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45화 (1,045/1,277)

##  1045화

토요일 저녁 6시 30분.

중앙음악학교는 토요일에도 학생들에게 학교를 개방하여 연습이나 레슨 등을 위해 찾는 학생들이 있지만, 보통 이 시간이면 모든 학생이 오후 일과를 마치고 귀가해야 했다.

하지만 피아노과 10학년 반은 학생들이 교실에 다시 모여서 시끌벅적했다.

“나 아까 5시부터 기다렸잖아.”

“바보야? 시차 나는 걸 아직도 몰라?”

“아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어.”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생들을 보며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토요일 저녁, 늦은 시간임에도 피아노과 10학년 학생들이 교실에 모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같은 학년 친구인 발렌티나의 쇼팽 콩쿠르 예선전 무대를 모두 함께 보기 위해서다.

발렌티나의 응원을 위해 다른 장소를 알아보려 했지만, 결국 모두 반으로 모였다.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익숙한 곳으론 교실만 한 곳이 없었다.

물론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을 감독하기 위해 선생인 미하일이 부탁을 받아 같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딱히 감독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미하일은 교탁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 노트북 가지고 왔어.”

“와, 준비 제대로 해 왔네? 그럼 그걸로 스피커에 연결해 보자.”

“인터넷 테더링은 내 걸로 써.”

미하일이 선생으로서 앞장서서 무언가 주도할 필요도 없이 이미 준비가 완벽했다.

이미 바르바라가 앞서 연주를 했었기 때문에 모두 관람 준비에 한층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둑어둑한 학교에 모여 있으니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모두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신나게 떠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큰 대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각자의 사정과 기준에 따라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이 교실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를 얻게 되면 큰 무대로 나아가게 될 텐데, 그때를 대비하려면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봐 두는 것이 좋다.

저마다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미하일은 학생들을 잠시 진정시키고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선생으로서 적절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선생이 끼어들지 않더라도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친구가 큰 무대에 올라 있는 걸 보며 기도하고 상상하며 예감할 것이다.

미하일은 그것을 괜히 한 발자국 앞서 이러쿵저러쿵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그렇게 노트북를 세팅하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미하일의 시야 한편에 자연스럽게 한 학생이 들어왔다.

타티아나는 시끌벅적한 아이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지 않고 그 뒤편에 앉아서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다. 마치 미하일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으로 두 사제의 눈이 마주쳤다.

“…….”

타티아나가 싱긋 웃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거기에 미하일 역시 고개를 작게 까딱여 답했다.

오래 봐 온 덕분일까. 미하일은 이렇게 타티아나와 눈빛만 주고받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린 타티아나는 이어 옆자리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멀리 있어서 들리진 않지만 아마 곧 무대에 오를 발렌티나의 이야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미하일이 달리 해 줄 말은 없었다. 그저 그녀들이 믿는 만큼 발렌티나가 잘 해내리라 믿어 줄 뿐이다.

“이제 곧 시작할거야.”

“기대되네.”

“기대? 난 긴장되는데.”

“긴장할 게 뭐 있어? 발렌티나 실력 몰라? 그리고 바르바라도 잘하는 거 봤잖아.”

며칠 전 있었던 바르바라의 무대는 상당히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학생 피아니스트로서 무명에 가까웠던 바르바라였지만 예선에서 좋은 무대를 보인 것으로 언론과 호사가들 사이에서 그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도 벌써부터 그녀에 대한 취재를 하고 싶다는 문의가 몇 번 들어왔고, 문화부에서도 주시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단 한 번의 무대가 연주자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건 연주자라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입상을 한 것도 아니고 예선일 뿐인데도 벌써부터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적잖이 자극을 받은 듯했다.

모두 굉장히 좋은 반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앞서 연주했던 비탈리가 한 번의 무대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인 터라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는데, 바르바라가 잘해 준 덕분에 다시 열광적인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발렌티나가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가 준다면 앞으로 적어도 6개월간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이 있을 거라 미하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생으로서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을 하면서 미하일은 조용히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자 웅성거리던 아이들의 태도가 점차 차분해졌다.

“시작한다.”

“조용.”

시장통처럼 시끄럽던 교실이 한순간에 콘서트홀로 변모했다.

미하일은 교실 상황을 보며 웃었다.

소리는 교실 스피커에 노트북을 연결해서 들을 수 있지만 화면은 달리 연결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스마트폰을 음 소거해서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미하일도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고 소리를 음 소거했다.

곧 스피커에서 천둥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발렌티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연주자는 눈에 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발렌티나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좋은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의상뿐만이 아니라 발렌티나의 태도 역시 굉장히 좋았다. 제일 어린 참가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고 열정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청중석에서 직접 보면 아마 더 그녀에게 매료되리라.

그런 발렌티나의 모습에서 미하일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쩐지 타티아나가 매번 무대에 오를 때 보이던 무대 매너와 비슷해 보인 까닭이었다.

“…….”

혹시 보고 배웠나 싶었다.

미하일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이 입을 모아 다른 학생들이 타티아나의 자세를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로 저렇게 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미하일은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영향을 받을 정도로 발렌티나가 타티아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학생들이 서로 배울 점과 좋은 영향을 공유한다는 건 선생으로서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데.’

