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8화
예상했던 대로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전부 쇼팽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교실로 올라가기도 전에 한 무리의 후배들에게 둘러싸여야만 했다.
“발렌티나 선배 잘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축하드려요!”
“바르바라 선배도요.”
“진짜 잘될 줄 알았어요. 선배도 알고 계셨죠?”
“어느 곡을 제일 감명 깊게 들으셨나요?”
아직 두 명의 주인공은 학교에 오지 않았고, 11학년 선배 둘은 마주하여 축하하기가 조금 까다롭다고 여겼는지 후배들은 대신 나에게 편하게 말을 붙였다.
난 이 아이들이 지금 콩쿠르에 대해 어떤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중엔 대답하기에 조금 곤란한 질문도 있었다.
“인터뷰 보셨나요? 발렌티나 선배가 그러던데요? 타티아나 선배에게 쇼팽을 배웠다고……. 어떻게 가르쳐 주신 건가요?”
‘발렌티나…….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 그런 말을 해 버리면 어떡해요.’
난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티나가 인터뷰 중에 내뱉은 한마디는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말이었기에 정말로 기뻤지만, 한편으론 약간 난처했다.
누가 들으면 발렌티나가 내게 정말 본격적으로 쇼팽을 배운 것 같이 들리지 않겠는가?
정작 발렌티나는 선생님께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고, 나랑은 가끔 연습이나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 부분을 조금 강조해서 말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도로 담을 수 있는 만큼은 담아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발렌티나를 가르쳐 주었다는 말은 틀려요. 같이 연습을 하다 보니 제 음악적 뉘앙스도 조금 옮겨 갔을 뿐이죠. 여러분도 그런 적 있지 않나요?”
“아…… 그건 그래요. 친구 거 닮는 일이 있죠.”
“그렇다기엔…… 배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난 고개를 저으며 재차 말했다.
“발렌티나가 그냥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제가 누굴 가르치다뇨.”
“……?”
그런데 지극히 상식적인 내 말에 아이들은 모두 기묘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약간의 압박마저 느껴진다. 말실수를 한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다물자 후배 중 한 명이 말했다.
“저희는 상식적으로 너무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아이들도 따라갔다.
“나도 그래.”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도 타티아나 선배에게 배울 수 없나 했는데.”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이러다간 정말 이 아이들이 날 이대로 연습실로 끌고 가 쇼팽의 음악을 무엇이라도 좋으니 가르쳐 달라고 할 것 같았다.
물론 기술적으로 어려운 쇼팽의 음악을 극복해 내는 노하우라든가 레퍼런스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위한 지향점 같은 것 등을 가르쳐 줄 순 있다.
사실 난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에 그렇게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달리아를 가르쳐 본 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발렌티나에게 가야 할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은 약간 부담스러웠다.
“아, 아무튼 발렌티나의 말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같이 연습했다는 걸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니까요.”
엉겁결에 발렌티나를 조금 가벼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실제로 그녀가 말을 가볍게 해 버린 건 문제이기도 했고. 혹시 그녀의 선생님들이 섭섭하게 여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다행히 내가 철저하게 부인하자 아이들의 시선도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쇼팽 콩쿠르 본선 진출이란 성과에 내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데엔 여전히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선배는 쇼팽도 잘 치시죠? 저번에 들었었는데…… 쇼팽 소나타 1번이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맞아요. 저도 그래서 선배가 당연히 쇼팽 콩쿠르에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참에 물어봐도 돼요? 왜 퀸 엘리자베스를 택하셨는지?”
후배들이 별생각 없이 묻고 있다는 건 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겠지. 하지만 난 거기에 대해서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정말 오랜 시간 쇼팽의 음악을 공부해 왔기에 난 지금도 잘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어떤 목적이 있거나 혼자 연습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 앞에선 잘 연주하지 않는다.
가급적 내 레퍼토리의 뒤편으로 밀어 놓으려고 하는 편이다.
이 아이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잘한다면 당연히 자주 꺼내어 써야지, 그걸 감춘다는 건 이상한 일일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원래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게.”
내가 머뭇거리자 후배들 역시 난감해했다.
오늘 나에게 발렌티나의 이야기를 하면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예상과 달리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니 되레 단체로 날 괴롭히는 것처럼 느낀 모양이었다.
서서히 어색해져 가는 분위기에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뭐 해? 너희들. 복도를 딱 가로막고.”
그때 마치 구세주처럼 리처드와 한승우가 끼어들었다. 난 화색을 띠며 얼른 대답했다.
“쇼팽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발렌티나와 바르바라요.”
“아, 걔들. 언제 온대?”
“오늘 오후예요. 학교에 잠깐 들른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 말을 듣고 나자 후배들은 그제야 내게 집중할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차피 오후에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온다면 지금 날 붙잡고 묻는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 그럼 오후에 두 분 오시면 축하해 드려야겠네요.”
“그래, 그래야겠어.”
“뭔가 준비해야 하나?”
“폭죽이라도 사 올래?”
저마다 이야기하던 후배들은 힐긋 날 바라보더니 그럼 이만 가 보겠다며 흩어졌다.
