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047화 (1,047/1,277)

##  1047화

일요일. 대부분의 사람에겐 쉬는 날이겠지만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오늘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날이었다.

12일 동안 진행된 쇼팽 콩쿠르 예선전이 마무리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긴장하고 있지…….”

오전부터 별관 연습실에 앉아 있던 나는 막상 연습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스마트폰으로 마지막으로 진행 중인 콩쿠르 현장 영상을 보거나 뉴스 기사 등을 보고 있었다.

두 선배와 두 친구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 긴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저녁 세션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나서야 결과가 나오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한나절을 다 날려 버리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나 역시 이제 일주일 후면 모스크바를 떠나 벨기에의 브뤼셀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도 연습할 시간은 주어지겠지만 지금처럼 할 수 있진 않을 것이다.

지나간 영상들까지 돌려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덮어 버렸다.

“…….”

이미 친구들의 연주 영상은 세 번씩 돌려 봤다.

청중으로서, 친구로서, 심사 위원으로서 각각의 입장을 상정하며 듣고 또 들었다.

내 듣는 귀는 줏대 없이 흔들리거나 착각하지 않는다.

많은 레퍼런스로 쌓인 절대적 근거와 내 경험에서 비롯된 기준이 적절하게 음악을 분석하고 평가했다. 난 음악을 평가하는 내 판단력을 신뢰했다.

그러한 분석 후에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친구들은 압도적인 결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실력자들의 협주곡을 듣고 싶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결론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미 친구들에게도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잔뜩 해 줬으면서 막상 내가 불안해하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내고, 내 피아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오후 5시경.

아침부터 계속된 연습으로 살짝 피로해진 몸을 스트레칭하고 있을 때였다.

바르바라에게 전화가 걸려 와서 바로 받았다.

“아, 바르바라.”

-넌 이런 걸 어떻게 버텨 냈니?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바르바라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쯤에 느지막이 홀에 왔거든. 딱히 호텔 방에서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런데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사진 찍히고…… 아니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면 나중에 인터뷰하던가! 왜 녹음기부터 들이미는 거야?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불평을 쏟아 내는 바르바라의 목소리 뒤편으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뒤섞인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인파 사이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사진을 찍고 모르는 말에 대답하다 보니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나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나는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전화를 한 그녀의 심정이 약간은 이해될 것 같아서 조금 웃었다.

“통역은요?”

-홀 내에 통역이 몇 명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은 지금 바쁘지.

“아, 그렇겠네요.”

콩쿠르 측에서 바르바라와 발렌티나에게 남아 있어 주길 요청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역까지 붙여 가며 케어해 줄 순 없었다.

저녁 세션이 곧 시작되니 현재 있는 인력은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꽤 고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선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유감이었다.

“그래도 사진은 많이 찍으셨겠네요?”

-처음 1시간 정도는 재미있었어. 지금은 기절 직전이고.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일 테니까요. 후후.”

폴란드 내의 언론뿐이라면 몇 시간이나 시달릴 이유가 없다.

문제는 오늘이 예선 결과가 나오는 마지막 날이라 전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겠지.

난 그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을 친구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가만히 상황을 읽어 낸 나는 바르바라에게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몇 시간 후엔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하셔야 할 테니까…… 저녁에 전화하진 않을게요. 대신 제가 전화 안 해도 알고 계셔야 해요? 여기에서 보고 있다는 걸.”

-……네 말을 듣다 보니 느끼는데, 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바르바라는 마치 입에 담으면 부정이라도 탈 것처럼 조심스러운 어투로 빙 돌려 물었다.

물론 그렇게 물어도 알아듣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떼로 몰린 기자들이 무슨 이유로 거기에 있겠는가?

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비슷하다뇨? 아마 제가 제일 강하게 확신하고 있을 텐데요.”

예전 같았으면 나 역시 이런 확답을 피했을 터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외면하고 싶어 했고, 또 내 판단력을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주관은 더욱 공고해졌고, 이제는 단지 친구로서 후하게 보는 게 아니라 다방면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객관성도 갖추었다.

이렇게 타인을 평가하기 전에 이루어진 자기 평가를 다른 누구에게 검증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난 상당히 강하게 날 믿었다.

친구들이 내 발언을 그만큼 신뢰해 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하하하하.

바르바라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근거 없는 한마디에 크게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 안심이 된다. 난 이참에 잘되었다 싶어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발렌티나도 옆에 있으면 바꿔 주실래요?”

-어…… 걔?

바르바라가 잠시 수화기에서 얼굴을 뗐는지 소음이 조금 더 강해진다.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잠시 현장의 분위기를 느꼈다.

잠시 후, 다시 말하는 바르바라의 목소리엔 조금 난감함이 담겨 있었다.

-지금 사진 찍느라 바쁜데.

“그럼 이따가 할까요……?”

-그럴래?

사진 열심히 찍히고 오면 되냐고 묻더니만…… 정말로 그렇게 하고 있나 보다.

난 언행일치를 몸소 실행하고 있는 발렌티나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서 나중에 짧은 메시지만 한 번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있으면 그녀들을 향한 축하로 스마트폰이 거의 폭발할 테니 말이다.

***

월요일 아침.

정해진 루틴에 따라 연습실에서 아침 연습을 마치고 응접실로 돌아온 나는 평소엔 잘 안 켜던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몇 번 돌려 뉴스에 맞춰 놓았더니 뭔가 잘 모를 경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난 바로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그냥 틀어 놓은 채로 차를 끓이러 갔다.

“아.”

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오니 소파에 루슬란 오빠가 앉아 있었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뉴스를 시청하던 오빠는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멈칫하여 서 있는 날 보고는 왜 그러고 있느냐며 눈짓을 한다. 난 한 손에 든 찻잔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차 드실래요? 그럼 찻잔 하나 더 가지고 오고요.”

