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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37화 (1,037/1,277)

##  1037화

전화를 끊자 아나스타샤가 턱짓으로 계단 쪽을 가리켰다.

“우리도 올라갈까?”

“그래요.”

아나스타샤는 먼저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잠시 서서 날 기다렸다.

아깐 그녀가 앞서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르고 있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우린 나란히 똑같은 타이밍에 계단 위로 발을 디뎠다.

여전히 난 계단을 오를 때면 불안하고 온몸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어 조금 피로함을 느낀다.

그건 옆에 친구가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되레 더더욱 신경이 쓰이곤 한다.

그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리듬 있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멈칫거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돌아서서 날 챙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비슷한 상흔을 가진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약했더라면 아마 둘 다 여기서 주저앉아 버렸을 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겠지.

하지만 우린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했기에 지금도 서로를 확인하며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무척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다시 다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기도 했고.

‘무슨 다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한데…….’

아나스타샤는 그 내용에 대해선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며 딱 자르긴 했지만, 나는 그녀가 에르네스트와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물론 그 내용은 에르네스트가 작곡 콩쿠르에 참가한 것에 대한 반대겠지.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정도 수위의 다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내가 끼어들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옐브루스와 비탈리 선배는 예민한 주제를 가지고 격하게 싸우고도 큰 악의나 괴리 등이 없었기에 쉽게 화해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걱정하는 마음을 근거로 다퉜을 테니까……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난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만약 에르네스트와 있었던 일을 다시 말해 보라고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아나스타샤는 뭐라고 할까.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밝은 미소를 마주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정도는 이렇게 웃으며 지내도 괜찮겠지. 그녀가 내게 솔직히 사과하고 함께 잘해 보자고 해 준 날이니까.

지금 이 분위기 그대로 가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금 더 아나스타샤와 가깝게 걸었다. 계단이라 너무 가까우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주 조금만 더.

함께 교실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우릴 맞아 주었다.

“같이 왔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어서 와.”

“좋은 아침이에요.”

비가 그치고 나니 아침 인사도 절로 상쾌해진다. 난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월요일이니 아무래도 할 대화가 많다.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우리야 뭐…… 너희는? 계속 연습만 한 것 아니야?”

“거의 그랬죠.”

“주말이 주말이 아니겠어.”

친구들은 약간 안쓰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원해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즐기기만 하긴 어렵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결국 힘들고 고된 길인 것이다.

그래도 난 그 길 위에서 되도록 웃으려 한다. 이렇게 많은 동지가 있는데 웃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남은 시간은 2주일 정도. 난 갈수록 더욱 빠르고 깊게 모든 시간을 콩쿠르 준비에 쏟아붓게 되겠지. 그런 예감에 난 피로보다는 고양감을 강하게 느꼈다.

내 의욕이 전달되었는지 친구들도 가볍게 웃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 응원들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지금 바르바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너희도 알고 있지?”

“물론이죠.”

바르바라와 발렌티나. 폴란드에서 무대를 준비 중인 두 사람을 위해 난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다.

그런데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미처 모르는 친구들은 저번 주에 전해 들은 두 사람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걱정되는지 저마다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그 애 잘하려나…… 걱정이야.”

“저번에 전화해 봤더니 목소리가 영 안 좋았어.”

“라리사. 그다음에 연락해 본 적 있어?”

“아니. 괜히 부담 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더니 그녀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따라 웃어야 할지 아니면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라리사가 내게 물어보았다.

“타티아나. 넌 어떻게 생각해?”

“어…… 뭐가요?”

“바르바라 말이야. 잘하겠지?”

내가 보낸 사진을 본 바르바라는 너무 즐거워했었다. 그 목소리와 기색만 놓고 보면 연주에 딱히 지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트러블의 원흉인 선배들과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입으로 이야기하자니 조금 창피하다.

그렇다고 아나스타샤가 대신 말해 주는 것도 싫고.

“분명히 잘하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확신은 있지만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애매모호한 한마디였는데도, 친구들은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듯 저마다 이야기했다.

“물어보길 잘했네.”

“마음이 놓여.”

“네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잘되더라고.”

내 말에 특별한 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난 말이 말에서 그치지 않고 이루어지도록 늘 움직일 뿐이다.

그래도 그 말이 결국 현실이 될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준 덕분이었다.

바르바라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약간 긴장이 풀린 분위기 가운데에서 누군가 먼저 제안했다.

“응원 메시지나 보내 볼까.”

그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스마트폰을 들었다. 바르바라에게 무어라 보낼지 고민하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귀여웠다.

아까 전화를 하긴 했지만, 나도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싶어졌다.

“…….”

잠깐 멘트를 생각하며 고민하는 사이 주변이 조용했다. 고개를 드니 친구들은 모두 메시지 작성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만 보니 지금 내가 여기에 한 문장 보탠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이 분위기 자체였다.

난 메시지를 입력하던 창을 끄고는 그대로 스마트폰을 들고 모두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으로 보면 각자 다른 일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모두의 메시지가 함께 더해진다면 메시지에 골몰하고 있는 중이란 걸 알아볼 수 있으리라.

