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44화 (1,044/1,277)

##  1044화

수십 번 오르내리는 아르페지오의 향연을 마무리 짓고 발렌티나는 손을 내렸다.

그녀의 표정엔 은은한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방금 자신이 한 연주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베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깔끔한 연주를 해내고 기뻐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보니 그 역시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다른 의견 없이 발렌티나의 에튀드에 만점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첫 곡의 시작에 불과했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같은 op.10의 10번째 곡이다.

‘곡을 고르기도 잘 고른 것 같고…….’

쇼팽 콩쿠르의 예선 레퍼토리는 주최 측에서 정한 곡들 안에서 고르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피아니스트의 역량을 최대한 다각도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에튀드는 기술적인 부분을 체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분화해서 그룹 지어 놓았다.

아르페지오와 속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그룹 a와 화음을 정교하게 짚어 음색을 만드는 기술을 볼 수 있는 그룹 b가 그러했다.

파베우는 이렇게 예선 레퍼토리를 세분화시켜 놓은 것에 대한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대응하는 피아니스트들을 좋아했다.

물론 거기엔 코칭한 선생들의 의견도 들어가겠지만 결국 연주를 들어 보면 누가 만들어 준 것인지, 아니면 피아니스트 본인이 제대로 알고 연주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정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

그룹 a로 고른 에튀드 op.10의 1번째 곡은 정교한 아르페지오를 요구하는 매우 고난이도의 곡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연주한 것만으로도 기술력은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요한 건 음악성의 증명이다. 발렌티나는 그 목적을 두고 op.10의 10을 골랐다.

조금 더 부드럽게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op.10의 7번이나 11번, 혹은 op.25의 5번을 선택할 수 있었을 터다.

아니면 조금 더 스스로를 과시할 op.25의 4번이나 10번을 연주해도 기교파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감을 표출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러나 발렌티나는 굉장히 밸런스 잡힌 선곡으로 파베우를 설득하려 했고, 그건 그리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기 때문에 되레 튀려고 안달인 피아니스트들이 잔뜩인 이 콩쿠르에서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비바체 아사이vivace assai의 경쾌한 속도로 음악이 달려 나간다.

오른손으로 2도 화음을 이루며 그 중간을 지어 줄 음을 엄지손가락으로 연달아 짚는다.

모든 상단 성부에 악센트가 있기 때문에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그대로 연주하면 음악이 되지 않고 소음만 되기 십상이다.

악센트를 지키면서도 끊어지지 않게 레가토를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음악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절제된 페달링을 필요로 하는 곡이다.

DVD심사를 뚫고 올라왔는데도 이 곡을 우습게 보고 속도에 집중했다가 나쁜 점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들이 수없이 많았다.

에튀드에 대한 이해도와 예선전 레퍼토리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어설프게 쳤다면 op.10의 1번에 이어 10번을 연달아 연주하는 선택은 무척 안 좋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버렸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채점해 온 터라 이제 와서 감점을 하는 데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지만, 가점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음악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감정이 흔들렸다.

‘에튀드만으로 이러긴 쉽지 않은데…….’

파베우는 심사 위원으로서 당연히 객관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을 본다. 지금 일주일 넘도록 봐 온 피아니스트가 100명이 넘는다.

기본적인 실력과 거기에 뒤따르는 음악성, 그리고 이 한 번의 무대가 요행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까지 모두 철저하게 분석하고 따지고 든다.

파베우는 상당히 깐깐한 심사 위원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심사하면서도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술력의 증명을 넘어선 작품의 재현이란 바로 이렇게 해야지……. 제발 다들 이 연주를 좀 듣고 배웠으면 좋겠군.’

자기도 모르게 그런 불만을 떠올리던 파베우는 지금 연주 중인 발렌티나가 최연소 참가자란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는 웃고 말았다.

며칠 전 연주했던 바르바라도 최연소로 상당히 임팩트 있는 연주를 보여 줬었는데 이번에 올라온 발렌티나도 정말 놀라웠다.

러시아에선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 건지 견학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

러시아 특유의 완벽한 기교, 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아카데믹한 냄새.

그것까진 정말 또렷해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해도 발렌티나가 러시아에서 공부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 한 스푼 섞인 발렌티나의 개성의 향이 이 음악을 정말 맛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두 곡은 파베우를 완벽하게 설득하여 식탁 앞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뭐지?’

심사 위원에겐 모든 참가자들의 프로그램 리스트가 미리 제공된다. 하지만 파베우는 그것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다른 심사 위원들은 프로그램 리스트는 물론이고 참가자들의 이름과 출신, 학교 등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파베우는 그런 건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애초에 공정성을 위해서라면 청중 된 입장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음악만을 듣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그 신념만으로 파베우는 참가자들에 대한 신상 정보는 물론이고 프로그램조차 미리 보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듣고 느끼는 것이 온전하게 그의 감상으로 남았다.

‘마주르카라면 op.33이나 50…… 녹턴이라면 op.48이 적당할 것 같은데. op.9가 나오면 살짝 질릴 것 같아.’

두 개의 에튀드 다음으로 이어질 곡으론 조금 더 길고 음악성에 중심을 둔 곡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전채와 샐러드까지 먹었으니 이젠 생선이 나와 줘야 할 차례인 것이다.

