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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35화 (1,035/1,277)

##  1035화

비탈리는 친구들의 연민을 각오하고 있었다. 어떤 시선과 위로를 받더라도 대충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옐브루스와의 냉랭한 관계 역시 적당히 무시하면서 지낼 생각이었다.

각자 다른 비행기로 돌아왔을 정도로 둘 사이의 감정은 나빴고, 옐브루스가 먼저 비탈리에게 말을 걸어올 일은 없었다.

친구들은 소문을 들었다 하더라도 관여해 오지 않을 테니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딱히 더 불거질 일도 없을 거였다.

옐브루스와 친구이자 라이벌로 지낸 시간이 이미 11년이다.

그동안 수없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사이가 나빠진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무너진 자존심이 훨씬 더 강하게 비탈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 명은 쇼팽 콩쿠르 본선에 올라갈 피아니스트고, 다른 한 명은 예선 탈락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레벨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비탈리는 정신적 여유를 찾을 때까지 당분간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릴 생각이었다.

친구들의 위로는 웃음으로 대하고, 선생님의 연습 종용은 적당히 따르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다시 자신의 음악에 확신이 생기고 의욕이 솟을 때까지는 그렇게 지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축 늘어진 정신으로 학교에 온 비탈리는 교실에 올라가기도 전에 너무 강한 압박을 마주하고 말았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복도를 가로막은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굉장한 이력과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후배들이었다.

지금 이 패배자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비탈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를 꺼내어 몰아세웠다.

일부러 괴롭히고 화나게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비탈리는 그녀들에게 원한을 산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타티아나는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학생이기도 하고.

물론 바르샤바에 있는 아이들의 친구란 이유로 이러는 거라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쇼크를 받은 발렌티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상태로 모스크바의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다면 간접적인 원한이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겠지.

“…….”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원한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마치 복도를 가로막고 시비라도 걸듯 캐묻고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그녀가 묻는 것엔 확실한 구심점이 존재했다.

“그럼 만약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있으면요? 받아 주실 건가요?”

“그럴 일 절대 없다니까 자꾸 그러네.”

보통은 옐브루스와 싸웠던 사건 자체에 더 흥미를 두고 물어볼 텐데, 아나스타샤는 그 후의 이야기에 중점을 뒀다.

비탈리는 지금 이 이야기가 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왜 싸웠냐고 묻는다면 원하는 대로 답해 줄 수 있었겠지만, 그건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 구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탈리는 일단 이야기를 딱 잘랐다.

일단 그가 옐브루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일은 없다. 그리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분간 두 사람은 평행선을 그릴 예정이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그 각도가 점점 더 벌어질지도 모르지.

어쨌든 남에게 간섭받을 일은 아니다. 비탈리는 정말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살짝 인상을 쓰니 아나스타샤는 방금의 이야기를 확실히 들었냐는 듯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는 감정을 알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비탈리를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이야기했다.

“비탈리 선배님. 절대라고 단정 짓지 말아 주세요. 적어도 저희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단정한 어투였지만 그 내용은 도전적이었다. 비탈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너희가 그걸 왜 반박하고 있는데?”

“약속을 받아 뒀거든요.”

“약속?”

영문 모를 말에 비탈리가 되물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먼저 요구 사항을 전했다.

“그 전에 선배님도 약속해 주셨으면 해요. 사과를 받으면 무시하지 않고 받아 주시겠다고요.”

“뭐? 그건 당연한 것 아니야?”

“약속으로 들을게요.”

사과를 하면 받아 준다. 이건 어린애도 아는 이야기다.

심각한 피해가 오간 상황이라면 모를까, 옐브루스와 있었던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비탈리는 만약 그가 사과해 온다면 어떻게 받아 줘야 할지 상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자신이 타티아나에게 어느 정도 넘어갔음을 느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팔짱을 끼고 반쯤 돌아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튕기더니 계단 쪽을 가리켰다.

“아, 마침 저기 오네.”

거기선 옐브루스가 음료수 캔을 몇 개 들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의아함과 짜증이 뒤섞여 있던 기분은 한순간에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상할 정도로 캐묻던 것.

그리고 타티아나가 조곤조곤히 약속을 받아 내기까지 한 것.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을 위한 준비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너희 이거 도대체…….”

모든 대화가 속임수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빌미로 비탈리는 일단 퇴로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눈치 빠른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손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옐브루스 선배! 빨리 이리 와 봐요. 지금 사과하면 받아 준다니까.”

“하.”

너무 정확하게 파고드는 타이밍이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비탈리는 그 이상 따지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계단을 내려온 옐브루스 역시 비슷하게 어색한 모습으로 근처에 섰다.

당혹스러움에 잠시 눌러 두었던 짜증이 다시 힘을 얻어 일어났다.

비탈리는 지금 화를 낼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며 옐브루스에게 말했다.

“야. 뭐냐 이건?”

“몰라 나도.”

“무슨 소릴 들은 건데? 이 애들이 네 선생님이라도 되냐?”

“…….”

그가 느끼는 기분 나쁜 부분을 짚자 옐브루스가 입을 다물었다.

비탈리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조금 후회했다.

아무리 봐도 자존심에 타격이 간 모습이었다. 이래서는 평행선을 그리던 관계가 좁혀지긴 글렀다.

다 그만두려던 찰나, 타티아나가 다시 한번 나서며 명확하게 그를 나무랐다.

“먼저 사과하면 받아 주시겠다고 하신 만큼 말도 못 꺼내게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시면 안 되죠. 반칙이에요, 선배님.”

“반칙? 너희가 하고 있는 거야말로 비상식적인데?”

