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6화
발렌티나의 레퍼토리와 실력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녀가 실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해냈다. 실력을 100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최소 120은 보인 느낌이다.
그녀가 어려워하던 기교적인 부분들도 모두 이겨 냈는지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
그리고 가까이에서 친구로서 보지 않고 멀리 무대에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음악도 상당 부분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특히 마주르카에서 두드러졌다.
발렌티나가 마주르카를 다루는 방식과 그 리듬은 내가 하던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고, 미하일 선생님과 아나스타샤도 내게 눈짓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것을 가지고 발렌티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맡겼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연주했을 쇼팽 음악들을 발렌티나가 마음에 들어 했고,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느꼈기에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미 난 쇼팽을 연주하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고, 그사이 발렌티나는 확실하게 모든 것을 소화해 냈다.
이젠 발렌티나가 가진 고유의 음악이다. 다만 거기에 내 그림자가 살짝 깃들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년 동안 친구들과 음악을 교류해 오면서 내 음악에도 친구들의 소리가 섞였다.
난 그것을 떼어 내려 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모든 것은 궁극적인 완성으로 향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린 각자의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난 그 사실이 무척 기뻤다.
‘미하일 선생님과 아나스타샤랑은 나중에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어.’
두 사람은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쇼팽을 연주하는 것을 기피하고, 콩쿠르 역시 퀸 엘리자베스를 택한 것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하지만 음악가로서 어떠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건 정확한 진단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분명하게 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세연의 연주를 듣다가 중간에 뛰쳐나와 버린 적도 있었고, 쇼팽 소나타를 연주하고는 일주일이나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전부 내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일이기에 쇼팽의 탓으로 돌릴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날 보는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러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물론 나는 지금도 쇼팽의 음악을 잘 연주하지 않는다. 그건 사실이었다.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난 연주자로서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몇 개나 되는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쇼팽의 음악만큼은 임세연이나 한승우의 연주로 듣고 싶었다.
쓸데없는 고집에 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난 쇼팽에선 손을 뗐다.
어쨌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라고 해서 모든 작곡가를 섭렵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물론 쇼팽을 연주하지 않는 건 정말 특이한 경우겠지만 난 어차피 원래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를 미하일 선생님이나 아나스타샤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
일단 지금 쇼팽을 듣는 건 전혀 상관없었다.
난 괜찮다는 의미로 두 사람에게 웃어 보였다.
미하일 선생님은 쉽게 납득하시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생각해 보면 공동 리허설을 봤을 때도 그녀는 이런 눈빛을 했었다. 다만 내게 거리를 조금 두느라 노골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괜한 걱정이었다. 난 지금 임세연이 눈앞에서 마주르카를 연주한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박수를 쳐 줄 자신이 있었다.
그간 긴 시간을 가지며 염두에 두고 각오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난 어느 누구와 마주쳐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괜히 장난스럽게 아나스타샤의 팔을 끌어안자 그녀가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마주르카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음악에 집중했다.
“정말 잘한다. 그치?”
“후후, 그렇네요.”
방금 전 오갔던 불안한 시선이나 확인 등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우린 발렌티나의 음악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 곡인 발라드 4번은 정말 발렌티나를 새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공동 리허설 땐 실력을 감추었던 걸까……?’
보통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아마 그사이 실력이 더 발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발렌티나가 연주하는 발라드 4번의 완성도는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뛰어났다.
하나의 대곡을 완성하기 위해 피아노 연주자들은 정말 오랜 시간을 거쳐 집을 짓듯 연습하고 연구한다.
나중에 정성스럽게 완성한 집을 보면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비율과 모양 등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완성된 음악이 지닌 예술성은 따로 구체적인 분석 같은 것을 통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발렌티나는 분석은커녕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를 선보였다.
200년 전에 설계되어 지금 다시 환상 속에서 구현된 예술의 미적 가치는 미처 따지기 어렵다.
“…….”
정신없이 감상에만 빠져 있는 사이 꿈속을 걷는 듯 이어지던 음악이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평소 발렌티나는 정교하고 아카데믹한 연주를 잘하는 연주자였지만 감상적인 몰입에는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정갈하게 정돈된 감정을 정말 적절하게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이 동반되었을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자는 그 연습을 굳이 알아 달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처럼 처음 본 곡을 순식간에 연주할 수 있다는 듯 우아하고 환상적으로 연주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때문에 그런 노력을 모르고 결과만 볼 수 있는 청중들에겐 지금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가 사람을 넘어선 무언가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발렌티나는 과격하면서도 세련된 화법으로 클라이맥스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과격함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하게 파문을 그리는 몇 개의 음이 이어지고, 음악은 마지막 코다로 돌입했다.
