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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049화 (1,049/1,277)

##  1049화

발렌티나와 잠깐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계속 인사를 해 왔다.

발렌티나는 인사를 받아 주다가도 내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한지 눈치를 봤다.

하지만 난 지금 그녀가 주목받는 것이 기분 좋았다.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다.

바르바라가 방송국에서 연락을 받은 것처럼 발렌티나 역시 그럴 확률이 높았고, 아마 그렇게 되면 발렌티나의 이름을 아는 세상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니 기뻤다. 그런데 발렌티나는 자기 이야기는 이쯤 하자는 듯 슬쩍 주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어쨌든…… 너도 이제 일주일 남았지?”

난 계속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당장 눈앞에 중요한 일이 닥친 건 사실이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콩쿠르 시작은 다음 달 3일이지만 일찍 가야 한다고 해서요.”

“준비할 게 많구나.”

일반적으로 국제 콩쿠르는 며칠 정도 여유를 두고 가면 충분하다.

그러나 나와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최대치라고 할 수 있는 일주일 정도를 여유로 두려고 하고 있었다.

가서 한 달이나 머물러야 하는 장기 일정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더 길게 잡고 미리 현지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상상하는 것 같더니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아나스타샤랑 같이 가겠네……. 음, 혹시 유리 아저씨나 루슬란은 같이 안 가?”

“일정이 너무 길어서 그건 제가 괜찮다고 했어요.”

“한 달 일정이니까…… 좀 길긴 하지.”

예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아노 콩쿠르에 루슬란 오빠를 데리고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빠와 함께 벨기에에 간다면 내 입장에선 당연히 편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의 시간을 한 달이나 빼앗을 순 없었다.

난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시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미 혼자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한 달 동안 머물 호스트 패밀리와 연락도 했고요.”

“어라, 진짜? 난 네가 호텔에 묵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각자의 사정으로 어떤 옵션이든 선택할 수 있고,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굉장히 많다.

가장 편하고 안락한 방법을 고른다면 전용기를 타고 가서 최고로 좋은 호텔 방에 머물면 되겠지.

이젠 아버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 혼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함께 머문다면 아마 즐거운 여행길이 될 터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번 일정은 여행과 전혀 달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깐깐하게 참가자들을 관리하는 콩쿠르로 유명하기도 했다.

때문에 난 콩쿠르 측이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에 따르고 싶었다.

모든 참가자들에게 공통으로 제공되는 옵션은 비행기 티켓을 받아 벨기에 브뤼셀까지 온 다음 호스트 패밀리의 가정에서 숙식하는 것이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똑같이 할 예정이에요.”

보통 호스트 패밀리를 신청하는 가정들은 브뤼셀에서도 여유가 있고 콩쿠르 참가자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가정들이었다.

심지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엔 이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하는 가정들이 워낙 많아서 제일 좋은 조건을 지닌 가정들만 남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그렇게 불편하진 않을 것이다.

발렌티나는 그래도 살짝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호스트 패밀리는 불편할 텐데……. 그냥 호텔에 묵는 참가자들도 많을걸?”

물론 조건이나 편의만 따지고 볼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가정에 신세를 진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으니까. 난 그런 부분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편할지 아닐지는 가 보면 알겠죠? 후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때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주일 먼저 가려고 하는 거고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언제든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큰 걱정을 하고 있진 않았다.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하는 가정들은 연주자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

저번 차이콥스키 콩쿠르 때 내가 예카테리나를 집에 초대해서 며칠간 재워 주고 연습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도 바로 호스트 패밀리 일을 한 것이었다.

그때 난 예카테리나에게 일절 터치하지 않고 온전히 콩쿠르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마 내가 가게 될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한데…… 만약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될 뿐이다.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하자 발렌티나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물어보았다.

“설마 경호원들도 없이 가는 건 아니지?”

“그건 아버지가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요.”

“그래…… 절대 안 되지. 빅토르라도 같이 가 줘서 다행이다. 진짜로.”

발렌티나가 원래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원래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가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걱정이 든다.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가……?’

물론 평소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게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발렌티나의 진심이 궁금해서 살짝 물어보니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낸 모양이다.

그녀는 한바탕 깔깔거리며 웃더니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 쳤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해외 콩쿠르 갔다 와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옆에 의지할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아.”

“그 와중에 선배들은…… 알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바르바라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발렌티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걱정은 먼 곳에서 치러지는 콩쿠르의 무게감을 겪어 본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가볍게 웃어 보이자 발렌티나도 괜한 소리 해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덧붙였다.

“저도 아나스타샤가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뭐…… 그 애라면 믿을 만하긴 한데, 결국 항상 같이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계속 서로를 챙기는 것도 어렵더라고. 콩쿠르에선.”

“그렇겠네요.”

“아, 진짜 해 줄 말이 너무 많네.”

단순히 어떤 결과를 냈는지 같은 건 두 번째 일이었다.

발렌티나는 그보다 조금 더 디테일한 이야기들을 내게 해 주고 싶어 했다.

