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2화
연주자 대기실 앞 벤치에 앉은 발렌티나는 넋을 놓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12일간 진행되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예선전도 이제 마지막 이틀을 남겨 두고 있었고, 발렌티나의 순서는 약 2시간 후에 시작된다.
이 중요한 순간에 발렌티나의 머릿속은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고 어지럽혀져 있었다.
쇼팽의 에튀드 몇 곡과 마주르카, 그리고 배고픔. 지난 10일간 예선전을 보면서 심사 결과가 잘 나올 것이라 예상한 후보 몇 명, 그리고 목마름.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으니 척 봐도 연주자로 보이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거기에 반응을 보일 경황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그녀가 혼자가 아니란 점이었다.
“발렌티나. 지금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혀 볼까?”
벤치 옆에 앉아 있던 바르바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발렌티나는 허락이 아니라 대답 자체를 가로채서 먼저 말했다.
“배고파.”
“맞히기 전에 말해 버리면 어떡해.”
바르바라가 재미없다는 듯 항의했지만 발렌티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옆에서 쫑알거리는 친구가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나았다.
투덜거리는 바르바라의 모습을 보던 발렌티나가 살짝 농담했다.
“그런데 어쩌겠어? 쇼팽과 하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야지.”
“굶주리는 건 쇼팽이 아니라 슈베르트 쪽 아니야?”
“아, 그렇네.”
듣고 보니 그랬다. 쇼팽이 생전에 경제적으로 부족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이런 배고픔을 안고 무대에 오르면 슈베르트적인 감성에 몰입하기 쉬워지는 걸까? 그럼 안 되지 않나? 여긴 쇼팽 콩쿠르인데.
말도 안 되는 1차원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발렌티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뭔가 배가 고프니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진짜 긴장되네…….’
이전에도 콩쿠르라면 몇 번 참가해 본 적 있었다. 그리 떨지도 않았고, 결과도 괜찮았다.
그런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라는 대형 콩쿠르 앞에선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의 분위기부터 일반적인 콩쿠르와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진중했다.
청중들이 얼마나 단호하고 진득한 시선으로 연주자들을 보는지 발렌티나는 잘 안다.
그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자들은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간다.
지난 예선전 동안 수십 명이 그렇게 오르내리는 걸 봐 온 발렌티나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느끼며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닫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결실이 이번 한 순간에 결정된다.
딱 1초만 버벅거려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바르바라가 가볍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슬슬 헛소리까지 하는 것 같은데, 뭐라도 먹는 게 어때?”
시계를 보니 4시 직전이었다.
예선전 저녁 세션은 5시에 시작하고, 발렌티나의 차례는 6시였다. 시간으로만 놓고 보면 지금 무엇이라도 조금 먹어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굶고 있는 건 아니었다. 먹을 수 있었으면 진즉 먹었다.
발렌티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지금 속이 그리 편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빈속이라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싫어. 문제 생길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먹으면?”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야. 나 지금 이 상태로 뭔가 먹으면 무조건 탈이 날걸.”
지금 무언가를 속에 넣으면 그건 위장에 무기를 쥐여 주는 일이나 다름없을 것 같다. 발렌티나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바르바라는 이런 긴장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하는 스타일인지, 몇 번에 걸쳐서 제안했다.
“초콜릿은?”
“속 느글거릴 거 같아.”
“사탕도?”
“입에 단내가 남잖아. 거슬릴걸.”
“그럼 물이라도 마셔.”
“화장실 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싫어.”
하나하나 대답해 주면서도 발렌티나는 살짝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바르바라가 걱정되는 마음에서 묻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화단이 보였고 몇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아까는 다른 연주자들도 있었던 곳이다.
바르바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밖에 있던 다른 연주자들 보니까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마음대로 하던데.”
“그건 그 사람들이고.”
발렌티나는 결국 한 소리 하고 말았다.
“난 예민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연주자들은 대부분 20세 이상으로 발렌티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국제 콩쿠르 참가 경력도 많을 테고, 긴장에 대처하는 노하우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에 비해 발렌티나는 이제 갓 참가 자격을 얻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모든 게 처음이고 두렵다.
‘이런 말도 우습네…….’
그러나 말해 놓고 보니 바르바라 역시 처음인 건 마찬가지인 아이였다.
이 압박감을 똑같이 느꼈을 테고, 그것을 멋지게 극복해 내기까지 했다.
그런 친구를 두고 발렌티나는 그저 자신의 차례에 긴장된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굉장히 창피하고 미안해져서 사과하려던 찰나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엄청 예민했었던 것 같아. 그날 아침엔 아무것도 못 먹었었지.”
바르바라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사과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았던 발렌티나가 서둘러 말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바르바라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발렌티나의 긴장과 스트레스에 공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무대 올라가니까 괜찮더라고.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바르바라는 자신이 잘 이겨 냈던 것처럼 발렌티나 역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해 주었다.
발렌티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빛엔 그녀를 믿어 의심치 않는 신뢰만이 가득했다.
지난 10일을 이 바르샤바에서 함께했지만 사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중앙음악학교에서 10년 동안이나 같이 공부하고 수련한 동지인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유대는 강력한 믿음으로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경쟁이나 잠깐의 스트레스 같은 건 별거 아니다.
