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43화 (1,043/1,277)

##  1043화

폴란드 쿠라쿠프 출신으로 비드고슈치 음악원에 재학 중인 가브리엘라 히르슈는 이번 콩쿠르에 정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쇼팽 콩쿠르에서 입상한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폴란드인인 가브리엘라는 더욱 그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일생에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다. 허무하게 놓칠 순 없었다.

그런 각오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모두 눈에 익은 피아니스트들이다. 어려서부터 조명을 받은 유명인들도 있었고, 국제 콩쿠르에서 가끔 얼굴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낯이 익다. 가브리엘라는 작게 고개를 까딱였고, 그쪽 역시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대기실 분위기는 무척이나 싸늘했다.

보통 모여 있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화기애애하게 서로 인사하고 환담을 나누기도 하지만, 가브리엘라와 같은 세션에 모인 이 5명은 각자 집중하는 것을 택한 것 같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

분위기 메이커가 있어서 시시껄렁한 농담 등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푸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무대 준비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

가브리엘라는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든다.

냉정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니 그 분위기를 느낀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는다.

‘결국 우린 모두 경쟁자니까.’

물론 지금까지 무대에 올랐던 수십 명을 생각하면 이 좁은 한 세션의 참가자들에게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일단 당장 순서대로 비교되는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가브리엘라는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기세를 잡기 위해 힘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흰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의 피아니스트가 살며시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이는 외모다.

가브리엘라는 오늘 저녁 세션의 모든 인원의 신상을 꿰고 있었기에 그녀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메체티나였던가…….’

발렌티나는 그녀에게 있어 평가하기에 상당히 난감한 피아니스트였다.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 아직 러시아의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특별한 활동도 없었다.

때문에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어떤 연주를 하는지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리 경계할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온 건 대단하지만 엄청난 실력자였다면 이미 음악원에 조기 진학하여 대외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가브리엘라는 발렌티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온 다른 러시아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그런 애들을 음악원으로 보내지 않고 뭐 한데?’

러시아에서 온 연주자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중앙음악학교의 4인방은 처음부터 꽤 이목을 끌었다.

물론 그 관심은 대체로 실력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맨 처음 무대에 올라왔던 옐브루스라는 피아니스트가 그 관심의 방향을 강제로 비틀어 놓았다.

대체 왜 음악원에 조기 진학하지 않고 중앙음악학교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다음의 비탈리는 연주 중 생긴 트러블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보여 줘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며칠 후 무대에 오른 바르바라는 다시 한번 최연소의 나이로 청중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본선 후보로 거의 낙점된 바르바라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가브리엘라는 그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오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르바라의 친구일 발렌티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

가브리엘라는 일부러 조금 더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참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전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되레 한마디 거세게 쏘아붙일 것처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런데 대답은 발렌티나의 배가 대신했다.

『푸하하하하.』

{이거 걸작이네.}

차가운 얼음 바닥이 한순간에 모조리 깨져 버렸다. 모두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고, 가브리엘라 역시 웃다가 사레가 들려 거의 죽을 뻔했다.

발렌티나는 새빨갛게 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괜히 무게 좀 잡아 보려던 가브리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배고픈 아이를 괴롭히려고 들 정도로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옆에서도 누구 먹을 거 가진 사람 없냐며 난리였다. 가브리엘라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러시아어로 발렌티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발렌티나 역시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그래도 인사를 받아 주는 걸 보니 바로 도망갈 것 같진 않았다.

가브리엘라는 가방을 열고 쿠키가 든 종이백을 꺼냈다. 혹시 몰라 가지고 왔던 건데 다행이었다.

“먹을래?”

“아뇨. □□ □□□□□.”

하지만 발렌티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거절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남이 주는 걸 덥석 받아먹을 순 없겠지.

이해는 하지만 발렌티나가 경계의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아서 가브리엘라는 조금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어졌다.

“미안한데 내가 러시아어는 거의 못 해. 폴란드어나 독일어 하니?”

폴란드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가브리엘라처럼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발렌티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반적으론 이쯤이면 할 만큼 했다. 더 이야기할 것 없이 쿠키를 쥐여 주고 알아서 하라고 끝내면 될 일이다.

그러나 가브리엘라는 발렌티나와 소통할 다른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나마 통하는 게 영어인가.}

{잘 못 해요.}

{상관없어. 그냥 왜 굶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니까.}

그전부터 중앙음악학교 출신의 학생들에게 흥미가 있기도 했고, 발렌티나를 꽤 귀엽게 봤기 때문에 친해지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길게 대화를 나누기에 조금 부적절한 자리였다.

때문에 가브리엘라는 핵심만 간단하게 물어보았다. 발렌티나는 잠시 주저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많이 긴장해서요. 무언가 먹으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무대에 설 시간이 다가오면 연주자들은 컨디션 관리를 위해 식단을 기본적으로 챙긴다.

평소 잘 먹지 않는 음식을 먹었다가 괜히 탈이라도 나면 누굴 탓할 것도 없이 본인 탓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렌티나는 이미 프로 피아니스트라 할 수 있었다. 단지 경험이 약간 부족할 뿐.

