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3화
옐브루스 선배는 당혹스러워했다. 한 발을 뒤로 뺀 모습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 역시 이 자리가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와 같이 복도를 가로막고 있다가 느닷없이 지나가는 선배를 붙잡아 놓고 이렇게 묻는 건 어떻게 봐도 따지는 모양새다.
명분이 있긴 하다. 왜 선배들끼리 다퉈서 후배들까지 영향을 받게 만들었냐고 책망하는 거니까.
그러나 그런 것에 예민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미숙함을 뜻하고, 이렇게 친구를 거쳐서 불만을 토로할 일도 아니다.
선배가 차갑게 우릴 무시해 버린다면 더 할 말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가 유지되는 건 전적으로 선배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압박하는 것도 좋지 않아.’
자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너무 힐난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방금 아나스타샤가 한 것처럼 괜히 자극하는 일은 조금 삼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은 뒤 불편한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서며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시죠.”
“어…… 조금?”
“아침부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좋은 이야기만 해도 모자란데.”
선배는 쇼팽 콩쿠르 예선전의 유력한 통과자이다.
결과는 예선전이 끝나야 나오지만,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선배의 합격을 예견하고 있으리라.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옐브루스 선배에게 축하를 해 줄 것이다.
우리만 지금 선배를 붙잡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이쯤 하고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발렌티나에게 전해 줄 결과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순번이 끝난 선배들과 달리 아직 준비 중인 아이들이 있어서요.”
“바르바라와 발렌티나?”
“예. 그렇죠.”
“그래……. 나도 그 애들은 마음에 걸려. 너희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해.”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옐브루스 선배는 붙잡힌 시점부터 친구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따질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걸 이해한다고 말할 정도면 선배도 정말 많이 양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우리 사정을 이해하는 만큼 어떻게 이런 상황이 생기게 되었는지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 애들이 너희한테 전화했겠구나.”
“예.”
“뭐라고 했는데?”
난 대답하지 않고 선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나아졌던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렌티나가 화를 낸 건 정당했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옮기지 말란 부탁을 한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옐브루스 선배는 날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추태를 보였으니 뒤에서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긴 해.”
자조적인 어투로 이야기하던 옐브루스 선배는 아예 창가에 기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빨리 떠나려고 했었는데, 우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바뀐 듯하다.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가 많아 보인다.
지금 길을 가로막고 따지고 드는 우리 앞에서 자신을 욕해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선배는 약간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선배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나도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지, 당연히. 다른 곳도 아니고 쇼팽 콩쿠르에서 학교 후배들에게 누가 못난 꼴을 보이고 싶겠어. 안 그래?”
선배는 공동 리허설을 제안했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그만큼 쇼팽 콩쿠르에 걸고 있던 기대가 높았던 사람이다.
두 선배가 앞장서서 후배들이 해외에서 곤란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먼저 예선전을 멋지게 마친 뒤 돌아온다.
아마도 그런 이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
하지만 시작부터 꼬여 버린 콩쿠르행은 계획대로 잘되지 않았다.
아마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건 옐브루스 선배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선배는 자신도 왜 그렇게밖에 못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하지만……. 하, 내가 말실수를 했지.”
“깔끔하게 인정하시네요.”
“그래, 인정해.”
처음부터 선배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로 내뱉기가 어려웠을 뿐.
우리 앞에서 속을 털어놓으니 차라리 시원하다는 듯 옐브루스 선배는 웃으며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르바라와 발렌티나에게 사과 전화라도 할게. 무대에 서기 전에 괜히 심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선배로서 그런 전화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 마음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발렌티나가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저번 주에 전화했을 때, 일을 벌여 놓고 잘하라고 응원하던 선배가 싫었다며 짜증을 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나는 중간에 낀 사람의 입장에서 되도록 잘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사과는 이미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 그렇긴 하지. 그래도 한 번 더…….”
“무작정 그래 봤자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은 선배에게 사과받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런 걸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나도 머리 복잡할 것 없었을 테고.
내가 딱 잘라 이야기하자 옐브루스 선배는 난처해했다.
“그럼 뭐 어떻게 해?”
그 말에는 나도 바로 답하기 어려웠다.
우울해하는 발렌티나에게 선배들을 혼내 주겠다고 말했고, 나 역시 한마디 정도는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해결책 같은 건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하지만 멋대로 하고 싶은 말만 잔뜩 쏟아 내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발을 깊게 담갔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서 용기를 너무 많이 얻은 탓이었을까.
선배를 붙잡아 콩쿠르가 아닌 일을 캐묻고 있는 우리에겐 해결책을 어느 정도 제시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선배는 우리 말을 잘 들어 주려는 자세였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내 머릿속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요……. 불안의 원인을 없애야겠죠?”
“원인?”
“제 친구들은 선배님들이 다투신 걸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서로를 응원하고 화기애애하게 순서대로 무대에 올랐어도 잘하기 어렵고 긴장하기 마련인 큰 콩쿠르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좋게 해결했어야 했다.
