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1화
카페에 앉아 통화를 하던 발렌티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생억지나 다름없는 푸념을 늘어놓아도 이만큼 다정하게 받아 주는 친구는 흔하지 않다. 타티아나와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착한 애가 선배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사진까지 찍어 보낸 걸까.
조금 궁금해져서 그 부분이나 다시 물어볼까 하던 차였다. 저편에서 바르바라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전화하자.”
-예.
갑작스러운 말이었는데도 타티아나는 왜냐고 묻지 않고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발렌티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는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개운한 기분으로 고개를 드니 바르바라가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것 같다.
“누구랑 통화했어?”
“타티아나.”
“어? 어!?”
바르바라의 건들거리던 움직임이 딱 멎더니 절로 자세가 바로잡힌다.
타티아나의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 이렇게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며 발렌티나는 실소했다.
발렌티나가 웃든 말든 바르바라는 따져 물었다.
“그럼 나도 바꿔 주지! 왜 끊었어!”
“넌 전화 없니? 네가 걸면 되잖아.”
“아니…… 내가 먼저 하면…….”
바르바라는 괜히 웅얼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냥 전화해서 예선 치르는 것 봤냐고 하면 될 일이다. 그럼 타티아나는 분명 잘했다며 칭찬해 주겠지.
그렇게 단순한 일인데도 바르바라는 먼저 전화를 걸어 알리는 건 자랑처럼 보일 것 같다면서 머뭇거렸다.
평소엔 생각도 않고 잘만 저지르면서 타티아나에겐 유독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것이 바르바라가 타티아나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되레 너무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걸, 발렌티나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타티아나가 워낙 신중하게 친구들을 대하는 성격이다 보니 절로 닮아 가는 편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바르바라가 전화 하나 가지고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는 건 조금 재미있었다.
이런 건 내버려 둬도 되리라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너야말로 이번엔 누구 전화였는데? 일부러 조용한 곳에 가서 받아야 할 정도야?”
“어…… 그게, 방송국에서 걸려온 거라서…….”
“진짜?”
“진짜로.”
바르바라는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바르바라는 상당한 주목을 끌며 이곳저곳에서 인사를 받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그녀의 입장에선 무대에 오른 30분 만에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기분일 것이다.
그런데 인사나 인터뷰 요청이 아니라 텔레비전 출연 요청은 상당히 큰 건이었다.
보통 예선에서부터 이렇게 접촉해 오나?
이름값이 조금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국제 콩쿠르 출전 전에도 인터뷰가 들어오곤 하지만, 바르바라나 발렌티나는 그 어떤 곳에서도 접촉해 오지 않았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방송국에서 전화를 받으면 당황할 만도 하다.
발렌티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한테도 알려 주면 안 돼?”
“그게…… 모스크바로 돌아오면 프로그램에 출연해 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고. 그리고 내 예선 레퍼토리를 그대로 가지고 특별 콘서트 무대를 기획 중이라고…….”
“!”
발렌티나는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심지어 그 내용은 단순한 인터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방송국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의미 있는 장면들만을 송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제시하는 기준도 높고 까다롭다.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그 허들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예선 무대로 가뿐하게 통과해 버린 것이다.
“…….”
순간적으로 발렌티나는 일전에 연주했던 비탈리를 떠올렸다.
한 살 위 선배라서 자연스레 10년 가까이 비탈리를 봐 온 발렌티나는 그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알았다.
기본기부터 표현력까지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비탈리는 꽤 높은 곳까지 갈 가망성이 충분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약간의 트러블로 인해 정신이 흔들려 버리면서 비탈리는 자신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발렌티나는 그 모든 과정을 봤기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그는 쇼팽 콩쿠르 예선에서 탈락한 피아니스트로 기억될 뿐이다.
그에 비해 바르바라는 벌써부터 엄청난 러브 콜을 받고 있었다. 성공적인 무대가 그녀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나도…….’
이렇듯 피아니스트는 무대에 한 번 서는 것만으로도 진흙탕에 묻혀 버리거나,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날아오를 수도 있었다.
그 극단적인 상황들을 발렌티나는 직접 눈으로 봤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그녀 자신에게 적용될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콩쿠르를 앞두고 계속 발렌티나를 괴롭혀 오던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그 긴장이 목까지 차올라 정신을 흔들어 놓기 직전에, 발렌티나는 타티아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지금 이런 긴장에 시달리고 있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리라. 아직 예선은 반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남은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이런 불안 속에서 떨며 자신의 무대를 준비 중이다.
옆에 있는 다른 피아니스트가 괴물같이 보이고, 내 실력 따위는 한 순간에 세상에 공개되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겠지.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실력을 믿는 사람만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발렌티나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바르바라의 기쁜 이야기를 축하해 주는 쪽이 훨씬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세상에, 전화 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어!?”
“아마 연락이야 어떻게든 했을……. 아니, 그것보다. 지금 결과도 안 나왔는데 왜 이러나 몰라.”
바르바라는 보기엔 털털해 보여도 은근히 세심한 면이 있다.
때문에 발렌티나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무대를 끝냈다고 개운해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결과가 어떨지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데 착한 애라니까.
발렌티나는 킥킥 웃으며 물었다.
“혹시 불안해?”