“…….”
앞선 발라드 테마와 뱃노래와는 전혀 다른 아지타토agitato 정도의 템포로 느껴지는 급격한 선율이 시작되었다.
언뜻 다른 악장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발라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코다였다.
이 속도와 음악적 정합성은 동시에 거머쥐기가 정말로 어렵다.
쇼팽이 요구하는 기준은 너무나 높았고, 앞선 연주로 연주자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쳐 있는 연주자의 감정마저도 이 음악의 요소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발렌티나는 여과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태풍처럼 몰아친 음악은 청중들에게 향했다.
간신히 숨을 참을 수 있는 1분 남짓이 지나고 나서야 강렬한 마무리 화음과 함께 음악이 마무리되었고, 모두 가쁜 숨을 토해 내며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브라바!”
“우승까지 가자! 발렌티나!”
교실에서만 함성이 터져 나온 게 아니었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홀 안의 분위기 역시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엄청난 환호 속에서 발렌티나는 다시 무대 가운데에 서더니 작게 고개를 숙이곤 웃었다.
난 오늘 저녁 뉴스에 분명히 발렌티나가 나올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그 예감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교실 안의 환호성이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이번엔 곧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교실에는 어느새 서로 감상을 교류하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밖에 남지 않았다.
미하일 선생님이 살짝 통제해 주시려나 싶었는데 선생님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웃으며 그냥 내버려 두셨다.
잠시 후,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더니 종국엔 누가 누가 더 발렌티나의 음악에 화려한 찬사를 보낼 수 있는지 겨루는 대결의 장이 되어 버렸다.
난 이 분위기가 너무 즐거워 바로 사진을 몇 장 남겼다.
그야말로 평생 남겨야 할 순간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연주를 마친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는 이틀 더 폴란드에서 지낸 후에 월요일에 돌아오기로 했다.
약간 이상한 일정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원래 일요일에 돌아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발렌티나가 토요일 저녁 세션 무대를 마치고 바로 비행기를 타려면 너무 급하게 준비해야 했기에 하루 더 바르샤바에서 느긋하게 지낸 다음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굳이 하루 더 체류할 이유가 있나 싶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은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콩쿠르 관계자가 그렇게 부탁했다고요?”
-응. 공식적인 부탁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서. 하루 정돈 괜찮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일요일에 마지막 예선 무대를 다 마치고 나면 저녁에 본선 진출자 발표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꼭 모든 참가자가 다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으로도 발표를 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는 결과를 굳이 보지 않고 그냥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콩쿠르 관계자가 그녀들에게 결과 발표를 다 보고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했다.
심사 중간 과정은 극비였고, 절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콩쿠르 관계자라 하더라도 결과를 알 수 없을 텐데 이런 제안을 한 걸 보니 아마 반드시 본선 진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강력한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세요.”
-네 생각도 그러니?
“예.”
콩쿠르 관계자가 왜 굳이 두 사람을 붙잡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사실 금전적으로만 보자면 손해일 수도 있다. 폴란드에서 하루 더 체류하면서 드는 비용이 있으니까.
콩쿠르 관계자는 절대 그 비용을 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쇼팽 콩쿠르 예선전은 참가자들이 사비로 비용을 내게 되어 있는데, 특정 참가자에게만 특혜가 주어진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다른 면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라는 큰 무대의 예선 결과 발표일엔 수많은 기자가 그 자리를 찾게 된다.
거기에서 최연소 본선 진출자 두 명은 분명 직접적인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찍히게 될 사진이나 취재 요청 등이 바로 피아노 연주자로서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인 것이다.
그런 건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오려던 두 사람을 콩쿠르 관계자가 붙잡은 건 상당한 호의라 볼 수 있었다.
발렌티나는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안심이 되네. 알았어. 열심히 사진 찍히고 오란 뜻이지?
“후후, 인터뷰 멘트는 생각하고 계시나요?”
-어…… 글쎄? 전혀.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렇게 굉장한 연주를 하고 나서도 발렌티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밝은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그저 빨리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