그냥 적당히 이야기를 받아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랬다간 발렌티나의 가벼운 말이 일파만파 어떻게 퍼질지 예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내 선에서 이렇게 자르는 것이 낫다.
“후…… 살았어요.”
“뭔데? 도대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리처드는 상황을 다 아는 표정이면서도 킥킥거리며 되물었다. 그는 이럴 때 은근히 짓궂은 면이 있다.
아까 후배들에게 날 괴롭히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과 반대로 그는 틈만 나면 날 괴롭히려 든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난감해해? 음, 내가 예상해 볼까? 아마 발렌티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수습하려고…….”
“다 알면서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재미있잖아.”
못마땅한 투로 쏘아붙이자 리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정말 못 살겠다…….
어차피 지금은 무어라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만히 있는 한승우에게 눈이 간다. 기특하게도 그는 날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는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에게 고맙다고 한마디 해 주려는데 리처드가 재미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타티아나. 아까 오면서 이 녀석이 뭐라고 했었는지 알아?”
“예?”
무슨 말?
의아해하며 묻자 갑자기 한승우가 성난 곰처럼 버럭 했다.
“하지 마.”
“뭘? 난 그저 네가 했던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아예 무력으로 제압하려는지 리처드에게 손을 뻗었다.
물론 그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리처드는 스르륵 돌아 빠져나가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니 뒤편에 서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날 한승우 쪽으로 돌렸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잡히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그보단 어이없음이 더 강했다. 이 사람 지금 날 방패로 쓰고 있는 건가?
황당해하며 올려다보자 한승우 역시 날 마주하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멈추어 섰다.
당장 그가 손을 뻗어 날 어디론가 집어 던지고 리처드를 마저 처분한다면 거기에 대항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거 놔요, 리처드.”
“크흐흐.”
고개만 돌려 뒤쪽을 향해 경고하자 리처드가 낮게 웃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려던 찰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 녀석도 인터뷰 봤었나 봐. 그런데 그러더라고. 자기가 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무슨 말이에요, 그게?”
“글쎄?”
난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고, 리처드 역시 다 말한 주제에 모르쇠로 둘러댔다.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한승우는 내게 쇼팽을 배웠다고 말한 발렌티나를 보며 자신이 그녀보다 내 쇼팽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쇼팽 소나타 1번을 내 앞에서 연주하여 인정을 받아 낸 바 있다.
난 그의 연주가 정말로 내 소리와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쇼팽에 국한하여 발렌티나와 한승우, 두 사람 중 누가 더 내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따져 본다면 아마 한승우가 조금 더 나와 가까울 터였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한승우도 알고, 리처드도 안다.
한승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는 일이 드문 한승우는 지금 상당히 보기 드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약간 복잡한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쇼팽 콩쿠르에 나가지 그랬니?”
“……그러게 말이야.”
한승우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회한다는 투였다.
하지만 난 그가 왜 쇼팽 콩쿠르에 나가지 않았는지 잘 안다.
발렌티나가 무대에 올라 음악을 연주하고도 자신 있게 인터뷰한 것과 달리, 한승우는 내게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엔 건너뛰기로 한 것이었다.
음악가로서의 자립성과 나에 대한 배려.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진다. 그는 상당히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신중하게 결정해 줘서 고마워. 5년 후엔 나갈 거지?”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
그는 끝까지 신중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흘러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마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그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내 영향력을 완전히 먹어 치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난다면 훨씬 더 강해져서 무대에 오르리라.
그 언젠가를 예감하며 난 빙그레 웃었다.
***
오후엔 발렌티나와 바르바라가 학교에 등교했다.
선생님들을 뵙기 위해 잠깐 온 것이었지만, 그녀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서 내가 가서 이야기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
이 열광적인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고 나면 괜찮겠지 싶어서 일부러 난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 타티아나.”
“선생님과 이야기는 끝나셨나요?”
타이밍이 생긴 건 발렌티나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나왔을 때였다.
난 연습하러 가지 않고 일부러 복도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발렌티나와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갑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녀와 포옹했다.
“축하해요.”
“응, 고마워. 물론…… 반년 후에 더 잘해야겠지만.”
“그건 그때고요.”
본선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야 앞으로 발렌티나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살아가는 데에 좋은 이력으로 남길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복잡한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복잡한 건 치워 놓는다 하더라도 지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그나저나 발렌티나.”
“응?”
“그런 말씀은 왜 하신 거예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데도 발렌티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왜 인터뷰에서 굳이 내 이름을 꺼내어 자신의 대단함을 일부 넘겨줬는가. 거기에 대한 발렌티나의 대답은 단순했다.
“왜긴 왜야? 듣자마자 바로 알았을 것 아냐?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어떻게 넘어가?”
생각도 못한 대답에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서 난 우리가 상당히 많은 음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그걸 굳이 언급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발렌티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결국 난 웃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어? 설마.”
“진짜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바라보는 발렌티나를 향해 웃어 보이며 난 다시 그녀의 손을 쥐었다.
“곧 제가 보여 드릴 차례네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발렌티나와 바르바라는 쇼팽 콩쿠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돌아왔다.
다음은 나와 아나스타샤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