생각하니? 타티아나.”

조용히 있던 타티아나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옐브루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도 비슷한 감상이에요. 가시기 전에 봤던 공동 리허설 때보다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들렸다니 다행이네.”

“그때 제가 주제넘게 단점이라 말씀드렸던 것들, 잘 받아 주신 것 같네요.”

타티아나는 단정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조언에 대한 겸허, 그리고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한 것에 대한 칭찬 등이 한데 섞여 있었다.

옐브루스는 그녀가 잔뜩 잘난 척을 하면서 다 자기 덕분이지 않느냐고 묻더라도 웃으며 그렇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공동 리허설 자리에서 해 주었던 짧은 조언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주제넘다니? 내가 요청했던 거잖아.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후후, 그때 제 앞에서 단점을 지적해 달라고 하셨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그건 미안해. 나야말로 경우가 없었지.”

“그래도 진심이셨다는 건 알아요.”

예전 이야기들을 조금 나누자 분위기가 절로 화기애애해졌다.

이렇게 착한 애를 왜 무섭다고 생각했을까. 옐브루스는 자리를 피하려고까지 했던 자신이 정말 이해가 안 갔다.

낮게 웃으며 옐브루스는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난 항상 음악엔 진심이니까. 너도 그렇지?”

“저도 그래요.”

“그래,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이라면 믿고 들어도 될 것 같더라고.”

타티아나가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거의 완성된 음악을 구사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옐브루스는 후배가 아니라 동등한 피아니스트로서 그녀를 대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예상컨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타티아나는 분명 굉장한 결과를 거두어 올 것이다.

그때 옐브루스는 자신의 심미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며 옐브루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타티아나가 살짝 더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넘은 소리 조금 더 해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하하하, 괜찮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편하게……. 음, 그럴까요.”

잠시 생각하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에게조차 경어를 풀지 않는 타티아나가 설마 평대를 하려나 생각한 옐브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편하게 말한 건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였다.

“비탈리 선배님이랑은 안 볼 생각이신가요?”

“뭐, 뭐……?”

음악 이야기에서 갑자기 점프하여 그의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옐브루스는 어이가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지금 전혀 장난치고 있지 않았다.

단아한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굉장히 진지하다. 그제야 옐브루스는 왜 타티아나에게서 무서움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도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후배에게 압박을 받으니 식은땀이 흘렀다.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랄 지경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정면에서 물어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그렇잖아요? 잘 해내신 옐브루스 선배님과 달리 비탈리 선배님은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해서 최악의 기분일 텐데, 친구로서 위로해 주기는커녕 다투기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큰 앙금이 남았을까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알면서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으신 것 같아서 짚어 드리는 거예요.”

계속 찝찝했던 기분의 핵심을 찔린 옐브루스는 공동 리허설에서 조언을 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거기에 더해 아나스타샤가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모르지? 원래부터 비탈리 선배를 싫어해서 이참에 잘되었다고 느끼는 걸지도. 그렇다면 우리가 상관하면 안 될 일이고.”

말문이 막힌 옐브루스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자극하는 말이었다.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옐브루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나도 그 녀석이 무대를 망쳐서 아쉽다고 생각해. 진짜로. 위로도 하려고 했다고.”

“그럼 왜 위로가 안 됐죠?”

“진정이 안 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말을 잘못했을지도 모르지.”

당연히 변명이 섞일 수밖에 없지만, 잘못한 게 맞았다.

약간 정신을 차린 옐브루스는 일단 두 사람이 자세한 것까진 모를 것이라 상정하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튼, 별일 아니니까 괜찮아. 우린 원래 맨날 그래.”

“괜찮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따로 타고 귀국하나요?”

“…….”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봐도 그건 심한 상황이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지금 선배들의 다툼에 반응하여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폴란드에 남은 두 친구를 걱정하여 이런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옐브루스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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