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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38화 (1,038/1,277)

##  1038화

리처드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한승우도 살그머니 다가왔다.

“아나스타샤랑은 화해한 거야?”

조심스레 다가온 것치고는 상당히 직설적인 물음이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보니 마음은 편했지만,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화해…… 글쎄?”

“아까 보니 같이 들어오던데.”

“같이 다니더라도 사이는 얼마든지 안 좋을 수 있지 않니?”

난 괜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승우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그런지 이럴 때 은근히 놀려 먹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런가?”

그리고 한승우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경향이 있었다.

뭔가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더 장난을 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렇게 바로 납득해 버리면 어떡해? 아니야. 농담한 거야.”

“나도 알아.”

“…….”

하지만 그는 내 생각보다 더 고단수였다. 이미 내가 어떻게 장난을 걸고, 어떻게 반응할지 다 알고 있는 눈치다.

난 눈을 흘기며 한승우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엔 안 이랬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능글맞아진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 애가 우리를 쥐락펴락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어쨌든 더 말려들었다간 불리해질 것 같아서 난 얼른 리처드를 향해 대화의 화살을 돌렸다.

“아무튼…… 먼저 물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것 같지 않아요?”

“무언가?”

“왜 다퉜냐고 묻진 않고 화해했냐고만 묻는 거예요?”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섭섭한 부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웃고 넘겼겠지.

하지만 난 오늘 아나스타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이 정도 이야기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도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농담을 살짝 섞었다.

“혹시 제가 무섭게 행동하기라도 했나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

“그런 말을 좀 들어서요.”

아나스타샤도, 선배들도 그랬으니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애들이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조금 궁금했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건 전혀 무섭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답변이니까 그냥 내게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 아주 쉽다.

하지만 리처드와 한승우는 서로를 잠시 돌아보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답했다.

“응, 약간.”

“좀 무섭긴 했지. 너도 아나스타샤도.”

너무하다, 정말.

나는 그들이 나를 정말로 무서워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노려보려 말했다.

“무서우면 피해 버리는 건가요?”

“아니, 그건 별개지. 내가 언제 무섭다고 피하는 것 봤어?”

“?”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본 리처드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혹시 내 말이 그의 자존심이라도 건든 걸까. 살짝 눈치를 살피며 바라보자 리처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대해선 한승우가 말해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라고.”

“……뭐?”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아침에도 아나스타샤에게서 에르네스트와 다투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또 한승우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걱정부터 들었다. 뭘 어떻게 했기에 건드리지 말란 말을 들은 거야?

“자세히 설명해 줄래?”

“자세히라 할 건 없고…… 너희들 세 명이 다들 각자의 일로 예민해져 있던 건 나도 알고 있었어.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었지.”

내가 살짝 흥분해서 물어도 한승우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덕분에 나도 진정할 수 있었다.

한승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자신의 입장과 역할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반대로 돌려줄 것이 있다면 반드시 돌려주려고 한다.

그 의지와 능력을 확인한 적이 있는 나는 지금도 그를 신뢰한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승우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해 봤더니 그냥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 했었어.”

“네가 먼저 뭔가 요구했었니?”

“아니, 전혀.”

잠깐 들어 보니 한승우가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단지 에르네스트가 날 대할 때 그러했듯 한승우에게도 거리를 두었을 뿐이다.

약간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혼자 떠나려 했던 걸까.

에르네스트의 뜻을 존중하고 이해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한승우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살짝 덧붙였다.

“대신 이런 말을 하더라. 너와 아나스타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

“짐작 가는 거 있어? 내 생각엔 아마 두 달 동안 먼저 떠나는 것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나중에 따로 사과하겠다고 했어.”

이미 에르네스트는 나에게 충분히 사과했었다.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독단적이라는 걸 안다면서 웃었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이 반대하고, 아나스타샤와 싸우고, 내가 섭섭해해도 그는 굴하지 않고 떠났다.

한승우에게도 말했을 정도면 정말로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난 솔직히 약간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당장 목소리도 못 듣는데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사과는 둘째 치고 연락이나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간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한승우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몇 번 물어본 것 같긴 한데 에르네스트가 대답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참 단호하기도 하다.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리처드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요즘이 무슨 200년 전도 아니고, 어딜 가더라도 전화 신호 정도는 가기 마련인데…… 얼마나 깊숙한 산골짜기에 가 있길래 아예 깜깜무소식인 건지 모르겠네.”

혹시 간헐적으로 신호가 잡히진 않을까 싶어서 난 종종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보곤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신호가 간 적이 없는 걸 보면 아예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리처드는 살짝 다른 추리를 제시했다.

“스마트폰 뺏기고 어디 감금되어 있는 것 아냐? 작곡 콩쿠르니까.”