{그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무대 위에서 그런 소리를 내면 조금 난감할걸.}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발렌티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혹스러워했다.

딱히 강요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몇 년 더 선배 된 입장으로 가브리엘라는 발렌티나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조심스레 쿠키를 권유했다.

{이거 하나만 먹어 봐. 좋은 재료로 담백하게 만든 거라서 괜찮을 거야. 어머니가 직접 구워 준 건데 난 진짜 긴장한 무대에서도 이걸 먹고 문제 생긴 적은 없었거든.}

가브리엘라도 식단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달고 기름진 쿠키를 가지고 올 정도로 생각 없지 않았다.

{네 생각에 아닌 것 같으면 말고.}

{아뇨…… 그럼 하나만 먹을게요. 이런 경험은 리허설 한 번이면 충분해요. 무대에서 모두를 웃기고 싶진 않거든요.}

방금 전 겪은 일도 있고, 가브리엘라의 어머니가 구웠다는 말에 설득된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쿠키를 하나 받아선 쪼개어 입에 넣었다. 천천히 먹는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몸에 부담을 덜 주려고 하는 게 보였다.

특별히 경계하는 것 같진 않아서 가브리엘라는 웃으며 물었다.

{괜찮지?}

입에 쿠키를 문 채 발렌티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고프던 차에 일단 쿠키를 입에 넣으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긴장도 약간 풀린 것 같고 표정도 좋았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건 비단 발렌티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한 분위기였던 대기실 전체가 지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저마다 각자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쿠키를 먹는 발렌티나를 흐뭇하게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시 후, 대기실 직원이 폴란드어와 영어로 안내했다. 그리고 벽 너머 홀에 청중들이 우르르 입장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드디어 시작이란 생각이 드니 다시 감각이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날카로운 송곳 같은 느낌이 아니라 조금 더 넓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첫 번째로 무대에 오를 사람은 체코에서 온 조셉이었다.

{잘하고 와, 친구.}

{고마워.}

가벼운 응원까지 오갔다. 그리고 그 응원에 답하듯 조셉은 자신의 연주를 훌륭하게 마쳤다.

가브리엘라는 이 콩쿠르에 목숨을 걸고 있었고, 여기서 결국 몇 명만이 본선에 갈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주자들끼리 주고받는 응원을 꽤 좋게 느꼈기 때문에 발렌티나에게도 한마디 해 주고 싶어졌다.

{실력을 보여 줘, 메체티나 양.}

두 사람은 초면이었고, 서로 자기소개를 한 적도 없었지만 같은 세션에 나오는 참가자들의 이름 정도는 미리 조사하고 알아 두기 때문에 어쩐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갑자기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발렌티나는 눈을 크게 뜨고 가브리엘라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히르슈 씨.}

너무 긴장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대기실에 왔던 발렌티나는 이제 상당히 여유롭게 대답하고 있었다.

괜한 도움을 줬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가브리엘라는 어쩐지 발렌티나를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쇼팽 콩쿠르 예선전 심사 위원 파베우 세베린은 서류 뭉치를 넘겼다. 빼곡한 콩쿠르 참가자들의 명단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이번엔 정말 쉽지 않군.’

참가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높아짐을 느낀다.

그건 음악계에 있어 정말 좋은 소식이지만, 심사 위원으로선 그만큼 깐깐하게 실력자들을 꼽아야 한단 뜻이기도 했다.

예선에서 절반 정도는 떨어져야 한다. 이 당락이 최대한 실력에 근거하도록 하는 것이 심사 위원의 일이다.

파베우는 인상을 쓰며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았다.

“…….”

다음 순서로 들어온 건 발렌티나라는 이름의 러시아에서 온 참가자였다.

파베우는 그녀의 실력을 본 적이 없었다. DVD 심사는 다른 심사 위원들이 했고, 100명도 넘는 참가자들의 연주를 따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세는 좋군.’

긴장해서 너무 과하게 행동하거나 반대로 너무 위축되어 있으면 시작도 하기 전에 걱정부터 들곤 하는데, 발렌티나는 그런 것 없이 씩씩하게 무대로 입장했다. 인사하는 모습도 무척 발랐다.

그녀는 지체 없이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사용하는 모델은 스타인웨이. 첫 번째 곡은 쇼팽의 에튀드 op.10의 1번 곡.

예선이 길다 보니 이미 수십 번이나 같은 것을 들어왔던 파베우의 머릿속에선 예상되는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

그러나 발렌티나가 쇼팽 에튀드의 첫 아르페지오를 한 번 오르내리자마자 파베우는 놀라며 몸을 앞으로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대의 연주자들이 으레 할 법한 연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발렌티나의 연주는 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유연하고도 강렬한 아르페지오가 넘실거린다.

에튀드를 기술적으로 대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켜야 진정 마스터할 수 있다는 말은 어디서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쇼팽 콩쿠르라는 큰 무대에 나오는 연주자들마저 소나타 등의 서정적인 음악은 잘 연주하면서도 에튀드에선 음악성이 떨어지는 일이 빈번할 정도였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완료해 나가겠다는 듯 섬세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파베우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조금 방심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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