“……후회는 없어.”
“그럼 된 것 아니니?”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
예선 결과에 떠는 입장으로 남아 있고 싶은 모양인데, 굳이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발렌티나는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타티아나가 그러더라고.”
타티아나의 이름에 또다시 바르바라가 반응했다. 귀를 기울이는 게 태도에서 보이는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런 태도 덕분일까. 그냥 전하면 정말 어색하게 들릴 법한 말인데도 발렌티나는 그녀에게 전해 줄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네게서 가능성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방송국에서 섭외까지 받은 바르바라이니 몸소 체감하고 있겠지만, 일부러 다시 한번 말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창피한 말을 겨우 전했는데도 바르바라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뭐라 더 해야 하나 싶을 무렵, 갑자기 바르바라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그렇게 보이도록 했으니까.”
“뭔가 꾸며 낸 것처럼 말하지 마. 밥도 잘 안 먹고 연습만 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면서.”
“……네 앞에선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얘.”
바르바라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다 지켜본 발렌티나는 그녀가 상당한 노력가라는 걸 안다.
어떤 특별한 묘수 같은 것으로 주목받은 것이 아니다.
바르바라는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가치를 확실하게 증명해 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매료한 것이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며 웃던 발렌티나는 지금 바르바라처럼 사랑받는 피아니스트가 가까이에 또 한 명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타티아나였다.
평소에도 정말 배울 점이 많다고 느끼는 친구였지만…… 새삼 더 깨닫게 된다.
타티아나가 평소 지향하는 건실한 연주자의 삶이 이렇게 멋지단 것을.
“어쨌든 말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짐짓 뻔뻔한 태도를 취하던 바르바라가 약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말을 전해 듣고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타티아나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후, 걱정이 싹 사라지네.”
“넌 타티아나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더라?”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난 그 애가 허튼소리 하는 건 본 적이 없어.”
그렇게 좋아하면 직접 전화를 하지 그래?
멀리서 신경 쓰고 응원해 준 타티아나에게 너무 고마움을 느끼는 나머지 바르바라는 전화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조금 더 괴롭혀 주고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발렌티나는 허리를 늘어뜨렸다.
‘사실 그 애도 지금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단순히 피아니스트로서의 준비뿐만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에게도 걱정이 많았고, 아나스타샤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함께 참가하기로 결정한 후로부턴 그녀를 라이벌로 봐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여기까지 걱정해서 선배들을 혼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 준 것이다.
각자의 일로 워낙 바빠서 서로 진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발렌티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그녀에게 아까처럼 쉽게 전화를 걸지 못하는 건 바르바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가면 이젠 내가 이야기를 들어 줘야지.’
일정상 예선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로 떠나게 된다.
그 전에 잠깐 이야기하여 그녀를 편안하게 해 줄 시간 정도는 있을 것이다. 타티아나가 발렌티나에게 해 준 것처럼.
그리고 그때, 거꾸로 타티아나의 걱정을 사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일이 있다.
“나도 예선 통과하려면 열심히 해야겠네.”
“이미 열심히 하고 있지 않아?”
“더 열심히 하겠단 거지.”
만약 예선에서 탈락이라도 한다면 타티아나가 얼마나 아쉬워하고 걱정할지 불 보듯 뻔하다.
심지어 며칠 뒤에 바로 콩쿠르로 떠나야 할 아이에게 그런 걱정을 심어 주는 건 못 할 짓이다.
발렌티나는 스스로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타티아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예선에 통과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
남은 시간은 5일 정도.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발렌티나는 준비한 다섯 곡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아침에 연습실에 가서 녹초가 될 때까지 연습을 하다 보면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바르바라가 찾아오기도 했다.
“밥 먹으러 가자.”
“…….”
자기 무대는 끝났으니까 이제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상관없을 텐데 바르바라는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다.
물론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학교에선 콩쿠르가 끝나는 대로 복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까.
하지만 바르바라는 예선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지도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했다고 했다.
지금 학교에 가 봤자 할 것도 없으니 이곳에서 관광을 하며 넓은 세상을 조금 더 맛보는 것이 음악가로서 성장에 더 도움이 될 것이란 이유를 내세워 설득을 했다고 하는데……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소리를 한 것도 웃기지만, 그걸 들어준 선생님과 학교도 어이가 없다.
“그래, 밥 먹고 할까.”
그러나 발렌티나는 알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단순히 놀고 싶다거나 자기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발렌티나를 위해서 남아 있다는 것을.
선배 두 명이 틀어져서 각자 떠난 것을 그녀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이곳에 홀로 남겨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바르바라는 거의 매니저처럼 발렌티나 옆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골론카golonka 먹으러 갈래?”
“그럴까?”
“그다음에 오후 연습도 할 거지? 내가 진짜 괜찮은 연습실 알아 뒀거든? 거기서 하자.”
바르바라는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여 지도까지 직접 찾아선 마치 가이드처럼 안내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속 매니저를 두게 되어서 발렌티나는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스케줄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연습하는 것을 듣고 좋은 의견을 내주기 때문이었다.
‘착한 애가 여기 또 있었네.’
타인에게 마음을 이렇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발렌티나는 잘 안다.
반드시 잘해야 할 이유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생겨나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그 마음을 소중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