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39화 (1,039/1,277)

##  1039화

아나스타샤만큼은 아니지만 바르바라도 키가 크고 자세가 좋아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검은색의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교실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아침부터 선배들을 화해시켜 사진까지 찍어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응원한 보람이 있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나서는 바르바라의 발걸음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그녀는 무대 앞까지 나와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그 어떤 걱정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쇼팽의 음악에 대한 생각뿐이리라.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불꽃같은 박수 소리가 사그라들자 바르바라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검은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조명을 받아 묵직한 광채를 발했다. 그 빛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종소리처럼 영롱한 소리가 홀을 울리기 시작했다.

“…….”

쇼팽의 에튀드 op.10의 8번 곡.

바르바라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재빠른 아르페지오가 마치 새처럼 날아들더니 눈앞을 지나쳐 다시 반대편으로 향했다가 되돌아온다.

자기도 모르게 그 뒤를 좇게 되는 청중들의 시선은 그녀의 왼손에 지배되어 있었다.

두 개의 각자 다른 음악이 순간적으로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것이 얼마나 고난도의 테크닉과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지 아는 나는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쇼팽 특유의 인체 공학을 무시한 아르페지오 진행은 정교하게 구사하기가 정말 까다롭다.

절뚝거리지 않고 균일한 소리를 내려고 하면 깊은 소리를 내기가 어렵고, 음악성의 깊이에 신경을 쓰면 속도감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오른손을 완벽히 움직인다 하더라도 주된 리듬이 왼손에 가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정말 높은 수준의 기본기를 요구하는 곡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단련해 숙련된 연주자들도 이 곡을 연주할 때면 각자의 습관이나 장단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이 곡은 바로 그 의도로 예선곡으로 선정된 곡들 중 하나였고, 바르바라는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데에 집중했다.

“…….”

그 결과는 너무 훌륭했다.

너무 느리거나 빠르지 않고 안정된 속도, 얕고 가볍지 않은 또렷한 표현력, 거기에 여유로운 퍼포먼스까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화면으로 보이는 바르바라는 너무나 매력적인 피아노 연주자였다. 길

지 않은 에튀드 한 곡만으로 바르바라는 이미 청중 대부분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내가 그녀의 친구가 아니라 심사 위원이라 하더라도 분명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 같다.

2분 남짓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진 건 에튀드 op.25의 4번이었다.

‘이번엔 또 다른…….’

방금 전 연주했던 곡이 바르바라의 수준 높은 실력을 편안하게 보여 주었다면, 이번 곡은 조금 더 격렬하고 감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곡이었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던 캔버스를 집어 던지고는 갑자기 벽에다가 물감 통을 그대로 끼얹는 인상이다.

그 상태로 바르바라는 맨손으로 벽을 만지고, 그대로 옆으로 달려 나가며 양손으로 벽에 마구 손자국을 냈다.

도약하는 리듬과 옥타브로 찍어 남기는 멜로디는 내 눈앞에 파란 손자국으로 변모하여 흔적을 남겼다.

“…….”

이 곡 역시 연주자들의 편차가 굉장히 큰 곡 중 하나다.

바르바라는 속도감에 있어선 그리 특이할 것이 없었지만 왼손의 리듬에서 정말 미세한 차이를 주면서 자신의 음악을 드러냈다.

격정적으로 음악을 밀어붙이지만, 이성을 잃은 채 내달리지 않고 차분함으로 음악을 지배한다.

그런 바르바라의 성숙한 일면은 다음 곡인 녹턴 op.62의 1번으로 이어졌다.

‘한 곡 같아.’

바르바라는 적당한 텀만 살짝 주고는 손을 다시 풀거나 하는 동작 없이 그대로 다시 연주에 임했다.

조성도 템포도 모든 것이 다르지만 마치 소나타의 구성처럼 음악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장조의 무게감 있는 화성에 바르바라는 방금 전까지 이어 오던 감정을 적절히 섞어 넣었다.

그렇게 하니 청중들은 미처 긴장을 풀 틈도 없이 음악에 다시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숨이라도 돌릴 수 있어야 보다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텐데, 바르바라는 자신의 음악을 지능적으로 구사하면서 청중들의 판단력을 빼앗고 있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예술적인 덫이었다.

“…….”

바르바라와 그녀의 지도 선생님은 이 예선전을 그저 다른 참가자보다 조금 돋보여 뽑히기 위한 무대로 준비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어떤 연주자인지 청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선명히 읽혔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절대로 눈을 뗄 수 없도록 구성된 프로그램과 음악적인 깊이, 바르바라의 실력이 모두 완벽하게 어우러져 그녀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실력을 숨기던 애는 여기 있었네.”

결국 참지 못하고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연주 중에 말을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난 그녀의 말에 십분 동감했다.

쇼팽의 녹턴 op.62의 1번은 정말 유명한 곡이라 그만큼 여기저기서 자주 들린다.

나 역시 이 곡을 연주할 줄 알고,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다. 듣기도 정말 많이 들었고.

그리고 바르바라의 연주는 이전에 공동 리허설 때 들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어 보니 그건 바르바라가 자신의 감정을 전부 내보이지 않고 적당히 조절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이 자리에서 바르바라는 그 어떤 때보다 곡에 몰입했다.

흔히 연주되어 익숙해야 했던 이 녹턴은 바르바라의 감정을 빼곡하게 담아 마치 홍수처럼 무대 아래로 쏟아졌다.

‘좋겠다…….’

