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0화
아직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약간 남아 있었지만 교내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정확하게 바르바라가 연주를 마친 시점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아마 피아노과들은 교실에서 수업 대신 쇼팽 콩쿠르를 본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복도에 나와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곧 6학년 피아노과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잔뜩 흥분한 채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복도 옆에 서 있는 우릴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더니 우르르 달려왔다.
“방금 쇼팽 콩쿠르 보셨어요!?”
난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 안도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기분이었다.
앞에 선 아이들 역시 같은 마음인지 내 대답을 듣더니 그야말로 폴짝폴짝 뛰며 들뜬 목소리로 감상을 전해 왔다.
“바르바라 선배 대단했죠!”
“깜짝 놀랐어요. 정말로.”
제대로 된 분석적인 감상이라기보다는 기분에 따른 느낌을 말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난 이 아이들이 바르바라의 연주에서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난 기쁘게 웃으며 그 놀라움에 동참했다.
“저도 그래요. 그래도 준비한 만큼 잘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준비 도와주셨나요, 혹시?”
“전 아니고…… 발렌티나가 힘써 주었죠.”
“아, 같이 있으면서 연습도 하고 그러나 봐요?”
연습만 한 게 아니라 요 며칠은 계속 붙어 다닌 것 같은데……. 오늘 바르바라의 연주엔 발렌티나의 기여도 상당 부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대로 발렌티나에게도 바르바라의 영향이 갔겠지. 며칠 뒤에 있을 발렌티나의 무대도 기대된다.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은 바르바라였기 때문에 우린 잠시 복도에 서서 방금 보았던 무대에 대한 평가와 감탄, 그리고 본선 진출에 대한 기원 등을 함께했다.
“다들 평가가 나쁘지 않네. 그렇지?”
“당연하죠.”
난 키득거리며 아나스타샤와 함께 교실로 향했다.
후배들이 수업 대신 콩쿠르 방송을 봤던 것처럼 우리 학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실 가까이에 다다르니 이미 시끌벅적한 소리가 복도까지 들릴 정도였다.
슬쩍 보니 선생님도 안 계셨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아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라고 둔 것 같은데……
류드밀라 선생님이 이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하실 줄은 몰랐다.
“어!”
“들어와!”
안드레이가 창가에서 어슬렁거리던 우리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와 창문을 열고 손짓했다.
우린 그의 부름에 따라 반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교실 전체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한다.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난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그랬지만, 다 같이 바르바라의 무대를 보자는 라리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둘이서 연습실에 있다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역시 둘이서만 있으니까 심심하지?”
우리가 그간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충당하듯 연습실에 오전 내내 같이 있었던 것에 대해 라리사는 길게 묻지 않았다.
그저 이제 괜찮냐는 눈빛을 슬쩍 보낼 뿐이다.
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나스타샤는 농담조로 받아쳤다.
“바르바라가 너무 잘해 버려서 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맞나 같이 확인할 사람들이 필요했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진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했지?”
자연스레 친구들이 동조했고 우리는 이곳에 형성된 분위기에 어울릴 수 있었다.
잠시 멎었던 대화가 다시 열광적으로 이어졌다. 모두 바르바라가 보여 준 실력을 미처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에튀드에서 녹턴으로 이어질 때 한 곡인 줄 알았다니까?”
“나도 그랬어. 진짜 생각도 못 했었는데.”
“일부러 그런 거 욕심내면 자칫 두 곡 다 망치기 일쑤잖아? 그런데도 그걸 저만큼 해냈다는 게…….”
“바르바라도 대단하지만 프로그램 짜 준 선생님이 진짜 대단하시지.”
“맞아, 맞아.”
친구들의 감상은 내 감상과 거의 비슷했다. 전체적인 곡들의 구성을 어떻게 느꼈고, 각 곡에서 다가오는 의도는 어떻게 해석되는지…….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해도 내 머릿속의 생각들이 다시 한번 정리되는 듯했다.
개중엔 조금 특이한 의견들도 있긴 했지만 모두 합당한 근거와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서 되레 내가 깜짝 놀라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음악가들은 이렇게 감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서로의 감식안을 확인하는 것보단 바르바라를 칭찬하는 일이었지만.
“전 판타지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짧다 보니 감상 역시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에튀드나 녹턴, 마주르카와 달리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정말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판타지를 감명 깊게 들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언제 그렇게 연습했나 몰라.”
“중간에 아지다토로 메인 테마 넘어갈 때 소름 돋았던 거 나뿐이야?”
“나도 그랬어.”
친구들 중 몇 명, 쇼팽의 판타지에 약간이나마 조예가 있는 아이들이 모여들어선 바르바라의 판타지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쉽다거나 미흡했다는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그건 바르바라가 우리 친구라서거나 이미 연주가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바르바라의 판타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여 앉은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한 번도 흠을 잡히지 않고 칭찬을 받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르바라는 그만큼 빈틈없는 연주를 해낸 것이다.
“무슨 이야기들 해?”
판타지 이야기를 하는 우리 쪽으로 안드레이가 살짝 호기심을 표했다. 이 대화에 참가를 희망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바라바라가 쳤던 판타지 이야기. 안드레이 네가 듣기엔 어땠어?”