발렌티나는 세 개의 쇼팽 에튀드를 연달아 연주했다.

미하일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두 미하일이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한 수준의 연주였다.

그녀가 이 정도로 잘해 줄 줄은 몰랐다. 달리 평가할 것도 없었다. 이 정도 실력이 되면 이젠 알아서 할 단계에 다다른 것이나 다름없다.

교실의 분위기도 한층 고조되었다. 마지막 에튀드 연주가 끝나고 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발렌티나! 언제 이렇게 연습을 한 거야!”

“진짜 대단하잖아.”

친구의 성공적인 첫 단추에 대한 감탄과 응원, 그리고 반드시 비슷한 곳에 서고 말겠다는 열망 등이 복잡하게 뒤엉킨다.

이런 분위기를 미하일은 아주 좋아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건 쇼팽의 마주르카 두 곡이었다.

“……?”

그런데 이 곡에서 미하일은 처음에 느꼈던 기시감을 다시 느꼈다.

눈으로 보이는 자세 등이 아니라 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다 보니 그 느낌은 더더욱 명확했다.

발렌티나의 마주르카 리듬은 타티아나의 것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착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마주르카에서 가능성을 느끼고 그녀를 이 학교로 데리고 왔을 정도로 타티아나의 쇼팽 마주르카를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이 느끼는 바는 분명했다.

놀란 눈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니 마침 그녀도 미하일 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과거에 보여 준 적이 있어서 발렌티나가 그 리듬에 물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무언가 한 적은 없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타티아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 온 이후로 쇼팽의 곡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고, 구세프와 함께 쇼팽 소나타 1번을 완성한 이후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음악가로서의 판단을 존중했기에 따로 그 부분에 대해 질문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쇼팽에 대해 예민한 타티아나가 지금 발렌티나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극복했나…….’

다행히 타티아나의 표정은 평온했다. 발렌티나가 마주르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해서 잘 연주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쇼팽을 어렵게 여기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낸 듯한 제자를 보며 미하일은 약간 목이 메는 기분을 느꼈다.

“…….”

어느덧 발렌티나는 마지막 곡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쇼팽의 발라드 4번. op.52

총 네 곡의 발라드 중 마지막 곡으로, 만년의 쇼팽이 지니고 있던 음악성과 작곡 기법들의 총체라 할 수 있는 곡이었다.

‘훌륭해.’

내림 가장조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오른손으로 짚는 옥타브의 사운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리고 주선율이라 할 수 있는 오른손 내성부를 어떻게 내는지만 듣더라도 발렌티나가 이 곡의 표현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서주가 끝나고, 이어지는 메인 테마는 마치 피아노 독주곡이 아니라 가사가 있는 가곡처럼 들렸다.

“…….”

쇼팽 음악의 특징은 성악에서 영향을 받은 이러한 표현 기법에 있었다. 특히나 이 발라드 4번은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곡이었다.

무작정 독주곡처럼 연주하려고 하면 절대로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해 낼 수 없다.

그야말로 피아노로 노래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라야 비로소 손이라도 대 볼 수 있는 곡인 것이다.

미하일은 몇 년 전, 타티아나가 자신이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알아야겠다며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정도로 노력을 해야 거머쥘 수 있는 소리다.

아마 발렌티나도 그에 못지않은 굉장한 노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 노력의 일면을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하일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 이 연주는 그야말로 피아니스트 발렌티나의 전부를 보여 주는 연주나 다름없었다.

구름 위를 거닐며 노래하듯 감미롭게 들려오던 음악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조금 더 강렬하게 변모했다.

그리고 살짝 잦아드는가 싶더니 조금 더 격정적으로 몰아붙이며 주변을 뒤흔든다.

기교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정말 어려운 구간이었지만 발렌티나는 굉장히 익숙하게 처리해 냈다. 깔끔한 솜씨였다.

“…….”

미하일은 그간 타티아나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다른 학생들과 선생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우고, 앞서 나갈 수 있다면 앞서 나가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타티아나는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던 쇼팽 콩쿠르에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참가하여 굉장한 실력을 보여 주었듯이 말이다.

미하일은 이 음악을 듣고 있는 타티아나가 많은 자극을 받았으면 했다.

격정적인 변주 테마 이후엔 뱃노래가 이어졌고, 그 노랫소리마저 잔잔히 흩어진 후엔 사랑스러운 춤이 따라왔다.

소리로 들려오는 현란한 스텝이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발라드 박자를 쪼개어 만든 이 예술적인 리듬에 미하일은 입을 벌렸다. 굉장한 실력이었다.

노래와 춤 다음엔 그 모든 것을 자아내고 있던 피아노의 본격적인 독주가 폭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전까지의 모든 테마를 하나로 모아 조화시키면서도 피아노만의 장점을 극대화해서 비르투오시즘 역시 화려하게 선보인다.

발렌티나는 사양하지 않고 양손을 앞장세워 피아니스트로서의 실력을 과감하게 발휘했다.

“…….”

미하일은 모두 햇병아리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최연소 쇼팽 콩쿠르 참가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이 아이들은 너무나 빨리 커 버렸고, 각자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 사실은 미하일에게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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