11일의 긴 일정 동안 해외 콩쿠르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은 그다음 해외로 나갈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테지. 나도 발렌티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복도에서 잠깐 서서 이야기하는 우리에겐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이미 시간이 한참 흘렀다.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을 슬쩍 확인하더니 말했다.

“근데 오늘은 지금 당장 가 볼 곳들이 있어서……. 내일 이야기하자. 어때?”

“바쁘시네요.”

“진짜 너무한다니까? 모스크바에 오자마자 엄마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이게 뭐야?”

“후후.”

투덜거리는 발렌티나를 달래 주었다. 어차피 나도 지금은 친구와 수다를 떨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저도 레슨받으러 가 볼게요. 내일 봐요, 발렌티나.”

“응. 내일 봐!”

손을 흔들며 발렌티나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마 앞으로 며칠 정도 발렌티나와 바르바라, 옐브루스 선배는 바빠질 테지. 난 여기저기에서 그 이름들을 볼 때마다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마냥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없다. 곧 내게도 일정한 시간이 기회로 주어질 테니까.

그것을 제대로 낚아채려면 착실한 준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발렌티나가 떠나간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레슨실로 향했다.

***

연주를 끝내고 손을 내리자 악보를 든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독주곡 레퍼토리는 끝난 건가?”

“예, 선생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악보를 다시 뒤로 몇 장 넘기시더니 고심하는 눈빛으로 침묵하셨다.

그러더니 악보를 덮어 버리고는 날 바라보았다.

“이 곡은 내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이미 네가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제가 느끼고 있는 게 맞을까요?”

“네가 맞다고 생각하면 맞겠지.”

정말 아예 손을 놓아 버린 것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난 미하일 선생님이 내게 이런 자유를 주실 때 상당한 고민 끝에 허락하신다는 걸 알고 있다.

난 괜히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물었다.

“제가 오만해지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해 주시나요?”

“오만…… 글쎄? 그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

장난스럽게 웃자 미하일 선생님도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럴 성격이 못 되는 사람이라는 건 이미 그 누구보다 선생님이 잘 알고 계시는 것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악보를 옆에 내려놓으셨다.

그러고는 나와 가까운 학생들을 몇 떠올리시는지 잠시 생각을 하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넌 에르네스트처럼 가끔이라도 속 썩인 적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예?”

“아무것도 아니란다.”

내가 당황하여 되묻자 미하일 선생님은 가볍게 넘어가셨다. 하지만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이름이 나온 것을 난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여전히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 자주 그에게 전화를 해 보곤 했지만 한 번도 신호가 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믿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아무 소식도 없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자꾸만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 미하일 선생님이 속 썩인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더더욱 그랬다.

“…….”

하지만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들을 붙잡고 에르네스트가 잘하고 있는지 상황을 물어보는 건 그리 의미 있는 일이 아닐 것 같았고, 어차피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도 뻔했다.

내 콩쿠르에나 집중하라는 말이 나오겠지.

이미 할 수 있는 한 콩쿠르로 여러 가지를 눌러 놓고 있는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답답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기도 했고…….

생각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에르네스트는 대체 왜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락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린 걸까.

그가 이루고 싶어 하는 목적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매정하게 느껴진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 혼자 생각해 봤자 에르네스트에 대한 섭섭함만 커질 것 같았다.

선생님도 우리 이야기만 하자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매번 확인하지만 또 한 번 물어보마, 타티아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니? 벨기에 쪽과 연락은?”

“어제도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리고…… 비자도 내일이면 나올 것이라고 들었고요.”

“그래, 잘하고 있구나.”

출발 예정일이 다가오자 이젠 음악 외에도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경험 많은 베테랑답게 여러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 주셨다.

난 선생님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꼼꼼하게 반영했다.

그렇게 준비와 일정 확인까지 마치고 나니 딱 레슨을 마칠 시간이었다.

누군가 레슨실 문을 노크했다.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하니 4학년 후배인 이반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다음으로 레슨을 받아야 할 학생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내일은 협주곡 위주로 다시 한번만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거라.”

더 미적거리고 있을 틈은 없어서 난 재빨리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레슨실 구석에 있는 이반에게 다가가 작게 응원했다.

“레슨 열심히 받으세요, 이반.”

“어, 그…… 감사합니다…….”

“후후.”

묘하게 쑥쓰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

마음 같아선 옆에서 레슨받는 모습을 잠깐 견학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진 않기로 했다.

“…….”

레슨실 문을 닫고 나온 나는 복도에 잠깐 멈추어 섰다.

이제 오후에 필수로 해야 할 일정은 다 마쳤다. 남은 건 연습뿐인데, 학교에서 해도 되고 집에 가서 해도 된다.

‘아나스타샤는 어디에 있지?’

항상 있는 연습실에 있을 것 같아서 그쪽으로 가 보려던 차였다. 난 복도 중앙에서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커다란 선생님을 마주했다.

“아, 구세프 선생님.”

“……레슨은 끝났나?”

구세프 선생님은 날 보자마자 레슨 이야기부터 물어보셨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생님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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