친구들이 초대장을 보내자 안드레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통과시키지 않으면 망신당할 각오하라고 협박하는 것 같더라.”
“그게 무슨 비유야? 대체.”
“판타지 쳐 본 적 없으니까 인상 평가하는 거지 뭐.”
“……그래.”
아까 6학년 아이들이 안드레이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안드레이도 판타지를 연습해 본 적이 없을 뿐 듣기는 굉장히 많이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니 그 연주를 들은 심사 위원이라면 누구라도 통과시킬 거라고 장담하듯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같이 이야기를 하기엔 충분하다. 난 안드레이를 위해 살짝 자리를 비켜 주며 조금 더 칭찬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당연히 아쉬움이 생긴다.
이렇게 열렬한 찬사를 퍼붓는 친구들이 잔뜩 있는데 정작 당사자에겐 들려주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친구들 몇 명이 스마트폰을 들고 고민했다.
“아직 전화는 안 되겠지?”
“나중에 해 보자.”
“지금 바로 축하한다고 해도 되나? 부정 타는 거 아니야?”
정말 좋은 연주였지만, 아직 예선 결과가 나오기까진 한참 남았다.
그러기 전에 미리 축하하는 말을 했다가 자칫 엉뚱한 결과가 나오면 정말 곤란해지니까 되도록 말을 삼가는 것이 좋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약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 때의 이야기다.
지금 바르바라 정도로 훌륭한 연주를 했다면 그렇게 걱정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스케줄을 시작할 때였다.
아나스타샤는 레슨을 받으러 갔고, 난 혼자서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 건반을 눌러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 음색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 감각을 최대한 완벽하게 해 두기 위한 연습이었다.
내겐 정말로 중요한 연습이었지만,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이러고 있으면 정말 지루하고 도움도 안 되기 때문에 혼자서만 하는 연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30분쯤 연습을 했을 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 발신자를 보자마자 난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발렌티나.”
-응, 타티아나.
난 묻고 싶었던 것들을 속사포처럼 빠르게 쏟아 냈다.
“전화해도 되나요? 바르바라는요? 같이 있어요?”
-잠깐만, 잠깐만. 천천히.
바르바라는 그런 날 진정시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같이 점심 먹었어. 이미 전화나 메시지는 엄청 받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런데 메시지는 둘째 치고 전화는 중요한 것만 골라 받더라. 아주 유명인 다 됐어 벌써.
“그래요?”
-이해는 가지. 그렇게 안 하면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전화만 받아야 할 테니까.
나 역시 바르바라와 방식만 조금 다르지 비슷하게 전화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마치 매니저처럼 도와주고 있기에 신경 쓸 것이 덜할 뿐이다.
발렌티나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깐 기자들이랑 모르는 아저씨들도 잔뜩 와서 바르바라와 인사하고 갔고…… 그 애도 조금 당황스러워했지만 어쨌든 잘 마쳤어.
“예선 무대만으로도 이미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가능성을 느낀 것이겠죠.”
-가능성?
“예. 본선 진출은 물론이고 그 위로도 갈 수 있는 후보일 것이란 가능성이요.”
나 역시 그런 예감을 느꼈기 때문에 꽤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난 바르바라가 겪는 일들이 그야말로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던 발렌티나는 갑자기 한숨을 푹 쉬더니 농담하듯 이야기했다.
-내가 미쳤지……. 경쟁자를 왜 도와줬을까?
“아하하하.”
난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먼 외국이고 선배들도 엉망진창이니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발렌티나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바르바라가 의심할 것 없이 완벽하게 자기 무대를 잘 마친 후에야 갑자기 며칠 후 있을 자기 무대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 불안감 역시 이해가 간다. 난 낮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바르바라가 굉장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는 있었지……. 사실 연습 볼 때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것도 다 적당히 한 거였지 뭐야? 자기 말로는 실전에 강하다고 하는데…… 이것도 예선이잖아? 본선에선 얼마나 더 잘하려고?
발렌티나는 괜히 투덜거렸다.
나나 아나스타샤도 바르바라가 연습 때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에서 본 발렌티나는 그 생각이 보다 짙은 듯했다.
물론 발렌티나의 귀여운 투정은 단순히 옆에 있는 친구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명도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게다가 바르바라뿐만이 아니라 이번엔 전반적으로 다들 수준이 높은 것 같아. 어디에 이런 괴물들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진짜로 미치겠네.
“후후후.”
수준 높은 경쟁자들과 같은 콩쿠르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걸 기쁘게 여기는 건 나같이 살짝 이상한 사람들뿐이다.
일반적으론 당연히 1등을 목표로 하니 경쟁자들이 약하면 약할수록 좋다. 그러니 발렌티나의 불만도 당연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발렌티나의 목소리는 전의를 상실했거나 의욕을 잃은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되레 바르바라가 보여 준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온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난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긴장을 조금 털어 내 주었다.
“아마 발렌티나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발렌티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겐 위험한 경쟁자겠죠.”
-……그럴까?
“물론이죠.”
난 발렌티나의 실력을 잘 안다. 그리고 결코 바르바라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도.
때문에 난 그리 염려하지 않았다. 며칠 뒤면 스포트라이트가 분명 발렌티나에게 향하고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