지금 무대 위에 있는 바르바라가 부럽다.

나도 자주 무대에 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대 위에서 음악과 함께 있는 바르바라를 보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곳에 있는 청중들도 부럽다.

지금 나와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으로 엄청나게 열화된 음질로 연주를 들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걸로도 리듬이나 음색의 뛰어난 색채감 정도는 느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의 부피를 느끼기엔 부족했다.

난 그간의 경험으로 바르바라의 실력이 얼마나 내 피부를 찌릿찌릿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안다.

기대감은 있는데 막상 연주는 이렇게 들을 수밖에 없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연주가 잦아들며 끝나고, 바르바라가 손을 들어 올린 사이에 난 아나스타샤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

“돌아오면 연주해 달라고 하죠.”

“그럴까.”

바르바라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드레스 자락을 정돈했다. 이번엔 전혀 다른 음악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쇼팽의 마주르카 op.33의 3번이었다.

“…….”

라장조의 경쾌한 리듬으로 음악이 시작된다.

마주르카는 본래 해석에 따라 다양한 리듬이 나오지만, 이 곡은 과하게 마주르카임을 의식하고 박자를 뒤틀다 보면 완전히 이상해져 버린다.

독주곡 이전에 춤곡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고 사람이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연주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바르바라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괜한 루바토에 신경 쓰는 대신 화려한 소리를 내는 것에 집중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폴란드 땅을 떠돌던 선율이 지금 바르샤바에서 다시 울린다. 이어진 마주르카 op.33의 4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조금 감정적으로…….’

에튀드를 구성했던 것과 비슷했다.

처음엔 보편적이고 알기 쉽게 실력을 보여 주어 청중들을 집중시키고는 그다음엔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선보인다.

느긋하지만 느끼하지 않게. 바르바라는 앞선 곡을 경쾌한 춤곡에 집중한 것과 달리 이번 마주르카는 독주곡의 성격에 맞춰 연주하고 있었다.

갈대밭과 풀을 뜯는 양들. 피리 부는 목동이 손을 흔든다. 폴란드 시골의 정경을 그리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편안하게 빠져들 즈음 먼 곳에서 울려오는 울음소리가 있었다.

“…….”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바르바라는 능수능란하게 이 마주르카에 실린 묘한 분위기를 그려 냈다.

내 해석과는 꽤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완성도만 놓고 보자면 그 어떤 연주자에 비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정말 잘 해냈어.’

5번째 곡도 마무리되고, 남은 건 한 곡이었다.

지금까지 연주했던 짧은 에튀드나 녹턴, 마주르카가 전채였다면 이제 본격적인 메인 디쉬가 될 만한 곡을 꺼내게 되는 것이다.

제시된 후보 곡은 발라드, 뱃노래, 판타지 중 한 곡.

일반적으로 참가자들은 발라드를 많이 연주하는 편이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자신의 장점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잘 아는 연주자였다. 그녀는 조금 특별한 선택을 시도했다.

“판타지였지?”

“예, 맞아요.”

쇼팽의 판타지 op.49는 1841년, 서른한 살의 쇼팽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시절 작곡한 곡으로써 당시에도 상당히 파격적인 곡으로 평가되었다.

소나타보단 짧지만 단악장으로 표현하는 곡 중에선 굉장히 길었다.

그리고 전성기의 쇼팽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내어 엮은 곡이라서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굉장히 많다.

쉬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이어서 연주하려면 그만큼 굉장한 이해력과 실력이 필요했다.

“…….”

그리고 용감하게 이 곡에 도전한 바르바라는 위축되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로 곡을 휘어잡았다.

특별한 매력을 지닌 바르바라만의 음색과 리듬감이 판타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어우러져 펼쳐진다.

거기에 엄숙하고 견고한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역량까지 뒷받침되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양손의 박자를 독립적으로 쓰면서 절묘하게 하나로 귀결시키는 바르바라의 실력을 보던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걱정은 딱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의 무대를 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긴장이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

좁은 연습실에 불편하게 앉아서 작은 화면을 보며 안 좋은 음질로 듣고 있는데도 편안하고 안락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도 바르바라가 격렬한 프레이즈를 연주할 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정도로 가슴을 크게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바르바라의 성공적인 무대를 보면서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다리를 바꿔 꼬면서 손목을 까딱거렸다.

“좋았어.”

“완벽했어요.”

쇼팽의 판타지 연주가 끝나고 엄청난 박수가 바르바라에게 향했다.

나와 아나스타샤 역시 그 박수에 동참했다. 물론 바르바라에게 들리진 않겠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그제야 살짝 힘든 기색으로 손등을 들어 이마를 닦으며 웃었다. 연주 실력이 워낙 훌륭해서 그런지 힘들어하는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청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바르바라가 뒤돌아 무대를 나가는 모습을 카메라로 지켜보면서 우린 작게 속닥였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되겠죠?”

“심사 위원들 귀가 멀쩡하다면 절대로 지금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정말…….”

솔직히 오늘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같이 간 선배들 중 한 사람은 트러블을 겪고 싸우기까지 하고…… 멀리서 보던 나도 미칠 지경이었는데 당사자인 바르바라는 얼마나 불안했을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잘 극복해 냈고, 결국 이렇게 훌륭한 무대를 보여 주었다. 그런 그녀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밖이 소란스럽네. 나가 볼래?”

“그럴까요?”

난 이 뿌듯한 심정을 최대한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엔 그럴 만한 친구들이 충분히 많이 있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서선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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