난 바르바라가 우리 교실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길 바라며 그녀에게 사진을 보냈다.

각자 메시지도 보내고 조금 어수선해진 가운데 여전히 오가는 대화 주제는 오늘 오전에 있을 바르바라의 무대였다.

오전 수업 도중에 진행될 예정이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걸 어떻게 봐야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11시 반이 되면 선생님한테 방송을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보려고.”

“오늘…… 류드밀라 선생님이네.”

“응. 들어주시겠지?”

“글쎄?”

음악사를 맡으신 류드밀라 선생님은 융통성 있는 분이시니 부탁하면 들어주실 것 같긴 하지만, 확정이 된 건 아니다.

차라리 수업 시간 전에 미리 물어보는 게 어떻겠냔 의견이 오갈 때였다.

주도적으로 이야기하던 라리사가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허락해 주실지도 모르니까, 너희도 시간 되면 반으로 와. 같이 보자.”

“같이요?”

“응. 어차피 볼 거 아니었어?”

연습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바르바라의 무대는 당연히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난 이미 아나스타샤와 보기로 약속한 후였다. 오전 내내 같이 있을 생각이기도 했고.

물론 반에서 친구들과 함께 본다고 해도 그녀와의 약속이 깨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오늘은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거절하면 내가 반 친구들과 라리사를 무시한다고 오해할까 걱정이었다.

“저기…….”

“우린 그냥 연습실에서 보려고.”

어떻게든 오해를 사지 않게 말하려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그냥 있는 그대로 가볍게 말해 버렸다.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라리사는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재차 물었다.

“각자 연습하다가 보려고?”

“아니. 우리 오늘 오전엔 같이 연습하려고 하거든. 그러다가 바르바라의 무대 시간이 되면 그것도 그 자리에서 볼까 해서.”

“오늘 같이 연습하니?”

묘하게 밝은 목소리로 라리사가 되물었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라리사는 안도한 듯 온몸에 힘을 풀더니 웃었다.

“알았어. 그럼 너희들은 그렇게 해.”

그녀의 표정엔 오해도 불만도 전혀 없었다. 그저 다행이라는 감정만이 아나스타샤와 내 쪽을 번갈아 스쳤다.

난 그제야 라리사가 요즘 우리 사이에 감돌던 기류를 눈치채고는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가 은근히 날 피하고, 내가 우울했던 것이 라리사에게도 다 보였던 것이다.

걱정은 하지만 콩쿠르 출전 등 여러 가지 예민한 상황이 깔려 있다 보니 라리사도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마음만 썼던 모양이다.

다 같이 바르바라의 무대를 보자고 제안했던 것도 바로 그 마음의 일환이리라.

라리사에게 정말 미안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녀가 웃었다.

“왜 그래? 타티아나.”

“그냥요.”

생각이 깊고 따뜻한 라리사에게 다음엔 제대로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바르바라의 무대 이야기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교실의 분위기는 시간이 흘러 살짝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나갔고,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흩어졌다.

난 악보를 펼쳐 들고는 오전에 연습해야 할 곡들을 다시 몇 가지 짚어 보았다.

콩쿠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내가 연습하는 건 첫 번째 라운드에서 선보여야 할 독주곡들이었다.

많은 참가자 사이에서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려면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난 이 독주곡들의 레퍼토리와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뭐 해?”

“깜짝이야…….”

한창 악보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다. 기겁해서 돌아보니 리처드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곡 연구 중이죠.”

“흠…….”

그는 흥미롭다는 듯 내가 보고 있는 악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곡 중간을 펼쳐 놓은 것이긴 하지만, 리처드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중간 부분의 악보만 읽고 곡을 맞추는 건 쉽게 해낼 테다.

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약간 심술이 나서 악보를 휙 덮어 버렸다.

“가까이에서 보지 마세요.”

“내가 본다고 뭐 달라져?”

“기밀이에요.”

“푸하하하.”

나름 매정하게 말한 건데도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난 그제야 왜 그에게 감정이 살짝 상했는지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떠나고 아나스타샤는 날 피하는 상황 속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던 내게 리처드는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한승우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마 그 애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테지.

그러던 중 분위기가 좋아지자마자 말을 걸어오니까, 일부러 안 좋게 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오늘 아나스타샤랑 같이 연습하기로 했다며. 라이벌에게도 다 밝혀 버리는 기밀이 무슨 의미가 있어?”

“…….”

진짜로 기밀이라서 안 보여 주겠다고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리처드가 조용히 물었다.

“라이벌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지?”

그리고 난 그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라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안도하는 마음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리처드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 사실 한참 전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으면서.

난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리처드도 혹시 걱정했던 건가요?”

“뭘?”

“저랑 아나스타샤의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닌가 하고요.”

내 말에 리처드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틀어질 일이 없다는 건지, 아니면 걱정 자체를 할 일이 없다는 건지. 그의 말은 늘 그렇듯 약간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의만큼은 전혀 모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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