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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34화 (1,034/1,277)

##  1034화

사과와 화해라는, 듣기만 해도 목 언저리가 간질거리는 단어들을 놓고 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부담스럽다.

심지어 그 단어를 쓰도록 설득해야 할 대상은 이성인 데다가 한창 자존감이 강할 열여덟 살 피아노 연주자였다.

내가 옐브루스 선배의 유연함을 몰랐다면 아마 시도조차 못 했을 테지.

‘다행이야.’

선배는 중요한 콩쿠르 무대에서 친구와 싸워 비행기를 따로 타고 돌아올 정도로 꽉 막힌 구석도 있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후배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개방된 면도 있었다.

때문에 목적을 위해서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그 성격을 믿고 설득해 보려고 했던 건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쉽게 이야기가 진행되진 않았으리라.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잘못하긴 했지.”

사과하기로 마음을 먹은 옐브루스 선배는 이내 킥킥거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팔을 들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솔직히 입장 바꿔서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주먹부터 나갔지.”

“……폭력은 안 돼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괜한 농담해서 미안하다는 듯 선배는 얼른 팔을 내리고는 다시 주위를 서성였다.

선배는 정말 어렵게 후배들 앞에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과하겠단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깔끔하게 흘러가리란 보장은 없는 법이다.

선배도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어렵겠지.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나도 아나스타샤와 본격적으로 다툰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나와의 대화를 피하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말을 걸기 어려워했었으니까.

오늘에서야 겨우 극복한 주제에, 난 내가 했던 바를 선배에게 추천했다.

“커피라도 들고 가서 말을 걸어 보세요.”

물론 그것도 빅토르가 도와준 것이긴 하지만, 효과가 있었던 걸 보면 비탈리 선배에게도 통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옆에 누가 있었는지를 순간 까먹었다.

“네가 했던 것처럼?”

“예, 제가 했던……. 아, 아나스타샤!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요?”

아나스타샤는 재미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창피함에 눈을 피하며 저항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교실에 올라가기 전에 말을 걸었다는 걸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겠지.

아마 그래서 더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다시 확인받는 건 너무 창피한 일이다.

모르쇠로 대충 넘어가려는데 아나스타샤는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달라붙었다.

“왜? 네가 먼저 말했잖니.”

“하지 마세요, 정말…….”

“아하하하.”

정말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다. 나는 격하게 후회하면서 그녀를 피해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그런 우리를 보던 옐브루스 선배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으나 곧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니, 말을 걸 자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싸우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선배. 지금 장난해요?”

아나스타샤가 어이없다는 듯 선배를 힐난했다.

나도 어이가 없었다. 낙담하고 있을 비탈리 선배에게 사과라도 한마디 하자는 건데, 지금 우리가 서로 대화를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옐브루스 선배를 바라보니 선배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으로 위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 교실에 올라가서 그 자식한테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쳐. 그걸 바로 받아 주면 다행인데…… 아마 안 그럴걸.”

“왜요?”

“몰라. 내 느낌이 그래.”

선배는 그 이상 이유를 말하지 않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난 느낌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탈리 선배가 특별히 모난 성격이라서가 아니다. 아마 주어진 상황이 그런 걸 테지.

옐브루스 선배는 비탈리 선배에게 콩쿠르 성적 등과 관계없이 말실수에서 비롯된 다툼에 대해 사과하는 건데, 만약 반 친구들이 보고 있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여지가 다분했다.

예선전을 잘 치른 옐브루스 선배가 훨씬 더 여유롭게 보일 테니까. 비탈리 선배가 얼마든지 삐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을 피해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또 시선을 끈다.

일단 비탈리 선배가 방어적으로 나오게 만들면 안 된다. 그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 수가 있다.

“교실에 가기 전에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하면요?”

“그것도 네가 했던…….”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해 주세요.”

차갑게 내치자 아나스타샤는 울상을 지으며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장난을 치는 건 좋지만…… 이런 곳에서 그러면 나도 부끄럽다. 적어도 누가 없는 곳에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

허둥거리지 않고 냉정하게 다시 옐브루스 선배를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도 금방 표정을 바꾸곤 뻔뻔하게 팔짱을 꼈다.

그제야 선배도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캐묻진 않았다.

“기다렸다가? 여기서?”

“예.”

“차라리 그래 볼까…….”

“저희는 옆에서 보고 있을게요.”

“……너희가 보고 있으면 더 안 될 것 같은데.”

“다시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요.”

혹시 분위기가 나빠질 것 같으면 우리가 끼어들 수 있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같이 말린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 되진 않겠지. 그러나 옐브루스 선배는 내키지 않아 했다.

바르샤바에서 발렌티나가 화를 내며 뜯어말렸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후배들을 완충제로 쓰는 건 아무래도 선배의 위신에 큰 문제가 되겠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서 난 되도록 선배 입장을 따라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게 한 소리 듣고 조용히 있던 아나스타샤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

“?”

“이리 와 봐. 선배도요.”

양팔로 어깨를 감싸며 목소리를 낮게 까는 아나스타샤의 표정엔 장난기가 다분했다.

***

비탈리는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콩쿠르 개최지에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가 본 바르샤바 공항에선 비행기에서 내릴 때 수속이 늦어졌고, 짐을 찾을 때도 네 명분의 짐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게다가 택시에게 분명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이라고 제대로 된 목적지를 알려 줬는데도 완전히 이상한 곳에 내려 주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폴란드어를 하지 못해서 영어로 말한 탓이라기에는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다.

아무튼 시작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간신히 추스르고 무대에 올랐다.