“듣고 보니…….”

본연의 실력을 무대에서 증명해야 하는 기악 콩쿠르와 달리 작곡 콩쿠르는 학교 시험처럼 종이를 제출해서 결과를 낸다.

보통은 미리 작곡한 작품을 내지만, 두 달의 시간 동안 작품을 써야 하는 콩쿠르라면 그사이 외부의 도움을 차단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빼앗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다만 리처드가 말한 감금이란 단어가 날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성한 몸이 아니다. 아프기라도 하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긴 한 걸까?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리처드가 웃었다.

“뭐, 언젠가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나겠지. 원래 그런 녀석이었고.”

나보다 오래 에르네스트를 봐 온 리처드의 말이라 그런지 조금 신뢰가 간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리처드는 손가락을 들더니 천장 너머 하늘 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아니겠어?”

“그렇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용기를 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서 리처드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살짝 이야기해 줄까 싶었는데 마침 아나스타샤가 교실로 돌아왔다.

리처드는 더 이야기할 것이 무어 있겠냐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연습 잘해.”

그러더니 화장실에 잠깐 가겠다며 교실을 휙 나가 버렸다. 한승우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잠시 후 아나스타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저 애들이 뭐라니?”

교실에 오자마자 본 광경이 리처드, 한승우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이었으니 아나스타샤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별것 아니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희 언제 화해했냐고 하던데요?”

“화해? 화해는 선배들이 한 거고 우린…… 어…… 오해를 푼 거지. 그렇지 않니?”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창피해했다. 그녀는 은근히 이런 주제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앞으로 오해는 없는 거예요. 아시죠?”

“그래, 알아……. 연습이나 하러 가자.”

낯간지러운 대화는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얼른 내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난 그 손길을 따랐다.

***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습한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투자했다.

덕분에 우린 서로의 레퍼토리를 거의 다 꿰뚫어 보고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 등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평소 어떤 몸짓과 억양으로 이야기하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알아보는 것과 비슷했다.

“…….”

그런데 잠깐 같이 연습을 안 한 사이 아나스타샤는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테크닉적으로는 이미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내 생각을 한 단계 더 뛰어넘었을 정도로 아나스타샤의 테크닉은 견고하고 수준 높았다.

음악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음색이 굉장히 예뻤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로 음악의 분위기에 맞춰 어떤 코디네이트를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져 왔다.

난 약간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혼자서는 연습이 잘 안된다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니?”

“전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걸요?”

난 조용히 연주를 감상하면서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음악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글쎄? 난 그냥 누가 보고 있으니까 잘되는 것 같은데.”

독자적인 음악을 비교 분석해 보고 싶었던 목적은 달성하기 어려워졌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은 정말 기분 좋게 들렸다.

짙고 사랑스러운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듣는 내내 난 정말 행복했다. 우리가 경쟁자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그녀 같은 연주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다음은 네 차례야.”

“그렇네요. 어떤 곡부터 해 볼까요?”

“편할 대로 해.”

실력을 숨기거나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우리는 서로 어떤 음악을 꺼낼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린 그렇게 서로 음악을 연주하고, 같이 의견을 공유하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구를 해 나갔다. 그 과정에선 그 어떤 경쟁심도 오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게 정말 그렇게 들렸니? 혹시 나 견제하는 거 아니지?”

난 깔깔 웃으며 받아 주었다.

“아하하하, 들켰나요? 아나스타샤야말로 일부러 못 하는 척하시면서 절 방심하게 하려는 것 아닌가요?”

“예리하네. 맞아, 사실 난 실력의 37% 정도만 내고 있거든.”

“……왜 그렇게 구체적이에요?”

“뭔가 그럴싸하지 않니?”

견제나 방심 같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우린 전혀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와 숨길 것도 없고, 무대 위에선 최선의 음악으로 마주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농담들은 살짝 긴장을 풀어 주는 향신료 정도에 불과하다.

난 되레 그녀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을 수 있어서 기뻤다. 진정으로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이러긴 어려울 테니까.

“슬슬…….”

“그렇네?”

한동안 연습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3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린 가까이 모여 앉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바르바라의 앞 순서 연주자가 쇼팽의 발라드 3번을 연주 중이었다. 우린 고대하던 순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잘하겠지?”

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바르바라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맨 위에 와 있었다.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란 걸 알 것 같아. 응원에 걸맞은 결과로 보답할게.]

그 짧은 메시지는 바르바라의 기쁨과 각오를 너무나 잘 드러내 주었다.

잠시 후, 쇼팽 발라드 3번의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연주자가 무대 뒤로 퇴장했다.

난 양손을 꼭 모은 채 아나스타샤와 어깨를 맞대고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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