“음…… 아니, 괜찮아.”

그래도 가져올까 싶었지만 그보다 오빠는 내가 옆에 앉길 바라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 주전자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텔레비전에선 경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 오빠가 물었다.

“경제에 관심이 생겼어?”

“아뇨?”

바로 즉답하자 오빠가 조금 황당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베르체노프가의 사람이 경제에 관심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건 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오빠는 곧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더니 리모컨을 빙빙 돌렸다.

“그럼 저건 왜 틀어 놓은 거야?”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요.”

“보고 싶은 거?”

주어를 빼고 말했는데도 루슬란 오빠는 순식간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거겠구나. 쇼팽 콩쿠르.”

“와, 어떻게 아셨나요?”

“모를 수가 있나.”

오빠는 온종일 뉴스는 물론이고 특수한 루트를 통한 정보도 꾸준히 듣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정보 중에서 필요한 걸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캐치하는 명석함을 지니고 있었다.

“네 친구 발렌티나 이름을 온갖 언론에서 이야기하던데.”

그렇지 않냐는 듯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 마지막 세션이 끝나고 나서 1시간쯤 후에 쇼팽 콩쿠르 예선전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참가자는 100명도 넘었지만 대부분이 귀국한 뒤라 발표장엔 30명 남짓 되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콩쿠르 진행 위원장은 6개월 후 있을 본선 진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 있는 연주자들은 강제성이 없는데도 발표장에 남아 있을 만큼 대부분 합격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도 탈락자는 발생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심사 위원들의 기준에 미달한다면 더 이상 위로 갈 수 없으니까.

그러한 차가운 괴리는 언제나 존재했다.

그러나 난 묘하게 평온한 마음으로 발표를 지켜보았고, 기다리던 이름들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예상대로였다.

“바르바라도 있어요. 옐브루스 선배님도.”

우리 학교에서 출전한 네 명 중 본선 진출자는 세 명이었다. 굉장한 쾌거였지만 난 비탈리 선배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옐브루스 선배를 축하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었다. 그런데 두 선배가 같이 있다는 말에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술집에 있다고 했는데 본선 진출자가 술값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전부터 꽤 뚜렷했던 결과를 두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알 것 같아서 난 적당히 마셨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던질 수 있었다.

물론 루슬란 오빠는 이런 뒷사정을 잘 모른다.

“바르바라는 네 친구인 것 같으니까 됐고…… 옐브루스는 누군데?”

“11학년 선배예요.”

“친해?”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인지 오빠는 헛기침을 하더니 그냥 두루두루 잘 지내라며 황급히 뒷수습을 했다. 난 키득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렇게 루슬란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텔레비전 소리도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야기가 경제에서 다음 이슈로 넘어가기 전까지.

“아, 나오네요.”

“예선인데도 꽤 크게 다루더라. 5년에 한 번 열리는 거라 그런가.”

원하던 뉴스가 나오자 난 얼른 자세를 돌려 앉았고, 오빠도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뉴스 앵커는 일단 가볍게 쇼팽 콩쿠르의 내력과 정보들을 잠깐 이야기해 주더니 다음으로 전 세계로부터 주목받는 몇몇 참가자를 소개했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 보았을 만한 20대 중반의 유명 인사들이 참고 영상으로 얼굴을 비췄다.

그러나 그 모든 건 바로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설명이었다.

-이 콩쿠르엔 당연히 우리 피아니스트들도 참가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최연소로 예선전을 통과한 피아니스트들이 무척이나 주목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분들을 직접 취재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특파원 연결하겠습니다.

화면이 휙 바뀌더니 콘서트홀이 나타났다. 그리고 콩쿠르 현장의 특파원과 그 옆에 있는 내 친구들도.

계속 같이 붙어 다녔는지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는 한 화면에 잡히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기만 해도 정말 사이좋은 친구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이처럼 사이좋은 두 사람이 최연소 참가자인 데다가 나란히 본선 진출을 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거기에 대해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인터뷰 준비도 한 것 같네…….’

토요일에 전화했을 땐 아무 생각 없다고 하더니 막상 그러고 나선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다.

발렌티나는 한 번도 떨거나 고민하지 않고 웃으면서 취재에 응했다.

친구가 좋은 결과를 얻고 텔레비전에서도 멋지게 나오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이 다 좋아진다.

뭔가 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괜히 조금 더 오빠와 가까이 앉았다.

“저기, 오빠. 바로 저 애들이…….”

그런데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발렌티나가 특파원의 질문에 대답했는데, 그 대답이 엄청나게 크게 들려왔다.

-제 음악은 당연히 저희 선생님들과 학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음악가에 기원하고 있죠. 그런데…… 제가 제 음악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게 된 데엔 친구들의 영향이 컸어요. 그중에서도 타티아나라는 아이가 굉장히 큰 영향을 줬는데…… 혹시 아세요?

거꾸로 질문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난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특파원은 날 안다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고, 발렌티나는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아이의 쇼팽에서 전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무척 기쁘네요.

“…….”

난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발렌티나의 무대를 보면서 느끼긴 했다. 그녀가 내 음악에서 분명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음악이 섞이는 건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완성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전혀 바라는 것이 없었다. 바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대해서 난 강박적인 관념마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내 걱정을 깔끔하게 부숴 버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빠를 부르려고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지도 내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 옆에서 오빠가 하지도 않은 내 말에 대답했다.

“좋은 애들이네.”

그제야 난 간신히 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살아 있음을 다행이라 여길 수 있게 해 주는 친구는 평생 몇 안 되지 않을까. 난 두 손을 모아 쥐며 계속 이어지는 뉴스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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