상대는 죄 없는 후배였지만 비탈리는 이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반칙이란 단어가 그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짜고짜 이런 상황을 조성해 놓고는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반칙이라니? 자신을 우습게 보고 마음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다.

비탈리는 위협적인 태도로 타티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콩쿠르 일로 짜증 나 죽겠는데, 오자마자 사과를 하라 마라……. 뭐냐 진짜?”

보통은 이 정도로 겁을 주면 적당히 알아듣고 그만두든가, 아니면 맞받아치며 화를 내든가 둘 중 하나다.

무엇이든 간에 이 대화를 망치고 끝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비탈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지가 강했다.

“그 짜증의 원인이 콩쿠르뿐인가요?”

타티아나의 간결한 물음에 비탈리의 위협은 바로 힘을 잃었다.

그녀의 말대로 콩쿠르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비탈리는 지금 옐브루스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문제가 길어질 것이란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예감은 그의 신경을 시시때때로 긁어 댔다.

타티아나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비탈리는 반발했다.

“지금 내 짜증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지 마. 너희 지금 선 넘고 있는 거 알아? 무슨 상관인데?”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면 타티아나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비탈리의 착각이었다.

타티아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상관이 있어요. 4시간 후에 바르바라가 무대 위에 설 테니까요.”

그렇게 받아치니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비탈리 역시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누그러진 채로 비탈리가 말했다.

“……그건 방금 말했잖아. 아무 문제 없다고 전화로 이야기해 주라고.”

“저에게 거짓말을 하라는 건가요?”

“그 애가 연주를 제대로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아냐?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잖아. 네가 못 하면 내가 할게.”

콩쿠르에서 추태를 보이긴 했지만 모스크바에 돌아와선 알아서 화해하고 풀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비탈리는 일부러 도발하듯 오른손을 전화 모양으로 만들며 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럼 해 주세요.”

“뭐?”

“지금요.”

어려울 것 없이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는 듯 타티아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바르바라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좋은 무대 되길 바란다고 응원해 주세요. 그리고 두 분은 오늘 아침에 서로 사과했으니 이젠 괜찮다고 말씀해 주세요.”

“못 믿겠다는 거야? 하겠다니까?”

“믿어요. 단지 하얀 거짓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타티아나의 강단 있는 태도는 면피용의 하얀 거짓말을 허용하지 않았다.

후배에게 이런 말투로 훈계를 듣는 건 정말 기분 나쁜 일이었다. 애초에 비탈리는 끔찍할 정도의 우울함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어쩐지 지금 타티아나에게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비탈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정말 진심을 가지고 설득하려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

평소에도 단정하게 이야기하는 톤에 어쩐지 거역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서려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곧장 바르바라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이가 좋아졌다고 말하면 옆에 있는 옐브루스가 전부 듣게 된다.

그럼 그건 아주 지독한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진짜 화해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었다.

비탈리는 고개를 돌려 옐브루스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해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꼈다.

“못 하시겠나요?”

타티아나가 다시 한번 물었다. 놀리려는 투는 아니었다. 단지 무언가 더 알려 주려는 것뿐이다.

“아무 동요 없이 전화를 할 수 없으시다는 건, 곧 하시고자 하는 말이 하얀 거짓말이 아니란 뜻일 거예요.”

거짓말이 아니라면 진심일 터.

비탈리는 타티아나에게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녀가 짜 놓은 덫에 걸려 버린 기분이었다.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면 더더욱 스스로를 옥죄게 된다. 굉장히 영리하고 고급스러운 덫이었다.

설마 타티아나가 이 정도로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비탈리는 한숨을 쉬며 간신히 한마디 했다.

“너 진짜 무서운 애구나.”

“……오늘 그런 말을 자주 듣네요.”

타티아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리고 비탈리가 심적으로 그녀에게 패배를 인정했을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옆에 서 있던 옐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야.”

시비조로 시작된 말이었지만 옐브루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비탈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때 했던 말 같잖은 농담은 내 실수였어. 사과할게.”

오늘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 오자마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비탈리는 인상을 팍 쓰고 음료수를 받으며 대꾸했다.

“빌어먹을. 그럼 그때 바로 그렇게 말하지.”

“말했어. 네가 안 들었을 뿐이지.”

“말하긴 뭘 말해.”

“했었다니까?”

무대를 망치고 이성이 반쯤 나가 있었던 때라서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래도 비탈리는 두어 번 더 부정하다가 옆에 있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이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알았어. 그럼 됐지?”

“됐네.”

“아, 젠장 이게 무슨…….”

뭔가 순식간에 후다닥 끝내 버렸다.

하지만 이 잠깐 사이 주고받은 대화는 주말 내내 비탈리를 사로잡고 있던 분노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뒤이어 참기 어려울 정도의 어색함이 찾아들었다. 비탈리는 정말로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마치 그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아직 안 됐어요.”

“또 뭔데?”

“바르바라에게 전달을 안 했잖아요?”

아직도 그 이야기야?

물론 선배들을 붙잡고 따질 정도로 바르샤바에 있는 두 친구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이젠 된 것 아닌가?

비탈리가 빠르게 대꾸했다.

“전화한다니까?”

“그래 봤자 바르바라는 믿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확실한 증거를 보내야죠.”

“무슨 증거?”

어이가 없어 묻자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두 분께서 악수라도 하실까요? 그걸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 확실하게 믿겠죠.”

“뭐?”

“어서요.”

비탈리는 11년쯤 전을 떠올랐다.

무슨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친구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두 아이를 같이 야단쳐 화해시키고는 악수를 하게 만들었다.

저 애는 우리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 타티아나가 다시 눈짓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비탈리는 그녀를 거역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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