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6화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자존심을 뭉개면서까지 억지로 화해하는 건 역효과가 더 크게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진실한 이야기를 한 번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었다.
절대 사과가 우선시될 일은 없을 거라 단정 짓는 두 사람에게 탈출구를 제안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아니야.’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거 밀면 밀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살짝 시도해 봤더니 정말로 밀렸다.
옐브루스 선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협조적이었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비탈리 선배는 불행을 그렇게 겪었는데도 꺾이지 않고 똑바로 서 있었고.
이 정도로 대화가 잘될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둘 다 약간의 불쾌함을 표현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내 설득을 잘 들어 주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차라리 빨리 해.”
사진 요청까지 받아 준 비탈리 선배는 괜히 신경질을 내며 캔 음료를 탁 따더니 한입에 다 마셔 버리고는 창틀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내게 확인했다.
“사진만 찍으면 불만 없는 거지?”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탈리 선배는 곧장 옐브루스 선배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아까부터 협조적이던 옐브루스 선배는 별 망설임 없이 악수했다.
연주자로서 살다 보면 다른 사람과 악수할 일이 많다. 그런데 선배들도 이렇게 어색한 악수는 아마 처음이리라.
비탈리 선배가 고개만 돌려 날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라고?”
“예, 좋네요.”
표정도 자세도 영 아니었지만 세세한 주문까지 할 겨를이 없었다. 난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는 화면을 몇 번 눌러 사진을 찍었다.
옆에 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 등 뒤로 다가와 화면을 같이 보더니 혀를 내밀었다.
“좋긴 뭐가 좋아? 어색하잖아. 각 나라 정치인들이 정상 회담을 하면서 악수하는 것 같아.”
“그런 게 중요한 거죠.”
듣고 보니 아나스타샤의 비유는 정말로 정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진 않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왜 악수를 길게 하면서 굳이 기자들에게 찍으라는 듯 보여 주겠는가?
오간 대화나 서면 등을 공개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우호와 협력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뒤집히는 일도 많지만 그건 보다 큰 역학이 작용할 때의 이야기이고, 두 선배들의 악수는 그 자체로 이미 많은 걸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난 웃으며 스마트폰을 내렸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을 가볍게 보면 안 돼요.”
내가 카메라 렌즈를 치우자 선배들도 얼른 악수를 풀고는 떨어졌다. 지금 보면 서로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걸 기록해 뒀으니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뭔가 기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여 날 응시했다.
“이렇게 보면 지극히 현실주의자인데……. 난 네가 아직도 아리송해, 타티아나.”
“저도 그래요.”
“나중에 MBTI 검사해 볼래?”
“……뭐예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맥락이나 뉘앙스로 따져 본다면 정신과에서 할 법한 검사인 것 같았다.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아나스타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별자리 보는 거랑 비슷하게 성격 유형을 따져 보는 거야.”
“아, 심각한 건 아니네요?”
“심각?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니?”
이중인격 같은 정신적 문제를 알아보는 검사인 줄 알고 조금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별자리 성격 같은 거라면 얼마든지 재미로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 별자리는 염소자리였지. 아나스타샤는 황소자리……. 떠올려 보니 생일이 그리 멀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 아나스타샤의 생일은 벨기에에서 내가 축하해 주게 되겠지.
만약 그녀와 소원해진 사이였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다시 한번 안도하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선배들 역시 크게 틀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비탈리 선배는 불만이 있다면 지금 말하라는 듯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되레 감사한 마음뿐이다.
“바르바라에겐 제가 설명할게요.”
선배가 이 사진을 보내면서 설명하면 정말 이상한 상황이 되겠지. 내가 하는 편이 낫다.
비탈리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래. 다 찍고 나서 묻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 사진은 바르샤바에 있는 두 애한테만 보내는 거지? 학교에 돌면 진짜 곤란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두 사람에게 단단히 전해 둘게요.”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안다. 지금 선배들은 기쁜 마음으로 행복하게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상당한 창피를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있는 건 모두 여기에서 정리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암묵적 신의의 문제였다. 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치도 아니었고, 선배들을 가지고 놀 생각도 없었다. 때문에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만약 그래도 퍼지면…… 제가 그 애들에게 책임을 묻고 저 역시 책임을 질게요.”
“뭘 책임까지야……. 그냥 그럴 일 없다고만 하면 돼.”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비탈리 선배는 되레 미안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난 진심이었다.
내가 똑바로 바라보니 비탈리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하,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후후후, 죄송해요.”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무례하고 막무가내였다. 어쩐지 통할 것 같아서 시도하긴 했지만 이렇게 받아 준 선배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공평과 변명의 일환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 않고 넘어가기에는 조금 미안해져서 우리 이야기도 조금 꺼냈다.
“사실 저도 오늘 아나스타샤와 화해했거든요.”
“……뭐? 그게 또 무슨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네요.”
길게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비탈리 선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내가 어디서 용기와 확신을 얻은 것인지 비로소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더니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니!?”