앞서 옐브루스가 좋은 무대로 스타트를 끊은 덕분에 비탈리 역시 잘 해내겠다는 고양감만 쥐고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난 사고와 연주 중단. 그것들은 비탈리의 정신을 완전히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소름 돋는 종소리가 연주를 끊어 놓았던 그 순간을 비탈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머릿속에 있던 모든 악보와 음악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대로 무대에서 내려간다면 더더욱 복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직감을 느낀 비탈리는 그 자리를 지키며 다시 연주를 재개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어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후회와 짜증이 찾아온다.

최선을 다한 연주자는 결과와 관계없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평생 믿었던 비탈리에게 지금 느껴지는 이 기분은 매우 생경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

프로 피아니스트로서 제대로 된 첫 콩쿠르 커리어라 할 수 있는 쇼팽 콩쿠르에서 예선 탈락이란 결과를 안고 간다면 앞으로가 암담하다.

하지만 그것도 억지로 괜찮다고 합리화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정신력이 나약했을 뿐이니 트라우마로 남지 않도록 잘 케어하여 다른 곳에서 더 잘하면 된다.

하지만 그 후에 옐브루스와 싸워 후배들이 뜯어말린 건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심지어 두 후배들이 무대를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비탈리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는지에 대해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우울한 그의 뇌리 속엔 무의식중에 후배들도 무대를 망치길 바라는 악독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비탈리는 자신이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혼자서 아니라고 주장한들 의미가 없다.

크게 멘탈이 흔들린 후배들은 이미 비탈리를 그렇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바르바라나 발렌티나가 무대를 망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비탈리와 옐브루스의 탓이었다.

“죽고 싶다…….”

긴 시간 준비한 국제 콩쿠르 예선전에서 볼품없는 무대를 선보였으니 더 이상 살기 싫어졌다 해도 이해할 사람들이 꽤 있겠지만, 비탈리가 느끼는 기분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학교에도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이 어떤 눈으로 볼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비탈리의 지도 선생님이 학교에 오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침부터 전화를 했다.

혹시라도 비탈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전화였다.

아마 선생님은 이런 실패한 제자들을 여럿 봐 왔겠지. 그렇다면 나도 그리 특별한 건 아닐 테고.

그런 무기력한 생각으로 비탈리는 학교로 향했다.

“…….”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비까지 와서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도 눅눅하다.

도중에도 몇 번이나 끓어오르는 짜증을 눌러 참으며 비탈리는 걸음을 옮겼다.

교내로 들어서서 복도를 조금 걸었을 때였다.

‘저 애들은…….’

복도 저편에서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르바라와 같은 학년 친구들인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였다.

비탈리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며 그 자리에서 뒤돌았다.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저 두 후배는 더더욱 어려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쇼팽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자세하게 전해 들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단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차에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비탈리 선배님.”

“…….”

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타티아나의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인사했겠지만 지금은 도망을 허락하지 않는 간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섬뜩함을 느끼며 다시 돌아보자 타티아나가 약간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물쩍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비탈리는 그렇게 확신하며 그쪽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안녕.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네요.”

타티아나는 좋은 말로 대화를 열지 않았다. 비탈리가 어떤 기분일지 충분히 짐작한다는 어투였다.

“괜찮으신가요?”

“응? 뭐가?”

“선배님 차례 때 있었던 일을 봤어요. 정말 큰일이었죠.”

이렇게 신경을 써 주면 비탈리도 차라리 대화하기가 낫다. 물론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말하는 건 고역이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쓰러진 분이 돌아가시지 않은 게 어디야?”

“그건 다행이지만…… 선배님은 영향을 받으셨잖아요.”

“그거야 내 정신력이 약했던 탓이지.”

타티아나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만약 바르바라나 발렌티나가 나쁜 말들을 전했다면 이렇게 연민만 보이진 않았을 터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심정으로 비탈리는 한숨을 쉬었다.

뒤이어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옐브루스 선배와 싸우기도 했다면서요?”

이번엔 아주 직접적인 말이었다. 비탈리는 피식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소문 다 났네. 아이고, 난 집에 갈련다.”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시나 해서.”

“어떻게 생각하긴? 그냥 싸운 거지.”

후배들 앞에서 보일 추태는 이미 다 보였다. 더 떠들고 싶지 않았다.

“바르샤바에 남아 있는 애들한텐 미안하네. 선배답지 못한 꼴 보여서.”

대신 앞의 두 사람이 걱정할 만한 상황만이라도 수습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아서 비탈리는 짧게 덧붙였다.

“만약 전해 줄 수 있으면 옐브루스랑은 잘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 줘. 그편이 그 애들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화해하신 건가요?”

“화해는 무슨. 그냥 말만 그렇게 전해 달라고.”

진실이 중요한가? 멀리 있는 두 아이가 더 이상 이쪽에 신경 쓰지 않게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최선이었다.

비탈리는 솔직히 옐브루스와의 관계에 대해선 거의 포기 상태였다. 그 자식도 이런 패배자에겐 정나미가 떨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끈질기게 더 물었다.

“화해하실 생각은요?”

“뭘 또 그렇게 화해까지 할 일이라고……. 나도 몰라. 너희가 신경 쓸 일도 아니잖아?”

기자도 아닌데 자꾸 캐묻자 비탈리는 슬슬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나스타샤에게 나쁘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도 지금 상당히 무례하다는 걸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살짝 경고성을 띤 어조로 비탈리가 말했다.

“나나 그 자식 중 누가 먼저 사과한다든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냥 신경 꺼.”

“아, 그래요?”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뭔가 싶어 비탈리는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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