순서대로 맛을 느끼게 하는 코스 요리와 여러 곡을 연달아 연주하는 무대는 그리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듣는 사람의 입장 역시 그러했다.

자극적인 것만 연달아 먹는 것을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음악 역시 적당한 템포 조절이 있으면 보다 즐겁게 들을 수 있다.

코스 요리가 어떻게 이어질지, 혹은 음악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노련한 음악가인 파베우는 이미 몇 개의 후보를 점찍어 두었다.

그런데 발렌티나의 선택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또 에튀드?’

렌토lento의 느릿하고 감성적인 멜로디. 마치 길을 찾듯 더듬거리던 리듬은 곧 갈 곳을 찾는다.

발렌티나가 선택한 세 번째 곡은 바로 에튀드 op.25의 7번이었다.

“…….”

이 곡과 op.10의 3번, 그리고 6번. 이렇게 세 개의 에튀드는 녹턴과 같은 그룹으로 선택하게 되어 있는 곡이었다.

서정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곡이라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 녹턴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세 번째 에튀드를 택하는 건 꽤 도전적인 행위였다.

이런 선택을 하는 피아니스트는 100명 중 5명이 될까 말까다.

그것도 제대로 의도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파베우는 이전에 이 곡을 연주한 참가자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다들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잊혔단 뜻이었다.

파베우는 약간의 실망과 걱정으로 연주를 듣기 시작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녹턴처럼 치는군…….’

에튀드치고는 굉장히 느리고 긴 곡이라서 그사이 음악적인 요소들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발렌티나처럼 몰입해서 이 제목 없는 노래에서 이미지를 끌어내려고 하는 피아니스트는 드물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비르투오소적인 액션이 귀에 예리하게 박혔다.

발렌티나는 이 곡으로 이전 에튀드들에서 미처 보여 주지 못했던 실력과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끌어낸 음악적 이해의 표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파베우는 이 선택을 별로 좋지 않다고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귀로 들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론과 말로 무어라 하든 간에 발렌티나는 음악으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기엔 그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에튀드 세 곡으로 마무리 지을 줄이야.’

상당히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들으니 그렇지도 않았다. 정말 평범하고 깔끔한 정리였다.

묵직한 화음들이 서서히 깔리며 느려지다가 마지막 에튀드가 끝났다.

“…….”

조용해진 홀 안의 모든 집중력이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에게 쏠렸다.

당장 박수를 보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등 뒤에서부터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심사 위원석에 있는 그도 이렇게 느낄 정도이니 아마 발렌티나는 더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으리라.

만약 리사이틀이었다면 이대로 연주를 끝마쳐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은 콩쿠르 예선전이었고, 발렌티나는 끝내야 할 곡들을 더 쥐고 있었다.

그것을 정말 다행이라 여기며 파베우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 숨을 고른 발렌티나가 다시 건반 위로 손을 내리고 이번엔 확실히 힘을 빼고 다음 연주를 시작했다.

‘마주르카는 op.24를 택했군.’

이전에 에튀드를 연주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때문에 1부를 마치고 휴식 없이 2부 연주를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지 않고 한 번 끊은 것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발렌티나가 연주하는 마주르카의 리듬이 굉장히 또렷하게 들려왔다.

다른 마주르카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곡은 자칫하면 쉽게 왈츠처럼 들릴 수도 있는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 점을 알고 각자의 방식대로 연주에 임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왈츠를 연주해서 감점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왈츠가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엔 오로지 마주르카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사단조의 선율이지만, 이 단정함이 그녀의 연주를 수백 년 전의 원전의 아름다움에 가깝게 만들었다.

“…….”

파베우는 진품과 가품을 파악하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잘 보이려고 하는 연주 따위는 수없이 들어서 이젠 지겨울 정도다.

그런 그가 듣기에 지금 이 마주르카는 흠잡을 곳 없는 진품이었다. 그 현실은 파베우를 하여금 조금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조금 전의 에튀드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의도가 자명한 그룹으로 나누어서 문제를 냈으니 그걸 이해하고 연주하면 되는 일이니까. 천재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 정도는 능히 돌파할 수 있다.

하지만 마주르카는 그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저 어린 나이에 마주르카를 이렇게까지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폴란드인 중에서도 드물다.

‘진짜 감각이 천재적이거나…….’

길지도 않은 3분 정도의 연주였는데 파베우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건 같은 op.24의 2번이었다.

이번 곡은 연주는 조금 더 쉽지만 리듬감은 더더욱 난해하기 그지없는 곡이었다.

실수하면 왈츠가 아니라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하게 절뚝거리는 곡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발렌티나는 너무나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연주해 나갔다.

옆을 슬쩍 보니 다른 심사 위원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도합 5분 남짓 되는 마주르카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

발렌티나는 손을 떼고 5분짜리 2부의 끝을 알렸다.

파베우는 손에서 펜을 내려놓았다. 이미 합격을 줘도 상관없을 것 같단 기분이 들 정도다.

쇼팽의 다른 작품들은 본선에 가서 연주하도록 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한 곡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연주했던 곡들 중 제일 길고, 독주곡으로서 그 깊이가 가장 깊은 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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