“뭐 어떤가요? 이제 아니면 됐죠.”
“창피하잖아!”
아나스타샤는 나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일을 계속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길에 따라 흔들려 주었다. 어떻게 해도 내가 반응하지 않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한마디 더 했다.
“책임지겠다는 말도 그래. 그런 종류의 말은 쉽게 하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는데.”
그 말은 웃음으로 넘기기 어려웠다.
내가 참견이 심한 탓에 아나스타샤는 마음고생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난 그녀에게 조심하겠다고 말했는데도 늘 부주의하기 일쑤였다.
솔직히 이제 와 어쩔 수 없겠지. 난 짧게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제 성격이 이래서.”
“내가 미쳐.”
아나스타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스르륵 손을 내렸다. 그녀에겐 항상 미안한 일뿐인 것 같다.
고개를 막 드는데 환한 햇빛이 창을 통해 복도를 밝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리던 날씨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마침 비도 그쳤네요.”
“그러네……. 계속 내릴 것 같더니.”
“슬슬 반으로 올라갈까요?”
내가 제안하자 두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옐브루스 선배가 계단을 올랐다.
모스크바에 올 때 따로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이번에도 따로 가려나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비탈리 선배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몇 계단 오르던 비탈리 선배는 문득 고개만 돌려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선배 쪽을 올려다보며 대답하자 진지한 목소리로 선배가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잘 전해 줘. 조금의 후회도 없을 정도로 좋은 무대를 선보이길 바란다고 말이야. 이건 내 진심이야.”
난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비탈리 선배는 자신이 겪은 무대 위에서의 실패를 후배들도 겪길 바라지 않는다.
길게 답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내 감사에 비탈리 선배는 부끄러운지 대답도 하지 않고 손만 휙 젓고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나는 두 선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바르바라에게 보내 볼게요.”
“응.”
방금 찍었던 사진과 함께 해 줄 말이 많았다. 난 신중하게 단어들을 골라 가면서 바르바라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했다.
답장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날아왔다.
[이거 실화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메시지가 날아오고, 잠시 후 전화가 걸려 왔다. 발렌티나에게서 온 것이었다. 지금 옆에 같이 있나 보다.
“아, 발렌티나.”
-방금 보내 준 것 뭐야? 방금 있었던 일이야?
진짜 놀란 것 같은 그녀에게 난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되 무용담처럼 들리진 않도록 진지하게 전했다.
중요한 건 선배들 사이에 있었던 작은 불화가 해소되었다는 점뿐이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데도 발렌티나는 모든 걸 내게 돌렸다.
-네가 선배들을 혼내 준다고 했을 때 속 시원하면서도 혹여나 네가 나쁜 말을 듣진 않을까 약간 걱정하기도 했었는데…… 역시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네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잘 알지.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없긴 뭐가 없니? 네가 아니면 아나스타샤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라도 했겠어?
힐긋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 전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내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아나스타샤가 선배들 사이에 끼어들진 않았겠지. 그녀는 이걸 참견이라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나서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에 붙어선 도와준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던 걸까.
발렌티나는 다시 깔깔 웃더니 말했다.
-아무튼, 이런 사진까지 받을 줄은 몰랐어. 지금 옆에서 바르바라가 거의 웃겨 죽으려고 해.
“혹시나 해서 다시 말씀드리는데, 그 사진 다른 분에게 보여 드리면 안 돼요.”
-알아. 우린 둘째 치고 네가 곤란해지겠지. 절대 그렇게는 안 해.
더 말할 것도 없이 발렌티나는 내가 쉽게 사진을 찍어서 보내 준 것이 아니란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따로 걱정할 건 없겠다 싶다.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자 전화 저편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아, 전화 바꿔 줄게.
“예.”
-타티아나?
곧 목소리가 바뀌었다. 바르바라였다.
상당히 들뜬 목소리였다.
단지 모스크바로 돌아온 선배들이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 않아서 적당히 화해했다고 전했을 뿐인데, 바르바라에겐 그 소식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다.
바르바라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네가 한마디 했다며?
“조금요.”
-선배들 진짜 웃긴다. 우리가 말할 땐 전혀 듣지 않던데.
“모스크바에 돌아와서 머리가 조금 식었겠죠.”
-아하하, 그런가?
아마 콩쿠르 회장에선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비탈리 선배는 최악의 상태였고, 바르바라와 발렌티나도 당황했을 테니까.
물론 무언가 시도는 했겠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고, 때문에 더더욱 심리적 위축을 느꼈으리라.
난 남은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다행히 지금 바르바라의 목소리에선 위축된 부분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고마워. 우리가 알아서 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도와주는구나.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애써 준 만큼…… 오늘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바르바라는 내가 가장 바라던 답변을 내주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아요, 바르바라.”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자 그녀도 내 말에서 대화의 맥락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같이 바르바라의 무대를 보자고 약속했었지. 난 오늘 오전 내내 아나스타샤와 있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