“…….”
발렌티나는 가만히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화로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곤 했었지만, 사실 발렌티나는 압박감과 긴장감을 정말 거세게 느꼈다.
같이 왔던 선배들이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돌아가 버린 후엔 정말 둘이서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바르샤바 거리로 나가 돌아다니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르바라가 있어 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바르바라는 자신의 무대를 마치고 난 후엔 정말 헌신적으로 발렌티나를 도와주었다.
스케줄 관리나 식사 등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매일매일 대화를 통한 멘털 관리나 음악적 완성도를 확인할 교류까지.
겨우 5일간의 집중적인 연습이었지만 그사이 발렌티나는 자신의 준비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아이에게 왜 지금 화풀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발렌티나는 양손을 들어서 박수를 짝 쳤다.
수백 명의 사람이 오가는 콘서트홀 광장이다. 하지만 발렌티나의 박수 소리는 굉장히 크게 울렸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이쪽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꽂힌 시선들이 발렌티나가 연주자임을 바로 알아보고는 의아함을 품는다.
거기에 위축되거나 당황하지 않고 발렌티나는 연달아 박수를 몇 번 더 쳤다.
그러자 더 많은 시선이 모였다. 그 시선들을 직시하면서 발렌티나는 자신의 마음과 머릿속에 집중되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준비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하게 느껴지던 긴장감은 허상처럼 사라졌다.
“…….”
손을 내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주었던 관심을 거두곤 다시 각자 움직였다.
지금은 박수 소리로 잠깐 시선을 끄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발렌티나가 진정 준비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피아노로 낼 소리다.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사로잡는 건 무대에 선 다음부터다.
옆에선 바르바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바르바라.”
“응?”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바르바라가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더더욱 고맙지.”
“얘가 갑자기 왜 이런데……?”
갑자기 박수를 친 것도 그렇고, 그녀가 솔직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니 어색하다는 듯 바르바라가 슬쩍 거리를 두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괜한 이야기는 그만두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널 두고 그냥 돌아갔다면 다른 애들이 날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건 그렇겠지?”
발렌티나는 낮게 웃었다. 아마 그대로 다시 바르샤바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말을 하다 보니 생각났는지 바르바라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흔들며 물었다.
“메시지 많이 받았어?”
“응.”
“나도 보여 줘.”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응원 메시지는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가족들과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인연이 있는 다른 음악가들이나 친구들 등. 발렌티나를 응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바르바라는 스크롤을 내려도 계속되는 엄청난 양의 메시지에 놀란 듯하더니 눈에 익숙한 친구들의 이름을 찾아내서는 메시지 몇 개를 읽기 시작했다.
그중엔 바르바라를 기함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
“와, 안드레이 너무하네. 나한테 보낸 거랑 똑같이 보냈어. 여기 봐 봐.”
“그게 무슨……. 어, 진짜네?”
“복사해서 보낸 것 같은데?”
“얘가 진짜 제정신인가?”
정말 어이없게도 안드레이는 바르바라와 발렌티나에게 단어 하나 다르지 않게 완벽히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성의가 없는 것도 이 정도면 웃길 지경이었다.
물론 응원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안드레이에게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으로 돌아온 안드레이의 변명은 보지도 않고 발렌티나는 타티아나가 보내 준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세상이 발렌티나의 멋진 음악을 알아주길 바라요.]
전화를 해 줘도 괜찮았을 텐데, 집중에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타티아나는 짧은 한 줄의 메시지만 보냈다.
하지만 이 짧은 메시지는 발렌티나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이미 바르바라가 예선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처럼 발렌티나도 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예선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그것을 타티아나는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
발렌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 메시지로 넘겼다. 바로 아나스타샤의 것이었다.
[네가 잘해야 나도 잘할 수 있어.]
아나스타샤의 메시지도 짧고 강렬했다.
발렌티나는 그녀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상당히 많은 의미를 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긴장감이 상당하리란 것도 안다.
발렌티나는 앞서 콩쿠르에서 잘 해내야 함을 다시금 느끼며 스마트폰을 껐다.
“이것 좀 맡아 줘.”
“갖고 가지? 안에 사물함 있는데.”
“귀찮아.”
이제 연주자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면 발렌티나는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준비되어야만 한다.
거추장스러운 가방이나 스마트폰은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피아노를 연주할 몸과 드레스면 충분하다.
바르바라는 그 마음을 이해하는지 웃으며 발렌티나의 가방을 받아 주었다.
-5시 저녁 세션 예선 참가자 여러분들은 연주자 대기실로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곧 안내 방송이 나왔고, 발렌티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바르바라는 잘하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르바라의 배웅을 받으며 연주자 대기실로 향하던 발렌티나는 차츰 냉정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배고픔과 목마름도 서서히 사라지고 오로지 음악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지금 대기실 안에 있는 건 전 세계에서 모인 프로 피아니스트들이다. 누구 하나 실력에 자신 없는 사람이 없었다.
절대로 기죽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발렌티나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대기실의 분위기는 생각처럼 매우 진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