물론 좋게 해결하는 건 지금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힌트를 줘도 잘 모르겠다는 듯 옐브루스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겠는데…… 그렇다고 과거로 가서 없던 일로 할 순 없잖아.”
대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단어를 잘 고르지 않으면 협조적인 선배를 삐딱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을 느끼며 난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조용히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 의사를 파악하고는 대신 말했다.
“뭐 하러 과거까지 돌아가요? 현재에서 수습하면 되죠.”
“그러니까 그 수습을 어떻게…….”
“비탈리 선배와 이야기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안 그래요?”
산뜻한 어조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실천하지 않느냐는 듯,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옐브루스 선배는 우려했던 대로 경계하는 눈초리를 했다.
우리가 내민 해결책이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분명한 단어로 확인을 시도한다.
“지금…… 바르샤바에 있는 애들이 아니라 비탈리에게 사과하라는 말이야?”
“그게 우선이지 않나 싶네요.”
“지금?”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하는 게 좋죠.”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상황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분위기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선배의 얼굴을 보아하니 쉽지 않아 보였다.
선배는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던 것과 달리 이번만큼은 알아서 하겠다는 듯 선을 그었다.
“그건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렇게 나와 버리면 할 말이 없다.
문제는 두 선배 사이에 있었으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참견하는 것만 해도 친구들을 이유 삼아 굉장히 깊게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틀어졌으니 이젠 모르겠다며 발을 빼 버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난 옐브루스 선배가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야만 비탈리 선배의 회복 역시 빨라질 테니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강경책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녀는 태도를 달리하며 또다시 도발하듯 이야기했다.
“어머, 미안해하시는 줄 알았더니 먼저 사과까지 하실 정도는 아닌…….”
“아나스타샤.”
어지간해선 그녀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나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아서 그녀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아나스타샤는 별 저항 없이 내 손길을 따랐다.
옐브루스 선배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 정도에서 그치는 편이 나았다.
난 아나스타샤에게만 들리도록 살짝 귀엣말로 속삭였다.
“너무 그러진 마세요.”
“내가 심했니?”
아나스타샤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소곤거렸다.
어린애도 아닌데 화해를 종용받는 것 자체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불길에 기름을 붓듯 자극하는 건 지금은 해선 안 될 일이다.
선배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정말 점잖게 우릴 대하고 있는 거였다.
예선전도 잘 마치고 돌아왔는데 학교에 오자마자 후배 두 명이 비난하면서 다짜고짜 친구와 화해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누구라도 반발심과 짜증을 느낄 테니까.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한 명은 쇼팽 콩쿠르 예선전 통과가 뚜렷하고, 다른 한 명은 어둡다는 것이다.
어떻게 봐도 반목이 길어지리란 예감만 든다.
‘난감하네…….’
나도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문제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해를 낳는다. 되도록 빠르게 대화로 푸는 편이 낫다.
하지만 어떻게 잘 이야기해야 옐브루스 선배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비탈리 선배에게 이야기해 보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비탈리 선배야말로 더더욱 이야기하기 편한 상황이 아닐 것 같은데…….
고민을 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내 일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 진심으로 고민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화해 종용 같은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에.
그러나 지금 모른 척하고 가면 정말 깊게 후회할 것 같았다. 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 일에는 되도록 참견하지 않는 편인데도 날 따라 주고 있다. 우린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희가 이렇게 참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죠. 선생님들도 학생들의 사적인 관계엔 상관하지 않으실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
“하지만 선배님들을 믿고 있던 저희가 배신감을 느꼈다는 건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반감을 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일부러 조금 강하게 말했다. 여기서 선배가 어이없어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 선배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비난받을 각오는 하고 왔어.”
“후후, 축하가 아니라요?”
“비탈리가 그렇게 되었는데 축하받을 분위기겠어? 반에 올라가서도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어.”
비탈리 선배의 무대는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았다.
잘될 거라고 응원하는 것도 어려운 분위기겠지. 그런 것도 다 이해하고 감수하겠다는 듯 옐브루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잘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조금 든다.
선배는 팔짱을 끼고 복도 바닥 구석의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하나만 묻자.”
“예.”
“그 애들에게서 전부 들었을 테니 묻는 건데…… 누가 더 잘못한 것 같아?”
난 웃어 버릴 뻔했다.
아나스타샤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여덟 살짜리가 할 법한 질문인데요?”
“그 나이쯤 되면 객관적인 판단을 외부에서 구해야 한다는 걸 이해할 나이지. 난 여덟 살보단 더 책임감 있어야 하고.”
옐브루스 선배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받아쳤다.
선배는 진짜로 진지하게 묻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선배의 행동도 바뀔 테지.
하지만 난 그것을 앞질러 계산하는 대신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옐브루스 선배님이 잘못하셨죠…….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하나요?”
“……하.”
내 단호한 말에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은 철없고 어리숙한 트러블이었지만, 지금 화를 내거나 따져 묻지 않는 선배는 이미 훌륭한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